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박현정'이라고 쓰고보니 참 쑥쓰럽다.(왜 내가 쑥쓰럽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엄마 아빠 동기 중 한명이라든가 하겠지, 아무튼 나는 오늘 독창회의 주인공이었던 소프라노 박현정을 현정이 이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고 있다. 이번이 부산에서 두번째로 가지는 현정이모의 독창회는데, 그에 대해 간단하게 쓰려고 한다.
가장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베 마리아Ave Maria>였다. 예쁜 툴립같은 드레스를 입은 현정이모가 흐르듯 걸어나와 피아노 반주자에게 사인을 보내고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반주가 시작되고 무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깨달았다. 잠시 솜사탕처럼 부푼 기대를 조금 떼어내야겠다는 것. 첫 곡이라 그런지 아직, 아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황당한 피아노 반주자가 갑자기 손가락에 쥐라도 낫나, 음을 미묘하게 잘못 짚는 거다. 앞에 서서 노래하는 이모보다 뒤에 앉아 피아노 치는 그가 더 긴장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뒤에도 그의 만행은 줄줄이 이어진다. 반주음 뭉개기, 박자 틀리기, 목소리를 묻을 만큼 자기 연주에 심취하기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 다음, <갠지즈 강에 해는 뜨고Gia il Sole dal Gange>와 <그대 나의 죽음에Se tu della mia morte>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대로 간다면 독창회를 연 이유가 없을 터. 네번째 <제비꽃Le Violette>에서부터 상태는 호전되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매력적인 노래였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이제야 깨어난 듯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며, 표정 연기도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세상에... 기대의 솜사탕을 야금야금 뜯어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나는 얼른 동작을 멈추고 두 귀와 눈을 활짝 열어제꼈다. 아, 아름다워. 인간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이 곡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찾는 것들마다 이모의 스타일과 달랐다. 아무리 비슷할지라도 각각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갖는 다는 것이 인간의 목소리가 보이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후의 곡들은 가슴 속에 흩어진 솜사탕 조각들을 원래 자리에 붙이는 작업을 하면서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찾아온 인터미션. 귓가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사라지자 곧, 아주 당연한 듯 제비꽃이 나에게 다가왔다. 흠흠흠... 엄마, 경연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제비꽃은 나를 떠나지 않고 윙윙 맴돌았다. 경연이와 쿵짝이 맞아 반주자를 무섭게 씹으면서 짧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종소리가 울릴 때 간신히 제비꽃을 떨쳐냈다. 이모는 아까까지 보던 튤립같은 드레스가 아닌 하늘하늘한 구름같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아, 또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기분이 좋아서 의자에 폭 몸을 묻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까까지 씹던 위대한 반주자와 이모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꽃구름 속에>를 슬프게 만들었다. 어느 쪽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그게 문제 없는 거였는지, 나는 속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만 내 귀가 듣기에 반주가 너무 빨랐다. 목소리도 살짝 잠긴 것이 6학년 때 CBS주최 아카데미 윈드 오케스트라 초청 음악회에서 (왜 이리 길까나;;) 들었던 꽃구름 속에의 반도 미치지 못했다. 내가 가장 기대한 꽃구름 속에는 그렇게 해서 망쳐졌다. 잠시 그 음악회 때의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맑고 고운, 청아한 목소리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화아한 분위기를 냈었는데. 오늘 그만한,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듣지 못한 게 아쉽다. 충격에 휩싸여 있는 동안 <동심초>가 지나가고 어느새 <Vocalise>. 여기에서 다행스럽게도 나의 울적함은 완전히 회복되다 못해 다시 기대로 뛰었다. 흐으으으음- 계속 이렇게 반복할 뿐이었지만 목소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하나의 전달매체가 되어 강당을 울렸다. 으으, 감동.
곡이 끝나고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간 이모는, 이번에는 테너 한 사람과 함께 나왔다. 그는 이칠성이었다. 내가 아카데미 윈드 오케스트라 초청 음악회에서의 소프라노 김유섬과의 <축배의 노래>를 듣고 반했던 사람. 일기장을 살펴보면, 소프라노는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지만 테너 파트가 정말로 좋았고, 웅장하고 커다란 느낌이 기억에 남았다고 적혀있다. 현정이모와의 이중창에서도 그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초반부에 가끔 둔탁한 소리도 들렸지만 역시 시간을 약으로 해서 달라졌으며, 6학년 때 들은 소프라노 김유섬(내가 이 사람에게 감정있는 건 전혀 아니다. 사실 노랫소리도 기억이 안 나는 걸. 다만 일기장이 그렇게 말한다.)과의 이중창과 달리 이번에는 소프라노도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아, 곡은 라미꼬 프리츠 중 <버찌의 2중창 새빨갛게 익어>라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다정한 모습으로(이 모습에 희윤이가 "저 사람 옛날 애인이야?"라고 물을 정도로) 끝을 맺고, 테너 이칠성의 독창이 이어졌다. 오페라 아프리카의 여인 중 <오 낙원이여Oh Paradiso>였는데, 상당한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소프라노 박현정의 무대가 이어졌다. 마치 이제야 시작이지!라고 외치는 듯한 오페라 루이즈 중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그날부터Depuis le jour>을 지나 마지막 곡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중 <아! 나는 꿈속에 살고 싶어요Ah! Je veux vivre>의 가락이 울렸다. 꿈속에서 살고싶다는 제목처럼(나는 가사를 알아듣는 재주가 없으므로 그저 제목과 분위기에 의존해 대충 곡을 느낀다) 방방뜨는 느낌의 줄리엣(이라고 생각한다)이 그려지면서 입이 귀에 걸렸다. 곡이 끝나고 울컥하는 감동으로 가득차서 박수를 치고 있는 나를 보았다.
프로그램에 있는 곡이 끝났다고 음악회가 진정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앵콜이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꿈속에 살고 싶다는 노래를 다 듣고난 후에도 세번이나 더 무대에 서는 현정이모를 볼 수 있었다. 무슨 무슨 노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원래의 무대에서보다도 한층 물이 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테너 이칠성과 함께 나온 무대는 따뜻한 기운을 발해서 강당 안을 추운 바깥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로 만들어주었다.
오늘의 독창회에서 느낀 것은, 현정이모는, 말하자면 슬로 스타터구나 하는 것. <제비꽃>에서부터 분위기는 살아났지만 진정으로 강렬한 자신의 이미지를 내뿜은 것은 <Vocalise>부터였다. 또, 현정이모가 아닌 다른 음악가의 독창회 혹은 독주회에 가 보고 싶다는 것. 내 기억에 의하면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있더라도 기억이 안 나니 무효지! 아무튼 오늘은 반루라고 하기에 너무 멋졌기 때문에 하루로 칭하기로 한다. 우하하. 기분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