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박현정'이라고 쓰고보니 참 쑥쓰럽다.(왜 내가 쑥쓰럽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엄마 아빠 동기 중 한명이라든가 하겠지, 아무튼 나는 오늘 독창회의 주인공이었던 소프라노 박현정을 현정이 이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고 있다. 이번이 부산에서 두번째로 가지는 현정이모의 독창회는데, 그에 대해 간단하게 쓰려고 한다.

  가장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베 마리아Ave Maria>였다. 예쁜 툴립같은 드레스를 입은 현정이모가 흐르듯 걸어나와 피아노 반주자에게 사인을 보내고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반주가 시작되고 무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깨달았다. 잠시 솜사탕처럼 부푼 기대를 조금 떼어내야겠다는 것. 첫 곡이라 그런지 아직, 아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황당한 피아노 반주자가 갑자기 손가락에 쥐라도 낫나, 음을 미묘하게 잘못 짚는 거다. 앞에 서서 노래하는 이모보다 뒤에 앉아 피아노 치는 그가 더 긴장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뒤에도 그의 만행은 줄줄이 이어진다. 반주음 뭉개기, 박자 틀리기, 목소리를 묻을 만큼 자기 연주에 심취하기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 다음, <갠지즈 강에 해는 뜨고Gia il Sole dal Gange>와 <그대 나의 죽음에Se tu della mia morte>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대로 간다면 독창회를 연 이유가 없을 터. 네번째 <제비꽃Le Violette>에서부터 상태는 호전되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매력적인 노래였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이제야 깨어난 듯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며, 표정 연기도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세상에... 기대의 솜사탕을 야금야금 뜯어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나는 얼른 동작을 멈추고 두 귀와 눈을 활짝 열어제꼈다. 아, 아름다워. 인간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이 곡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찾는 것들마다 이모의 스타일과 달랐다. 아무리 비슷할지라도 각각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갖는 다는 것이 인간의 목소리가 보이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후의 곡들은 가슴 속에 흩어진 솜사탕 조각들을 원래 자리에 붙이는 작업을 하면서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찾아온 인터미션. 귓가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사라지자 곧, 아주 당연한 듯 제비꽃이 나에게 다가왔다. 흠흠흠... 엄마, 경연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제비꽃은 나를 떠나지 않고 윙윙 맴돌았다. 경연이와 쿵짝이 맞아 반주자를 무섭게 씹으면서 짧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종소리가 울릴 때 간신히 제비꽃을 떨쳐냈다. 이모는 아까까지 보던 튤립같은 드레스가 아닌 하늘하늘한 구름같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아, 또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기분이 좋아서 의자에 폭 몸을 묻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까까지 씹던 위대한 반주자와 이모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꽃구름 속에>를 슬프게 만들었다. 어느 쪽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그게 문제 없는 거였는지, 나는 속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만 내 귀가 듣기에 반주가 너무 빨랐다. 목소리도 살짝 잠긴 것이 6학년 때 CBS주최 아카데미 윈드 오케스트라 초청 음악회에서 (왜 이리 길까나;;) 들었던 꽃구름 속에의 반도 미치지 못했다. 내가 가장 기대한 꽃구름 속에는 그렇게 해서 망쳐졌다. 잠시 그 음악회 때의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맑고 고운, 청아한 목소리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화아한 분위기를 냈었는데. 오늘 그만한,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듣지 못한 게 아쉽다. 충격에 휩싸여 있는 동안 <동심초>가 지나가고 어느새 <Vocalise>. 여기에서 다행스럽게도 나의 울적함은 완전히 회복되다 못해 다시 기대로 뛰었다. 흐으으으음- 계속 이렇게 반복할 뿐이었지만 목소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하나의 전달매체가 되어 강당을 울렸다. 으으, 감동.

