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나무 잎사귀도 붉은 기를 머금은 오늘, 오늘은 10월이다. 10월이라면 그저 가을, 그리고 거기에서 뻗어져 나오는 단어들─천고마비라든지, 독서라든지 하는─과 영화 <시월애>밖에 안 떠오르던 작년의 10월을 넘어, 나는 지금 이 10월에 고등학교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세월 참 빠르다던 할머니의 습관적인 말이 귓가에 맴돈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리려는 것일까, 그런 것일까. 나는 최근, CD를 자주 꺼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 곡, 영국 가수 엘튼 존의 Goodbye Yellow Brick Road. "Goodbye", 작별을 뜻하는 이 말이 가슴을 때린다. 잘 가요, 잘 있어요, 이제는 안녕, 이라고.
나의 마음속에서, 내 길들은 참 많이도 바뀌어왔다. 그 어린 날 만화가의 굼이며, 의사, 변호사, 번역가까지 속으로 얼마나 길을 휙휙 바꿔댔는지 모른다. 그 때는 그 길이 너무 멀고, 또 눈에 보이지 않아, 모두 다 '꿈'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꿨다가 낮 동안 잊고마는 꿈. 하지만 점점, 마치 같은 꿈을 여러 번 꾸면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처럼, 그 길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리로 가렴, 저리로 가렴, 가볍게 등을 밀어주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내 앞에 갈래길이 보였다. "어디로 갈 거니?" 이제는 귀를 기울여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데, 나의 입은 굳게 닫혀 있고 머리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런 나의 사정에도 아랑곳없이 내 발은 시간을 타고 흘러, 갈라진 길의 끝자락으로, 끝자락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다.
두렵다. 이왕이면 비행기를 타러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느 길을 선택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지독히 두렵다. 긴, 긴 길을 거북이 등을 타고 지나며 저편, 다른 길에서 날아오르는 비행기며 우주선을 보고 있어야 한다면 어쩌지. 그런 느릿한 길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내 자신이 두렵다. 그런 두려움들이 모여서 나도 모르게 눈물로 떨어질 때면, 나는 뒤를 돌아본다. 내가 지나온 길, 그 밝은 노란색 길을.
눈이 돌아갈 것 같은 혼란 속에서 뒤를 보면, 여러가지 감정들이 솟구친다. 그 감정을 어찌 어찌 다잡고 다시 앞을 보면, 또 다시 두려움. 그러면 또 뒤를 돌아보고. 이런 일들을 반복하다가, 이제는 앞만 보고, 울면서라도, 떨면서라도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월에, 닿을 듯 말 듯 나를 초조하게 만들던 갈래길의 선택이 마침내 피부에까지 느껴지도록 가까워졌다. 앞에만 눈을 고정하고, 앞으로, 앞으로 가던 짧은 시간이 결국은 나를 이만큼 밀었다. 선택의 시간, 길을 선택하기에 앞서 나의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비행기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자전거라도 있기를 바라며, 나는 마음을 거의 굳혔다.
아예 다른 길로 접어들어서, 이제는 뒤를 돌아봐도 상황에 달라지지 않을 때, 나는 그 때가 유록색 이파리가 돋아날 때쯤이라는 걸 안다. 봄에 피는 개나리의, 생명의 빛깔이자, 어린 순수함을 상징하는 노란 길. 나의 노란 벽돌 길을 그 때쯤이면 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말하리라.
"안녕, 나의 길! 그리고 그 곳을 지나온 나의 모습들!"
Goodbye yellow brick road, 하고, 엘튼 존의 목소리가 들린다.
올해 교내 백일장 제재 중에 '길'이 있길래 주저없이 선택했다. 내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게 아니던가.
이 글을 읽은 엄마의 처음 평가는 이랬다. "뭐랄까... 앞부분은 좋았는데, 뒷부분은 끝을 위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그리고 좀 식상하기도 해. 뭐라고 해야되지, 이런 걸..." 답은 작위적, 전형적이 아닐까요, 엄마? 뜨끔했다. '끝을 만들기 위해' 쓴 게 맞기 때문이다. 아니, 약간 다르긴 한데, 일단 시간에 맞춰서 써야 하기 때문에 대충 마무리를 지은 거였다. 더 생각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워드에 익숙해져있는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시화 작업을 한다고 글을 들고 간 다음에는 말이 이렇게 바뀌었다. "근데 란아,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좋구나. 있지,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마워요, 엄마. 엄마는 항상 내 편이지.
이 글을 쓰는 건 즐거웠다.(시간은 촉박했지만, 어차피 그건 매년 겪는다.) 1학년, 2학년 때는 어떻게 이 글을 끝맺나, 하고 머리를 싸매야 했지만 '나의 길'에 대한 것은 너무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금방 결론이 나온 것이다. 게다가 덤으로, 이건 백일장이 아냐, 서재에 내 생각을 적는 거야, 라는 생각도 나를 도와줬다^^ (알라딘 서재와 나는 이렇듯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이 장원을 받은 건 좀 놀랍다. 다들 딴짓하려고 글쓰는 시간에 놀았나;;
그런데 나는 발칙스러운 실수를 크게 두가지 했다.
1. Goodbye Yellow Brick Road의 가사와 글 내용이 안 맞는다.
2. 시월애는 10월과는 관계가 없다.
둘 다 몰라서였다!
1번, 노래가사는 생각이 안 났다. 쓰면서도 '이런 내용은 아닌데...'싶었지만 확인할 방법도 없을 뿐더러 내가 원한 것은 노란 벽돌 길이라는 소재뿐이었기에 그냥 써버렸다. 크게 가사를 들먹인 것도 아니고 그냥 들었다고 한 건데 뭐, 하면서. (요즘 듣는 건 사실이다.) 그럴듯한 대목도 있다. Oh I've finally decided my future lies beyond the yellow brick road~
2번, 시월애는 전혀 몰랐다. 쓰면서도 의아했다. 영화속에 시월(十月)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데 왜 시월애지? 그러나 분위기를 위해 과감히 넣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한자로 時越愛였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 으하하... 왜 영어제목을 엄하게 Il Mare라고 붙인 거냐, 時越愛의 의미를 담고 있었으면 알았을텐데^^;
지금 이렇게 옮겨적다보니 드는 생각.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비행기에서는 기내식도 주고, 영화도 볼 수 있고, 게임도 할 수 있지만 단풍이나 꽃같은, 그런 아름다운 풍경은 볼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