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ㅣ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어릴 적에는 그렇게 쓰라고 해도 절대 스스로 써지지가 않던 일기인데, 나이가 들면서 자꾸 무언가를 메모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래도 어릴 적에 비하면 기억해야 할 것도, 기억하고 싶은 것도 많아진 탓이겠지. 게다가 더이상 기억력이 나에게 신뢰를 줄 수 없는 탓도 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는 하룻밤의 꿈들, 뒤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일상들, 눈에서 멀어지면 머리에서도 잊혀지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만큼 서운하고 쓸쓸한 일이 없을텐데, 그렇게 기억해줘야 할 사람이 정신없이 잊고 살 때 그 기억들은 어디에서 숨쉬고 있을까.
17세의 쌍둥이 남매에게 경찰이 찾아온다. 박물관의 경비원인 아버지가 유물을 훔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남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단서로 남동생 올리버가 크바시나로 모험을 떠난다. 크바시나는 '잃어버린 기억 속의 세상'이다. 누구나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렸을 때만 올 수 있는 곳, 마음에서 잊힌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올 수 있는 곳이다. 그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줘야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잊힌 사람들만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떠나고 나면 세상에 남아있는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다시 기억해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제시카는 이 세상에서, 올리버는 크시바나에서 아버지의 흔적과 단서를 찾아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아버지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크시바나에는 온갖 잊혀진 것들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람들, 새로 사버리는 바람에 없어도 아쉽지 않은 손때가 잔뜩 묻은 물건들, 지난밤 꾸었던 꿈들, 우리가 잊고 사는 역사적인 사실들 등. 분명 한때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인데 그렇게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더이상 찾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책을 덮고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내일 모레면 서른인 사람이 아직도 스스로를 '소녀'라 부르고 있다. 그만큼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를 좋아한다. 같은 또래의 누군가가 아직도 유치하게 그런 걸 보고 있니, 하며 핀잔을 주어도 꿋꿋히 좋아한다. 아직 소녀인 나에게는 전혀 유치하지 않은 꿈과 모험이 가득한 이야기니까.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판타지 문학이라는 것이 다른 장르와 비교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는 정말 멋진 작품들도 있지만 환상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미하엘 엔데를 제외하면, 많은 작품들이 장르 때문에 평가 절하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나름 국내 출판계에서 판타지 장르를 정착시켰다고 할 수 있는 이영도 작가 조차 그런 평가를 받을 정도니 말이다. 판타지 문학이라고 해서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모든 작품들을 평가 절하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더불어 더 많은 판타지 문학들이 쏟아져 나와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아무튼 환상문학의 대가 미하엘 엔데가 발굴한 작가인만큼 랄프 이자우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을 위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어른의 안경은 벗어던지고 소녀, 소년의 눈으로 읽어보라. 그렇게 하면 판타지의 즐거움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8/01/10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