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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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노동(고용)은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가! 내일을 대비할 수 없어서 걱정인 우리들에게!

2020년의 첫 날, 첫 책으로 선택했다. 예전에 읽었던 『딸에 대하여』가 좋은 인상으로 남아서 '김혜진'이라는 작가 이름만 보고 선택한 책인데, 책을 읽으면서 화도 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새해 첫 날엔 좀 더 희망차거나 각오를 다질 수 있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주인공과 같은 심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을 일했다. (9쪽) 그러던 어느 날 부장이 불러서 갔더니 명예롭게 퇴직시켜줄테니 이제 그만 사직서에 사인을 하란다. 부장의 말처럼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는 계속 다녀보겠다고 했다. 아직 퇴직 이후이 일들을 준비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인들이 그럴 것이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다른 일을 준비할 겨를 혹은 여유가 없다.

그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고 준비할 만한 시간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오늘 해야 하는 일은 많았고 그걸 다 해내면 어김없이 하루가 끝났다. 그의 하루라는 건 처음부터 그의 능력과 노력, 수고에 맞게 잘려져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겨우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쪽

그가 계속 회사를 다닐려면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는 벌써 세 번째 교육 대상자가 됐고, 세 번째 교육이 끝나면 최종 평가서가 나오고 평가 점수에 따라 그의 업무나 업무지가 변경될 수도 있었다. 회사에서 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책을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의 업무와 지정도서 내용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회사가 원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아마도 회사는 처음부터 모범답안이라는 것을 정해 놓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의 보고서 내용이 어떻든 간에 평가점수를 나쁘게 매기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평가점수가 좋지 않았던 그는, 그동안 해왔던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 지역 상품 판매 부서로 발령이 났다. 터미널 근처 거점 판매센터라는데, 말만 '거점'이지 '거점' 삼아서 영업을 할만한 곳이 없다. 상품을 판매하지 못하면 둘째 달부터는 기본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자신의 담당 구역을 돌아다녔다. 공단지역이라서 주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그들의 편리(예를들면, 인터넷이 안되면 고쳐주는)를 봐주며 조금씩 인심을 얻기 시작했고 둘째 달에는 드디어 상품을 하나 판매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회사는 그의 이런 영업 판매 방식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출장비를 받고 수리를 해주는 직원들과 업무가 겹치게 된다고 말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동안 돈돈하게 얻어뒀던 인심까지 잃어갔다. 그 외국인 근로자들도 서운했을 것이다. 계약하기 전에는 공짜로 수리도 다 해주더니, 정작 계약을 하고나자 콜센터에 접수하라고 하니.

처음부터 영업이라고는 배운 적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영업할 수 없는 곳에 밀어 넣고 어떻게든 뭐든 팔아보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덫에 걸려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덫이라고 생각하자 정말 그런 것처럼 생각됐고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 83쪽

영업 실적이 나빴던 그는 다른 곳으로 또다시 파견됐다. 이번에는 지방 소도시 시설1팀으로 발령 났다. 1년간 수리, 보수 및 설치 업무를 담당하고, 업무 평가가 좋으면 재고용을 보장한다는 회사의 약속이 있었다.(125쪽) 오랫동안 현장팀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으니, 비록 몸이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 몫까지 더 열심히) 열심히 일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고객의 나쁜 평가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조작되었을지 모른다. 고객은 아주 사소한 트집을 잡았을 수도 있는데, 회사에서 부풀린 것일지도. 왜냐하면 그는 미운털이니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일방적인 업무 배제였다. 출퇴근 명부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고, 더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는 대기 발령 상태였다. 하지만 노조에 가입하고 반년이 지난 뒤에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제 더이상 본사 소속 직원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존 월급의 80퍼센트를 보장하고 단일 직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하청업체 소송으로 일하다가 현장 업무가 모두 완료되면 본사 소속으로 복귀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새로운 발령지에 도착해서 보니 그가 맡은 업무는 마을 주민들의 반대가 심한 곳에 송전탑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는 마을 주민들과 부딪히고 어깨 싸움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슨 단체에서도 다녀가고 뉴스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의 신상이 털리기도 했다.

78구역 1조 9번. 그가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부여받은 소속과 이름이다. 이제부터 그는 '9번'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를 '9번'이라고 부른다. 그도 직장동료들을 '3번'이나 '7번'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진짜 이름은 더이상 필요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존중 받을 수 있는 그들의 역할이나 업무가 없는 것처럼.

그는 지금껏 해온 이 일이 자신의 일이고 그 외에 다른 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시 처음처럼 어떤 일에 매달릴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168쪽

'9번'이 된 그는 달라졌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일도, 그저 회사에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진행한다. 노동(고용)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노동(고용)에 점점 잠식되어가는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사는 회사일 뿐이다. 가끔씩 회사(대표 일가)를 상대로 의리 혹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회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이익단체일 뿐이다. 자신의 영리에 반하는 것은 그냥 두지 않는다. 회사 따위에 의리를 기대하는 우리가 잘못된 것이다. (라고 늘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우리를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말도 제발 거둬두길. (쓰다보니 흥분해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새해 첫 날이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기운을 얻고자 했는데 영 틀려버렸다. 물론 소설적인 설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어딘가에는 있을법한 이야기. 이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무엇과도 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부당한 일을 겪고 있을까. (그나마 그는 회사에 노조가 존재해서 명예 퇴직이라도 제안받을 수 있었을텐데.) 게다가 노동(고용)에 사로잡혀 그날 그날의 소확행만 추구하는 내가 그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암담하다. 직장인들의 가장 큰 꿈이 사직서를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 사직서를 당당하게 던지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

그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누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113~114쪽

해선을 괴롭히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들이었다. 내일을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 대비할 수 없을거라는 걱정. 168쪽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들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냇다.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끊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걸지도 몰랐다. 223~224쪽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어떤 일을 발견하게 될 거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일이 되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지 알게 될 거였다. 그 일을 지속하기 이해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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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03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노동! 전 존 버저의 신간 노동 3부작을 노리고 있습니다.

뒷북소녀 2020-01-03 15:18   좋아요 0 | URL
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다른 제목이 있는건지 못 찾겠어요 ㅠㅠ

2020-01-03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8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