  곡이 끝나고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간 이모는, 이번에는 테너 한 사람과 함께 나왔다. 그는 이칠성이었다. 내가 아카데미 윈드 오케스트라 초청 음악회에서의 소프라노 김유섬과의 <축배의 노래>를 듣고 반했던 사람. 일기장을 살펴보면, 소프라노는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지만 테너 파트가 정말로 좋았고, 웅장하고 커다란 느낌이 기억에 남았다고 적혀있다. 현정이모와의 이중창에서도 그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초반부에 가끔 둔탁한 소리도 들렸지만 역시 시간을 약으로 해서 달라졌으며, 6학년 때 들은 소프라노 김유섬(내가 이 사람에게 감정있는 건 전혀 아니다. 사실 노랫소리도 기억이 안 나는 걸. 다만 일기장이 그렇게 말한다.)과의 이중창과 달리 이번에는 소프라노도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아, 곡은 라미꼬 프리츠 중 <버찌의 2중창 새빨갛게 익어>라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다정한 모습으로(이 모습에 희윤이가 "저 사람 옛날 애인이야?"라고 물을 정도로) 끝을 맺고, 테너 이칠성의 독창이 이어졌다. 오페라 아프리카의 여인 중 <오 낙원이여Oh Paradiso>였는데, 상당한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소프라노 박현정의 무대가 이어졌다. 마치 이제야 시작이지!라고 외치는 듯한 오페라 루이즈 중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그날부터Depuis le jour>을 지나 마지막 곡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중 <아! 나는 꿈속에 살고 싶어요Ah! Je veux vivre>의 가락이 울렸다. 꿈속에서 살고싶다는 제목처럼(나는 가사를 알아듣는 재주가 없으므로 그저 제목과 분위기에 의존해 대충 곡을 느낀다) 방방뜨는 느낌의 줄리엣(이라고 생각한다)이 그려지면서 입이 귀에 걸렸다. 곡이 끝나고 울컥하는 감동으로 가득차서 박수를 치고 있는 나를 보았다.

  프로그램에 있는 곡이 끝났다고 음악회가 진정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앵콜이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꿈속에 살고 싶다는 노래를 다 듣고난 후에도 세번이나 더 무대에 서는 현정이모를 볼 수 있었다. 무슨 무슨 노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원래의 무대에서보다도 한층 물이 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테너 이칠성과 함께 나온 무대는 따뜻한 기운을 발해서 강당 안을 추운 바깥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로 만들어주었다.

  오늘의 독창회에서 느낀 것은, 현정이모는, 말하자면 슬로 스타터구나 하는 것. <제비꽃>에서부터 분위기는 살아났지만 진정으로 강렬한 자신의 이미지를 내뿜은 것은 <Vocalise>부터였다. 또, 현정이모가 아닌 다른 음악가의 독창회 혹은 독주회에 가 보고 싶다는 것. 내 기억에 의하면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있더라도 기억이 안 나니 무효지! 아무튼 오늘은 반루라고 하기에 너무 멋졌기 때문에 하루로 칭하기로 한다. 우하하. 기분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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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3-0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주회 같은 거 하는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몇달간 연습한 것들을 한순간에 보여야 하는 거... 그 긴장이란 말할 수 없을거에요.

플라시보 2004-03-0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제가 다녀온것 처럼 자세하게 써 주셨네요. 저는 음악회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니지 않지만 늘 가고 싶다는 마음은 품고 삽니다.

明卵 2004-03-03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정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정이모 독창회도 사실 기복이 많이 심했지만 제가 여전히 큰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것을 해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하기 때문이에요. 몇 달간 배운 것을 책상에 앉아 시험 보는 것 하나에도 제 손은 부들부들 떨리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가운데 갈고 닦은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난동부릴 일입니다.
플라시보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인사가 하고 싶어지네요. 그리 자세한 것 같지는 않지만(빼먹은 부분도 많고) 대리만족감을 느끼실 수 있다면 기쁘겠어요. (물론 불가능할테지만요)
 
연어 어른을 위한 동화 2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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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연어'. 연어라는 짧은 제목이 전해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어가 모천 회귀성 동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알을 낳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이 열심히 삶을 사는 이야기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짐작은 아주 틀린 것이었다. 주인공은, '연어'였다. 그것도 별종, 고운 은빛을 띄는 은빛연어.

연어, 라는 말 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가가 언젠가 썼던 글에서 한번 등장했었던 이 말은 소설의 첫머리를 멋지게 장식한다. 이 글귀를 읽는 순간,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멋진가. 얼마나 멋지게, 연어를 표현했는가. 바다에서 사는 시간이 아무리 많은 들, 그들의 생은 강에서 시작해서 강에서 끝나는 것을.

