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터 영화 <더 그레이>의 메인포스터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오늘도 생과 사의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 언제 어디서 단속반이 몰려올지 몰라 조마조마하며 장사하는 길거리 노점상들이 그렇고, 링거 하나로 목숨 줄을 연명하는 병원 입원 환자들이 그렇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그렇다.

자유시장체제, 글로벌시장경제, 한미FTA, 그 모두가 물고 물리는 게임과 같은 살벌한 체제 아니던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쓰러트리고 심지어 다시는 발 딛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밟는 약육강식의 짐승과도 같은 틀이 그것이다. 스님으로 살다가 격구에 뛰어들겠다던 드라마 〈무신〉의 김준도 그렇지 않던가. 그 앞에 신(神)은 철저히 배제당하고 만다.

리암 니슨 주연의 〈더 그레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회색지대를 보여주는 영화다. 살다보면 여러 지대를 만날 수 있지만 대부분 두 가지다. 대자연 속에서 생명이 넘실거리는 풍부한 녹색지대, 그리고 온통 죽어가는 사람들이 쌓이는 흑색지대가 그것. 영화는 그 속에서 삶의 끈질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리얼하게 연출한다.

영화에서 죽음을 부르는 공포는 두 가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의 혹한, 그리고 숲 속에서 떼를 지어 다니며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리고 있던 늑대들. 생존 본능이 강한 인간으로서는 그 어떤 혹한도, 그 어떤 짐승 떼도 곧잘 물리치곤 한다. 그게 대부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승리이자 감동의 드라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영화는 절망만 끌고 간다.

최초 비행기 추락사고로 살아남은 이들은 7명이었다. 한꺼번에 절반가량이 죽어난 것이다. 그 뒤 눈보라 속에서 불침번 서던 1명이 늑대에게 물어뜯기고, 그곳에서 이동하다가 또 1명이 늑대에게 잡혀 먹히고, 저산소증을 앓던 1명, 낭떠러지를 건너다 1명, 강가에서 1명이 낙오자로, 그리고 늑대를 피하려다 물속에서 또 1명이 죽는다. 결국 프로페셔널 가드인 오트웨이만 살아남는다.

▲ 포스터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잔인하지 않다면,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마지막 희망이라도 보여주려 했다면, 주인공만이라도 살아남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마저도 늑대와 사투를 벌이다 죽음으로 끝을 낸다. 물론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늑대가 죽었는지, 정확하게 밝히 않고 희미하게 처리한다. 그를 구출하러 헬기가 뜬 것도 아니고, 강가 가까이에 오두막이 보이지 않았으니, 관람객들 모두는 그가 죽었을 것으로 단정할 것이다.

조 카나한 감독은 과연 이 영화를 공포영화로만 처리하려 했을까? 단순히 늑대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여운으로 남길 작정이었을까. 정확하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족쇄다. 그 두 가지를 하나로 묶기 위해 실은 늑대라는 짐승을 투입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사실 비행기추락 이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어설픈 위로의 기도를 올렸다. 이동 중에 늑대와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자들도 함께 신에 대해 논쟁한다. 물론 주인공 오트웨이는 오직 폐 속에 품어 나오는 차디찬 공기만이 실재라고 강조한다.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그 현실을 마주한 인간뿐이라는 것. 그것이 신을 철저히 배제시킨 이유다. 오트웨인도 마지막 호소에서도 그렇게 읊조렸다.

▲ 포스터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주여, 제발 이러지 마소서. 이번에 도와주면 죽을 때가지 믿겠나이다. 그래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 할 거야. 그래 내 힘으로 살아남을 거야."

또 하나는 노동자들의 족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알래스카의 고단한 작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향하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처와 자식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족쇄는 생의 인연을 끊을 정도로 고단하다. 영화 첫머리에서 주인공 오트웨이가 총으로 자살하려는 것도, 강가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생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던가.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절망의 족쇄는 한 순간 짐승의 밥이 되어 죽는 것보다 더 독한 공포였던 것이다.

"살아 돌아가면 또 다시 밤새 기계 돌리고, 술만 푸고 살아야 할 것 아냐?"

가까이 살고 있어서 종종 듣는다. 청계천에서 노점상도 하고 상가를 얻어 일하고 있던 이들이 가든 파이브 하나만 믿고 모든 주권을 내 줬다가 졸지에 낭패를 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또 멀리 있어도 그런 소식도 듣는다. 재벌의 탐욕에 갈기갈기 찢겨진 정리해고노동자들이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함께 뭉쳐 살아갈 해법을 찾는다고. 바로 그들이 살얼음판의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이들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늑대는 아득한 공포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는 현실 세계의 재벌들이요, 자유시장체제요, 글로벌시장경제요, 한미FTA 체제를 굳히려는 정치권력들이다. 이러한 때에 신의 실존에 대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이러한 때에 노동자들의 족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삶의 해법이 없는 것보다 더 지독한 공포가 어디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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