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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평점 :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의 개념이 깨지는 순간!
내 손목시계 바늘이 12시를 가리킬 때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4시를 가리킬 때쯤 책 읽기를 마쳤고, 지금은 다시 12시 방향을 향해 돌고 있다.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관찰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 저자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나처럼 정리를 잘 못하는 독자가 있을거라고 예상했는지, 마지막 부분에 책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 준다. 저자보다 더 저자의 이야기를 잘 정리할 자신이 없어서 길지만 그대로 옮겨본다.
우리는 온 우주에서 균일하게 동등하게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익숙한 시간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온 우주에 하나의 현재, 하나의 ‘지금’이 실재한다. 모든 사람에게 과거는 고정돼 있고, 이미 도래했으며 지나갔다. 미래는 열려 있고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현실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흐르고, 사물의 진화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이 세상의 기본 구조라고 생각했다.
이 익숙한 틀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시간은 아주 복잡한 현실의 근사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온 우주에 공통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3장)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순서가 있을 뿐이다. 우리 주위에는 현재가 있지만 멀리 있는 은하에서는 그것이 ‘현재’가 아니다. 현재는 세계적이 아니라 지역적이다.
세상의 사건을 지배하는 기본 방정식에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2장) 그 차이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생각과 함께, 과거에 세상이 우리에게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문제가 될 뿐이다.
지역적으로, 시간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 우리가 물체 덩어리에 가까울수록(1장), 우리가 빨리 움직일수록(3장)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른다.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단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시간이 흐르는 리듬은 자체의 동역학을 지니고,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실체인 중력장에 의해 결정된다. 양자 효과를 무시하면,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담고 있는 거대한 젤리의 양상들이다.(4장)
하지만 세상은 양자적이고, 젤리 같은 시공간 역시 근사치이다. 세상의 기본 문법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오직 물리량을 변화시키는 과정만 있을 뿐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확률과 관계를 산출할 수 있다.(5장)
지금 우리가 아는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과 유사한 것이 별로 없다. 특별한 ‘시간’ 변수도 없고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없고 시공간도 없다.(2부) 우리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정식을 쓸 줄 안다. 이 방정식에서 변수들은 서로에 상대적으로 변화한다.(8장) 세상은 ‘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화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꽉 막힌 우주’도 아니다.(7장) 오히려 사물들이 아니라 사건들로 가득한 세상이다.(6장)
여기까지는 시간이 없는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이었다. 그 우주에서 돌아오는 여행은 시간이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시간 감각이 생길 수 있었는지(9장)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다. 놀라운 일은, 시간의 친숙한 면들이 출현하는데 우리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 세상의 작은 일부인 인간의 관점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세상을 본다. 세상과 우리의 상호 작용은 부분적인데,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보게 되는 이유다. 이 희미함에 양자의 불확정성이 추가된다. 그로 인한 무지가 특별한 변수인 열적 시간(9장)의 존재와 우리의 불확실성을 양화한 엔트로피의 존재를 결정한다.
아마도 우리는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면서 열적 시간의 한 방향으로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특별한 부분 계에 속하는 것 같다. 따라서 시간의 방향성은 실제적이지만 관점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10장)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우주의 전개를 이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잔존물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도록 한다.(11장) 인간은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기억으로 뭉쳐져 있는, 엔트로피 증가는 대역사의 산물이다. 우리는 각자 각자가 하나의 통합된 존재다. 세상을 반영하고 있고, 타자와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하나의 통합된 실체의 이미지를 구축해왔으며 기억으로 통합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2장) 여기서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라 부는 것이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의 경과를 경청할 때 듣는 소리다.