연어를 읽으면서, 나는 이 책과 '오체불만족', '어린왕자'와 작은 공통점을 느꼈다. 무려 두권! 크. 더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은빛연어는 외톨박이였다. 다른 연어들과는 달리 은빛을 띄는 그의 몸은 시도때도 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물수리나 불곰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았다. 무리를 습격의 위협속으로 몰아넣는 그를, 친구들은 따돌렸다. 어느 날. 친구들이 '이 은빛 별종아!'하고 놀리면서 지나갔다. 그가 웃으면서 무엇이라고 대꾸했는지 아는가? '그래, 나는 은빛연어야.'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남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극복한 은빛연어의 당찬 모습에 박수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고,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오토다케 히로타다. 팔다리가 없는 그에게 언젠가 친구가 '이 팔다리 없는 놈아!'라고 말했을 때, 그는 '뭐야, 이 팔다리 있는 놈아!'하고 되받아치지 않았는가. 이만하면 연상이 될 만도 하지?

어린왕자를 떠올린 곳은, 회의의 세 번째 발언자인 지느러미긴연어의 말을 듣고 은빛연어가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등굽은연어는 비틀어진 등으로 어떻게든 헤엄을 치려고 한다. 그 고통이 왜 아름다운 것인지, 그 상처가 왜 아름다운 것인지 선생님은 모른다.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지느러미긴연어는 어쩌면 이렇게 인간 어른과 닮았을까. 마치 어린왕자가 은빛연어가 되어 지느러미긴연어라는 어른을 보고 생각하는 부분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어째서 지느러미긴연어는 그런 생각을 했을까. 등굽은연어를 보면서, 생각할 것이 정말로 교훈 뿐 이었더란 말인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가슴에 와닿는 말들 중 두가지만 적어보겠다.

'세상에는 언제나 동무들의 숫자보다 적들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말로 세상에는 친구보다도 적이 많다.… 아- 사실 이렇게 쓰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내가 이 글귀를 읽으면서 받은 느낌을 그대로 글로 표현해 내고 싶지만, 잘 되질 않아서 정말 아쉽다. '아, 정말 그래!'라는 탄성과 함께 느껴지는 그 희한한 느낌의 전율이란. 정말 코끝이 찡해지면서, 그 넓은 세상의 심오한 깊이가 책 속에서는 단 한 줄로 표현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존경심마저 들었다.

'땅은 물을 떠받쳐주고, 물은 땅을 적셔주면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은빛연어가 깨달음을 얻으며 좀 더 자란 것이 바로 이 부분이지 싶다. 연어는 땅으로 나가서는 살 수 없지만 땅을 미워해서는 안 되며 물은 땅과 함께 있어야 비로소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그 복잡하게 얽힌 상부상조하는 세상을 본 게 아닌가.

인간은 생각하는 생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연어보다도 못한 것은 아닐까. 물론 나도 책은 현실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연어는 정말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을 낳기 위해, 거친 파도와 무서운 폭포를 거슬러 강으로, 강으로 올라가는 연어. 삶을 살아가는 의미를 확실하게 알고 그 의미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연어들은 아주 훌륭한 삶의 본보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내가 한번이라도 연어보다 나았던 적이 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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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 가발공장에서 하버드까지
서진규 지음 / 북하우스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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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라는 당차면서도 큰 포부의 그녀를 쏙 빼 닮은 제목을 한 책. 그 책은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책이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당당한 여성의 이야기. 언젠가 한번 읽어보겠다고 수첩에 메모를 해 두었는데, 방학을 빌어 읽게 되었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잠재되어 있던 힘이란, 얼마나 크고 강대한 것이었기에 그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그토록 빛날 수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 꿈이, 그리고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부터 그 꿈들에 대해서 조금 적어 보고 싶다.

힘찬 여성 서진규가 자라온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들 이었던 것이다. 엄마며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에서, 혹은 소설책 속에서 만나 온. 냇가에 빨래감을 잔뜩 이고지고 가서 차디찬 냇물로 빠는 이야기, 늘 참는 어머니의 이야기, 고생한 이야기들은 너무 친숙했기 때문에, 작가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는 너무 잘 이해가 되는 바람에 가슴이 미어져서 숨쉬기가 괴로울 정도가 되기도 했다. 힘든 생활을 했지만 그녀에게는 늘 꿈이 있었고, 결국에는 한국을 벗어나 미국으로 당찬 첫발을 내딛었다.

100달러를 달랑 들고 식모살이를 하러 간 미국에서, 그녀는 사랑도 하고, 모험도 하고, 수많은 작고 큰 문제들과 직면하게 된다. 그 이야기들이 어찌나 어렵고, 때로는 서럽게 느껴지던지.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든지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거야 라든지,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나를 대입시켜가며 글을 읽었다. 때때로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여기 큰 감명을 받은 그녀의 말들의 작은 노트가 있다.

