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코엘료의 소설은 은근히 불안하다. 너무 흔한 이야기, 심리학 개론 정도로 이해했음직한 이야기를 장편으로 써내고 있는데 취향이 아니라면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듯하다. 결말이 예측되는 이야기는 웬만한 끈기 없이는 읽어 나가기 힘들다.  그래서 그를 읽을 때는 스토리보다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역시 마찬가지. 과정 중에 잠깐씩 영혼을 내려 놓고 쉴 만한 야트막하고 편안한 구릉이 있으니 그걸 놓치면 손해가 막급일 것이다.

시선은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지만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에 몰두하는 척하는 다른 여자들 곁에서.(p. 33)

-왜 자살하기로 했는가

'나 자신을 다스려야 해. 난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야.'
그랬다. 살아오는 동안, 그녀는 많은 일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밀고 나갔다. 하지만 모두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사과만 하면 간단히 끝날 불화를 계속 끈다거나, 관계가 밋밋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끝내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다던가 하는, 그녀는 가장 쉬운 일에서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강하며 무심하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허약했고, 학업이나 운동시합에서 결코 두드러진 성적을 거둔 적이 없으며, 가정을 화목하게 가꾸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잘한 결점들과 싸우느라 지쳐 정작 중요한 문제에서는 쉽게 무너졌다. 독립심 강한 여자처럼 행동했지만, 내심으로는 같이 지낼 사람을 열렬히 갈구했다. 그녀가 나타나면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대개 홀로 밤을 보냈다. 수도원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그녀는 모든 친구들에게 자신이 선망의 모델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에 부합하려 애쓰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누구나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데 써야 할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타인들, 그들을 이해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지!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고, 그들 자신이 만든 방어막 속에 갇혀 그녀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좀더 삶에 개방적인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들은 그 사람을 즉각 거부하거나, 열등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매도하여 상처를 입혔다.
좋다. 그녀가 고집과 결단력으로 많은 삶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치자. 그런 그녀가 지금 도달한 곳은? 공허. 완전한 고독. 빌레트. 죽음의 앙티샹부르.
(86~87p.) 너무 길군.

-빌레트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에 언제나 많은 사랑, 애정, 보호가 있었지만이 모든 것을 신의 축복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 하나가 부족했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만 더 미쳤어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어쨌거나 그녀를 계속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감히 자신의 꿈을 계속 밀고 나가지 못했다.
...........
어린 시절부터 베로니카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
"나는 좀더 미친 짓을 했어야만 했어."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에게도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119~120p.)

가능하다면 딸에게 읽도록 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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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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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당히 즐거운 소설. 깜찍한 이야기. 그러나 속은 깊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언제 다시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녀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기 전에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아서 소형 녹음기로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녹음해 두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드르렁거리며 콧숨을 쉬는 그의 마지막 숨결을 담아 두었다는 얘기였다. 그가 떠나고 꽤 세월이 흘렀건만, 부인은 여전히 --이따금 그러나 점점 뜸해지고 있다고 부인은 덧붙였다-- 카세트를 듣는다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그 양반은 아직 살아있는 셈이지요.(p.81~82)

佛文學의 느낌은 모든 佛作家에게서 시작될 게다.
느껴서 지금까지 남은 것이 있다면,
미셀 투르니에의 '소녀와 죽음' 속의 멜라니,
파트릭 모디아노의 '슬픈 빌라', 레몽 장의 '책 읽어 주는 여자',
장 필립 뚜생의 '욕조' 정도.
놀랍게도 문학부의 대학시절, 그럴 때가 아니라 하는데도
나는 물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佛小說들에 심취했고
또한 지금까지도 그 자락을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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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사전 - 여성판
밀로라드 파비치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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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인물의 창조와 묘사
-치밀하고 황홀한 일화의 배치
-유머러스한 직유와 은유

남의 일이 아닌 걸. 저건 하늘이 내리는 걸 거야.

그 학교에서 이 여행자는 가장 중요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여행자의 배꼽은 굽지 않은 빵의 배꼽과 같다. 이 사람의 여행은 너무나 길어서, 몇 해를 먹어치운다.(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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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현대문학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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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취한 밤이란 것은 어쩌면 내가 의식적으로 살아 주지 않아도 살아지는 부록같은 삶, 그러니까 여분의 인생이거나 혹은 시계로 잴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취해서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은 그 사람의 인생에 속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다음 어딘가 다른 곳의 시간에 가서 쌓이는 거다.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치 물의 여행처럼. 비이든 땅에 스민 지하수이든 사람의 몸 속에 물이든 오줌이든 혹은 주전자 속의 끓는 물이든 수증기든 다시 구름이고 비이든 간에 - 모습만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그 뿐일까. . . . . . (p.63)

-나중에 다시 아주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문단. 취한 삶, 혹은 시간에 대한 의미의 비약이나 응집은 더 이상 없음이 아직 아쉽다.

-내 취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아, 기분 좋았던 밤.
확실한 모습은 없지만, 그 시간들 만큼
생각만으로 행복하고 그리운 것이 없다면.
...내 행복한 시간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정말 은의 말처럼,
오려두기 했다가 잃어 버린, 아니 날려 버린 파일처럼
정말 존재하지 않는 걸까? 지금은?
그래. 취한 밤은 분명 같이 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형으로,
지금 내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배경을 감싼 아우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것처럼 선명하고 맑은 날씨였다.
.................
(p.135)

-이 불필요한 문학적 수사들. 이 수사들을 읽으면 먼저 골이 울리기 시작한다.
필요한 말만, 수사없이. 거칠 것 없이 정확한 개념의 상태, 또는 절대적인 행동, 단 1개의.
그래. 닿을 곳 없는 곳을 직선으로 날아가는 한 마리 검은 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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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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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덕목이다.(8p.)

-건조하고 냉정할 것.
가장 필요하지만 진짜 잘 안 되는 태도.
'마라의 펜'은 어디서 긴장해야 하는가를 시사한다.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 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10p.)

-젊은 자가 쓴 것이 분명하다. '극명하게 드러내기'란 젊음의 덕목. 하릴없이 너저분하게 살지 않겠다는 것도 젊음의 덕목. 그렇지 않으면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역시 젊음의 성장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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