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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의 판도라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4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희망과 불행이 뒤섞인 콩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들녁출판사의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시리즈는 21세기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영어권, 프랑스어권, 독일어권, 스페인어권을 포함한 다양한 나라의 최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차가운 피부』로 시리즈의 첫번째를 장식했던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이 아프리카 콩고를 배경으로 한 『콩고의 판도라』를 내놓았다. 인류의 불행과 희망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유명한 판도라, 콩고에는 어떤 판도라가 숨어 있을까.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머스 톰슨은 대필 작가다. 그는 프랭크의 대필 작가였지만, 프랭크는 누군가의 대필 작가였으며, 그 누군가는 스펜서의 대필 작가였고, 스펜서는 프랭크 스트럽의 대필 작가였다. 프랭크 스트럽은 위대한 작가 플래그 박사의 대필 작가로, 결국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플래그 박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필 작가의 존재는 모른채, 또 대필 작가의 또다른 대필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채 플래그 박사의 소설을 끊임없이 칭찬한다. 어느날, 우연한 사고로 토머스 톰슨을 제외한 모든 대필 작가들이 죽게 된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플래그 박사에게 궁극의 대필 작가는 자신이라고 말하려다 오히려 무시만 당한다. 이런 그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야심찬 변호사 노튼은 톰슨에게 자신이 변호를 맡고 있는 살인자 마커스 가비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써달라고 한다.
모시고 있던 주인 형제를 죽이고 다이아몬드를 훔친 죄로 기소된 마커스 가비, 톰슨은 교도소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써내려 간다. 마커스 가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가 그동안 대필로 써줬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환상적이다. 마커스 가비는 자신이 주인 형제를 죽이지 않았으며 주인 형제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 그가 어떻게 다이아몬드를 얻게 됐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환상적인 모험을 들려준다. 또, 이야기 속에는 백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면서 아프리카 흑인 또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얼마나 잔인한 행동들을 했는지도 보여준다. 백인들은 그들을 단지 다이아몬드를 채집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다. 그랬다. 미지의 세계 콩고는 희망과 악이 서로 뒤엉킨 '판도라'가 된 것이다.
톰슨이 써낸 마커스 가비의 이야기는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마커스 가비의 무죄를 소리 높여 외쳤다. 결국 변호사 노튼이 바란대로 가비는 석방됐다. 이게 바로 문학의 힘이다. 변호사인 노튼은 할 수 없었지만, 작가인 톰슨은 가비의 석방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톰슨은 앞서 여러 대필작가에게 속았듯이 노튼에게도 속았다. 마커스 가비가 들려준 이야기는 노튼이 플래그 박사의 소설을 바탕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마커스 가비는 톰슨이 그려낸 것처럼 이 세상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모시고 있던 주인 형제를 죽인 살인마에 불과했다.
"톰슨, 문학과 문학산업은 처음엔 활자가 오고가고, 다음에는 숫자가 오가는 거야." (p.500)
소설은 숨가쁘게 읽혀진다.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다음 장을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책을 내려 놓을 수가 없다. '책 속의 책' 형태의 구성도 흥미롭고, 현실과 이야기 속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구조도 재밌다. 또, 단순히 재미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고민과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고찰도 함께 담고 있어 생각할거리도 던져준다.
영미소설이나 일본소설,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 독자라면,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시리즈를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소설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콩고에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되었다. 그 전투보다 더 큰 대량학살을, 그것도 유럽 한복판에서 자행된 학살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콩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콩고는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p.353)
09-81. 『콩고의 판도라』 2009/07/06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