'자기가 가진 돈이 아무리 많아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부자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그 돈으로 삶을 즐기지 못한다. 돈에 눈이 먼, 돈의 노예 일 뿐이다.' 이 말은 그녀가 자주 끄집어내는 반쯤 물이 담긴 컵에 대한 이야기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에 따라 변하는 상황에 대한 말 말이다.

'한가지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 그 실패는 더 큰 성공으로 가는 우회 도로일 수도 있다. 높이, 그리고 멀리 보라.' 이 말은 나에게 굉장히 큰 용기와 힘을 주었다.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기말고사의 나쁜 성적에 기운을 잃고 있던 찰나였던 것이다. 희망을 얻었다. '그래, 이건 앞으로의 나를 위한 경험일 뿐이야. 다음번에는 반드시 잘 할수 있어. 이 절망을 다시는 맛보지 않겠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때그때 주어지는 숱한 문제를 풀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이든, 해답은 언제나 하나 이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문제는 무척이나 많다. 그 문제들을 다 나열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어떻게 풀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조금씩 눈이 뜨이는 것 같다. 해답은, 언제나 하나 이상일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이 태교의 마지막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에게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주자.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잖아.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인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 해.'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굉장히 아프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고통을 참은 것이다. 그 아이(성욱)는 분명 인내심이 많은 아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서진규, 책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그녀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바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훌륭한 희망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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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길
이철환 지음 / 삼진기획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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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연탄길이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연탄처럼 시꺼멓지만 따뜻한, 그런 우리네들의 삶을 뜻하는 것일까? 이 제목의 의미를 알면 내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처럼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단 한가지, 이 책에서 그다지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의 마지막에 간간이 등장하는 큰 글자로 쓰인 말들은 구구절절이 늘어놓지 않아도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

하지만, 정작 그 큰 글자의 문구가 더 절실히 느껴지도록 해야할 이야기에서는 별 느낌이 없다. 내가 이런 종류의 책들을 많이 읽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그저 '아, 그렇구나. 참 안됐네.'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감정이 메말랐나 보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별 생각 없이 휙휙 지나갔지만,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이야기들도 몇편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뭐라고 써낼 수 없는 감동을 준 이야기인 나팔꽃에 대해 써보고 싶다.

'나팔꽃'. 이 이야기에서, 영희의 아버지는 아내가 떠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매일을 술로 보내며 알코올 중독자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영희의 운동회 전날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영희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운동회에 가겠노라고. 아버지는 몇 달만에 머리도 깎으셨다. 즐거워서 총총거리며 걸어가는 영희를 보면서, 분명 그는 아내없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으리라. 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노란 장미가 예쁘게 피어있었다. 영희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에게 노란 장미를 주고 싶었나보다.
담을 훌쩍뛰어 올라 노란 장미를 한송이 꺾어 주었다. 장미를 연신 코에 부비며 걷는 영희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자꾸만 땀을 닦아내는 아버지가, 그렇게 길을 걸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한다.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것. 딸에게 주기위해 노란 장미를 꺾으면서, 그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영희는 술만 마시는 아버지가 싫다고 말한다.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얼굴에 하얀 거즈가 붙은 것을 보고 영희는 또 한번 심한 말을 하고 만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두 등장인물의 마음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슬펐다. 아니, 슬펐다기 보다도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의 아픔, 아릿한 느낌이 나를 울게까지 만들었다. 연일 술만 마셔대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영희가 했을 생각들. 아버지가 영희의 운동회 전날 했을 생각과 분명히 보였을 한줄기 희망. 말끔한 모습으로 영희와 학교로 갈 때 느꼈을 기쁨. 장미를 꺾다가 다쳤을 때의 낭패감. 너무나 기대하고 있는 딸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갈등.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감동의 순간들- 도저히 내 감정의 그릇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이 많은 느낌들이 한 구절, 한 구절에서 전해져왔다.

노란 장미, 하얀 거즈, 빨간 피, 형형색색으로 펄럭이고 있을 운동회의 만국기, 그리고 진홍색의 나팔꽃. 이 화려한 색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치는 듯이- 그렇게 느껴졌다. 이것은 감동,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정말로 나는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느끼지 못한 느낌을, '나팔꽃'에서 느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연탄길에서 읽은 최고의 이야기이다.