‘시간’ 변수는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변수 중 하나다. 중력장의 변수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4장), 우리 규모에서는 양자의 요동을 기록할 수 없기에(5장) 시공간을 아인슈타인의 거대한 연체동물처럼 잘 확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규모에서는 이 연체동물의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무시될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을 탁자처럼 견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탁자에는 차원들이 있는데 우리가 공간이라 부르는 차원과 시간이라 부르는, 엔트로피가 그것을 따라서 성장하는 차원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빛에 비해 매우 낮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계마다 서로 다른 고유 시간이 있음을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며, 또한 어떤 물질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따라 다르게 흐르는 시간의 속도 차이도 너무 작아 식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균등하고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 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하여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근사치들에서 파생된 확연히 구분되는 수많은 특성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 구조의 복잡한 개념,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시간의 개념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층적인 측면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제각각의 다양한 층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잇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 시간의 주위를 맴돌고 나서 알게 된 시간의 물리적 구조이다. 199~204쪽
이것을 좀 더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곳에서나, 무엇을 하든 시계바늘처럼 시간이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라는 사실. 시간은 단순히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우리가 '현재' 혹은 '지금'이라고 정의하는 시점도 문법적인 개념일 뿐 과학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 저자는 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자라는 것.
그는 친절하지 않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이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가 간단하다고 말하는 이론 조차 나같은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어쩌면 진짜 물리학적인 접근은 어렵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한 아리스토텔레스나 뉴턴의 연구를 언급하며 인문학적인 접근을 했던 것일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사물의 변화에 맞춰 우리의 상황을 규정하는 방식이자 날짜의 변화와 계산에 맞춰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변화의 척도이다. 아무 변화도 없으면 시간도 없다. 72~73쪽
아무 움직임이 없으면 시간은 없다. 시간은 움직임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73쪽
뉴턴은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 없이 ‘진짜’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의 움직임마저 얼어붙어버려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게 그리고 동일하게 계속 흐른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시간과 반대인 것이다. 74쪽
뉴턴에게 시계는 항상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동등하고 균일한 시간의 흐름을 좇으려 하는 장치였다. 뉴턴은 이 ‘참된 수학적 절대 시간’은 인지할 수 없고 현상들의 규칙을 관찰하고 계산해서 추론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뉴턴의 시간은 우리 감각의 증거물이 아니라 우아한 지적 산물인 것이다. 76쪽
뉴턴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인류에게 시간은 사물이 어떻게 변하는지 헤아리는 방식이었다. 뉴턴 이전에는 그 누구도 사물과 상관없는 시간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77쪽
그는 시간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펼쳤던 아리스토텔레스(시간은 변화의 척도일 뿐)와 뉴턴(아무 변화가 없을 때도 흐르는 시간이 있다)의 사례를 들며, 그들이 어떤 실험이나 실측 없이 오직 사유만으로 그런 성과를 얻었다고 추겨세운다. 이것은 저자가 현재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의 연구 또한 추측만 있을 뿐, 어떤 실측값이 없기 때문이다. (부제에서도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이라고 밝혔듯이 사실 이 분야는 실측값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긴 하다.)
그 답변이 우리가 오늘날 유일하게 옳다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정답은 아니다. 양자중력 이론의 대표적인 한 흐름인 루프 양자중력 이론의 관점에서 이끌어낸 일종의 이론적 추측일 뿐이다. 현재 양자중력 이론은 오직 이론적 상상을 통해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뿐이며, 아직까지는 어떤 실험적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우주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그 안에서 인간 세상을 재조명하게 한다. 매우 그럴듯하며 흥미진진한 상상이자, 양자 이론의 관점에서 중력 현상을 설명하는 천체 우주 물리학의 미개척 분야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옮긴이의 글」, 220쪽
이 책의 번역자이자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중원 교수 또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창을 열어두고 이 책을 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옮긴이의 글」에 의미있는 내용들이 있어서 덧붙여 본다.
이 책의 원제목 『시간의 질서』는 매우 역설적이다. 마치 시간에 어떤 질서와 순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주장은 이와 정반대다. 시간에 어떤 순서나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 세계에서 바라본 우주의 특수한 양상일 뿐, 보편적인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지각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주 본래의 원초적 시간에는 순서나 질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흐름이 없다. 시간은 단지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 간의 관계, 좀 더 엄밀히 말해 이 관계들의 동적인 구조에 나타나는 양상이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번역 책의 제목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인 이유다. 「옮긴이의 글」, 221~222쪽
이 책은 일종의 ‘시간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 시간에 관한 이 우주의 거대한 이야기가 이 책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인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의 시간이 아닌 우주의 시간, 곧 시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더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옮긴이의 글」,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