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오랜만에 하루키를 읽었다.
-나는 본디 빨리 읽는 독서가가 아니다. 시간을 들여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가는 타입이다. 문장을 즐긴다. 문장을 즐길 수 없으면 도중에 읽는 건 그만둔다.(상권, 210p.)
;문장을 즐기며 읽다가 그만 문장 즐기기를 잊어 버리고 스토리에 홀랑 빠져 버리는 소설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떠올리려니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느 해인가 우리나라 소설에서 마음이 떠나 버렸는데 아마도 그래서인 듯하다. 번역소설이야 떠오르는 것이 있지만 어디 거기서 문장의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있겠는가. 문장의 좋고 나쁨은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세 해 전에 우리나라 소설들을 다시 좀 읽어 보겠다고 단번에 스무 권 정도의 단행본들을 사들였다. 모두 장편이었는데 스무명의 작가면 대강 돌아가는 모양은 알겠다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거 한 권을 떼기가 힘들었다. 첫장이 지겨웠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가 주인공이면 그 일인칭이 지겨웠고, 비틀즈 얘기가 나오면 또 그것이 지겹고, 재즈 얘기 나오면 ㅈ 자에서부터 지겨웠고 포르노그래피 어쩌구 하면 또 그것이 지겨웠다. 주인공이 출판사 직원이면 더 지겨웠고, 광고쟁이면 더더 지겨웠고, 날라리 자퇴생이 나오는 건 정말 지겨웠다. 여자가 주인공인 것도 지겨웠고 죽은 남편 얘기도 지겨웠다. 다 지겨웠다. 다만 기억에 남아 있고 꼭 읽어야겠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소설은 이치은의 소설이다.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이 소설은 내 기초작업 부실로 내려놓은 책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들이 익숙해서, 그리고 반가워서 좋아하지만 그 중 몇 권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그 중 몇 권은 읽지 않은 것이다. 그 소설들을 읽는 것은 간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읽지 않고 있다. 소설의 내용이 사실 무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아주 안 읽어버린 것은 아니다. 문학동네 소설상이나 오늘의 작가상 받은 것들은 그래도 좀 읽었다. 그러나 그게 다다. 오렌진가 토마톤가 하는 소설 읽다가 결국 여자들이 쓴 거는 외면하는 버릇까지 들고 말았다.(그래도 최윤이나 임영태, 윤대녕;이 사람이야 물론 단편이지만, 충전이 필요하긴 하지만 은희경, 귀여운 구효서 들들이 있으니 나라 걱정은 내 할 일이 아니로다. 게다가 아직 읽지는 않았어도 이만교도 좋다 하고 박민규는 무지 궁금하고 하니...)
역시 어느 해인가부터 나는 단편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읽을 책이 없다, 하고 번역소설이나 기웃거리고 앉아 있었던 것. 문장을 즐기는 자가 번역소설이나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등산을 하고 있는 것이나 한가지다. 백은 아니로되 제로도 아닌 것. 숨어 있는 것들은 숨어 있고 드러나는 것들은 고스란히 드러나 번역소설 역시 나름의 독법으로 그 문장을 즐길 수는 있는 것이다. 하루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우리 소설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나 완연한 소설가지만 그런 그림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소설가다. (그 그림자가 너무 넓고 짙은 것은 개나소나 그 그늘 아래로 너무 몰려가서일 것이다) 내 비록 그의 소설을 두 개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지나가며 넘겨본 그의 에세이들은 사실 좀 욕지기가 나왔다. 도대체 이 사람, 어느나라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감각은 일본소설이 분명한데 이거 어딘가, 인물들이 자꾸 일본에서 서양으로 튀어 나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미국 작가 토마스 울프 생각이 많이 났다. 미국 작가이면서 유럽의 전통적 글쓰기를 따라가려고 너무 공을 들인 작가. 미국 냄새가 나질 않아서 걱정스러웠고 들인 공만큼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들은 작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장편도 단편도 다 좋다.) 자국에서도 유럽 쪽에서도 그를 대접하지 않았다. 하루키의 이번 신간을 읽으며 그가 어디를 곁눈질하며 썼는지 짐작이 갔다. 스스로도 말했거니와 이제 세계적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마음. 오이디푸스도 프로이트도 그 근간은 아닌 나라에서 이만한 영향력을 지닌 작가가 왜 그 세계를 이런 식으로 넘보는지, 좀 애처롭다. 그 처음인 <상실의 시대>부터도 그랬지만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왜 좋은지를 생각해보면 먼저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꺼번에 바람처럼 날아와 안기는 것을.
<해변의 카프카>는 역작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왜 남는 것이 이리도 없을까. 이리저리 파고들어간 작가의 고심이 확연히 느껴지는데. 읽으면서 근래 세계의 여러 작가들이 두서없이 생각나서도 더 그렇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야 없지만 그가 다녀왔음직한 여행지들이 자꾸 떠오르는 식이다. 세계의 갖은 양념을 고루 넣었으나 그것이 어우러져 남게된 국물은 맛이 없다. 무미. 그러니 진국은 아니다.
내게 있어 하루키의 장점은 묘사에 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나비..
-주먹을 꽉 쥔 듯한 구름이..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날아가는 갈매기를..
-아주 강한 바람이 부는 운하 이쪽에서 저쪽으로 서로 외치고 있는 듯한 대화를...
같은 것들. 참으로, 그 정황을 마음 속에 눈 속에 새겨주는 것 같다. 앞뒤가 맞고 양옆이 겹친다. 이런 묘사를 읽고 있자면 하루키 문장이라는 것이 참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하루키를 읽는 맛은 그래서 이미지를 읽는 맛이라고 해도 좋다. 두 권으로 한 일주일, 내 눈 속에 마음 속에 참 많은 것들이 새겨졌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수록, 작가는 자기가 등장시킨 것이 설명할 꺼리라고 느낀 모양이다. 문장의 맛은 사라지고 설명적 진술이 늘어나서 힘이 팍팍 빠진다. 스토리조차 마감이 바빠서 언뜻언뜻 땜빵자국이 보인다.
한 삼 년 지나고 나면 하루키는 이보다 더 잘 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