연탄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힘겹게 한발 한발을 옮기며 타들어가는 연탄들이 있다. 붉은 눈물을 흩날리며 검은 몸을 태우는 연탄들이 있다. 겉으로만 보면,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연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몸을 녹여줄 수 있는지. 나팔꽃을 읽으며,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느꼈던 여러 생각들. 나는 연탄이 되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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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여행 1
우리누리 / 대교출판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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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있으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빛깔 무지개의 색을 가지고 그 색의 고유한 특성이나 그 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어울리는 직업을 소개해주고, 각각의 색깔의 특성을 가진 동·식물, 별자리, 명화, 보석과 같은 것들을 너무도 세련되게 배치해서 알려준다.

나는 어릴때부터 이 책을 무척 사랑해 왔다. 한 번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느낌과, 오묘한 색의 조화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각각의 색깔마다 마련된 코너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어에서 색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보석에 관련된 내용, 그리고 명화이다. 어찌나 머릿속에 잘 들어오고, 아름답게 인식되는지……. 이 책이 없었더라면 나는 일찍이 그림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아이였을 것이다. 색깔별로 소개된 명화가 나를 잡아끌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명화 코너에서는 빨간색은 앙리 마티스의 '붉은 방'을, 주황색은 폴 고갱의 '언제 결혼하니?', 노란색은 빈센트 반 고호의 '누런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초록색은 마르크 샤갈의 '곡예사'를, 마지막 파란색은 P. A. 르느와르의 '우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림만 봤지, 내용은 잘 안봤던 것 같다. 만약에 내용을 잘 봤더라면 나는 미술 시험을 더 잘 칠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고? 내가 인상파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했던 르느와르와 고호, 샤갈의 작품소개와 함께 그들의 화파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험을 치기전에 교과서를 들여보는 것 대신 이 책을 한번 더 들여다 봤더라면 행복한 얼굴로 맞출 수 있었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워진다.

색의 이미지 떠올리기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적절한 단어들로 색을 표현하는지, 감격스러울 정도이다. 책을 보면, 빨강은 '열렬한 사랑, 더위, 창조, 생명, 태양과 불, 일출과 저녁 노을, 크리스마스, 혁명, 분노, 적극적인 행동'등과 함께 떠올릴 수 있다고 되어있고, 주황은 '기쁨, 힘, 만족, 풍부함, 유쾌함, 앙증맞음, 아기의 하품, 초조함', 노랑은 '명랑한 기분, 귀여움, 깜찍함, 발랄함, 대담한 마음, 희망, 병아리', 초록은 '위로, 젊음, 희망, 초여름, 자연, 어린이, 새싹, 서늘함, 습기, 깨끗함, 숲'등과 떠올릴 수 있으며, 파랑은 '차가움, 깊은 물 속, 바다, 영원, 성실, 호수, 푸른 눈, 푸른 새, 천사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색이라고 한다.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강렬하게 와닿는 단어들 속의 색깔에서, 제시된 색깔을 찾을 수 있는게 너무 신기하다.

마지막으로 보석.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들과 색들의 맛깔스러운 조화가 어떻게 여자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석 사진이 자연스레 진열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면서, 얼마나 행복함을 느끼는지 모른다. 빠알간 빛을 내는 루비와, 주홍빛의 호박, 찬란한 노란빛을 띄는 토파즈, 부드러운 초록색 빛을 가진 에메랄드, 침착한 분위기를 풍기는 파란빛의 사파이어……. 잘 세공된 금, 은과 함께 왕관에나 박아넣어야 할 것 같은 당당한 풍채를 가진 보석들의 향연이란.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마치 내가 보석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이상하게도 즐거워지는 곳. 그곳이 바로 보석 코너이다.

이 책을 읽으면, 괜시리 색들의 화려함에 휘말려 감성적이 되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한다. 얼찌나 명확한 '진짜'색들을 페이지 옆이며 이야기속에 장식을 해대는지, 화려함에서 활력을 얻고 만다. 소설과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빛깔을 뽐내며 책속에 묻어있는 아름다운 색들은,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가지고 가 버린 주범이랄까.

나는 주황색을 좋아한다. 때로는 노란색도 좋아하고, 하얀색을 좋아했을 때도 있고, 보라색과 노란색의 오묘한 조화를 좋아하기도 했다. 파란색의 차분함도, 초록색의 건강함도 좋아한다. 터져나오는 색깔들의 생각이, 지금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색깔여행이라. 한번쯤 그런 여행을 해 보는 것도 좋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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