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와 축제로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쉽게 읽히는 얇은 책을 잡은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다. 내용은 그다지 '마음을 달랠'만한 요소가 없는 듯하지만, 빨리는 읽혔으니 반은 성공인 셈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오니 내가 요즘 얼마나 책을 안 읽고 있는지, 그보다도 얼마나 글을 안 쓰고 있는지가 통절하게 느껴진다. 반성, 또 반성.

  대체 돈을 내고 기린이나 사자를 보는 게 어디가 재미있는 걸까? 동물원은 냄새만 고약할 뿐이다. 나는 자연 보호나 지구의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주의자나 환경 운동가는 아니다. 아키와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숲도 오존층도 온전하게 남아 있어 주길 바라는, 단지 그것뿐인 것이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대체로 찬성이지만 그건 동물들이 불쌍해서라기보다 그들을 죽이거나 학대하는 인간의 난폭함과 거만함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아키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오해하고, 내가 동물을 좋아하는 상냥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84쪽)
  사실 그렇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안녕이다.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 아닌가, 음.

  “하지만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나쁜 점도 눈에 보이잖아. 하찮은 일로 싸우기도 하고. 그런 일이 매일 쌓이다 보면 처음엔 아무리 그 사람이 좋았더라도 몇 십 년 후에는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게 돼 버리지 않을까?”
  확신에 찬 듯한 말투였다.
  “꽤나 비관적이네.”
  “사쿠짱은 그런 생각 안 해봤어?”
  “나라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해. 지금 누군가를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십 년 후에는 좀 더 좋아하고 있어. 마지막에는 싫었던 점까지 좋아하게 돼. 그리고 백 년 후에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좋아하게 될 거라구.” (86쪽)

  “죽어 버리면 모든 게 끝이잖아. 그 다음이 없으면 죽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없어.” (145쪽)

  “아키의 생일은 12월 17일이잖아.”
  “사쿠짱 생일은 12월 24일이고.”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키가 없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일 초도 없었어.” (173쪽)

  “하늘을 논하지 않던 공자가 제자의 죽음을 접하고는 하늘이 나를 멸망시켰구나, 하고 통곡했다고 전해지고 있지. 불생불멸을 설도하던 홍법대사 쿠카이도 제자의 죽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해.” (19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와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사라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대부분 벽면을 만져보고 두드려보느라 걷는 속도를 줄이셨을 때이다. 시트지를 만드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벽도, 아버지께는 많은 의미가 있다. 단순히 플라스틱이겠거니 생각한 스펀지의 엘리베이터 문, 그냥 벽이겠거니 했던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내부의 나무 무늬는 아버지가 타셨을 때 말고는 누구에게 그런 관심을 받아보았을까? 아버지가 벽을 만지고 계실 때마다 느낀 그런 ‘독특함’(혹은 직업병)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껴졌다. 글쓴이와 나는 같은 거리를 걷더라도 분명 다른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지나쳐 가는 풍경이거나, 답답한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많은 건물들에 ‘의미’가 있고, ‘건축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글쓴이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아빤 맨날 건물만 봐!”

  '건축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부분에서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늘 전통적인 건물들이 잊혀져가고, 우리의 도시가 고층 건물들로 메워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 건물들 속에서 한국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나는 입만 살았지, 진심으로 한국의 건물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긴 어떤 건물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한국의 건축물이라고 제대로 보았겠는가. 나는 속 빈 애국자였다. 전통적인 한국의 거리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은 아쉽지만, 이미 시대는 변해버렸는데 애초에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고, 좋든 나쁘든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신념이 아니었던가. 필요한 것은 새로 지어올리는 건축물에 '한국'을 불어넣는 것이지, '조선'이나 '신라'를 불어넣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대단한 발상의 전환을 경헙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즐거움을 줄 수도 있고, 지식을 전달할 수도 있다. 책을  읽다보면, 책에서 눈을 떼고 세상을 보았을 때 전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많다. 그 책이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든, 이 책처럼 미지의 분야를 다룬 책이든,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마찬가지다. 책의 힘을 느끼며, 나를 둘러싼 건축물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내일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돌’의 사용에 관해.
  요즘은 돌을 쌓는 게 아니라 붙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태권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체육관 벽을 쳤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났다. 돌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공’하고 속 빈 울림이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읽다보니, TV에서 본 '돌 쌓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매일같이 돌을 져나르고 쌓으면서 돌 정원을 만들어놓고 살고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5-11-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란님 덕분에 좋은 책 한 권 만납니다. 덕분에 보관함에 넣어요.
근데 요거 리뷰로 올려도 될 것을 말입니다.

明卵 2005-11-2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감사합니다^^~ 서재 참 오랜만이어요.
에.. 리뷰는 안 써요. 어쩐지 무서워서..^^ 얼마전에 실수로 올렸는데 코멘트만 없으면 페이퍼로 옮겼을 거여요.
 

  나는 밖에 나가는 걸(특히 문화유산 답사 같은 거.) 정말 싫어하지만... 답사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건 좋아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왕 독살사건 : 이 세 권 중 제일 재밌게, 열심히 읽었다. 국사가 좋아지다니, 이건 내 일생에 없던 일이다. 독살되었다는 것 보다는 독살의 배경이 더 흥미진진.

문화산업의 이해 :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정신을 멀리 떠나보내고 읽은 듯한 느낌)

사랑 사랑 내 사랑아 : 읽었던 책인데 과제도서로 나와서 한 번 더 읽었다. 이번에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봤다. 그나저나 사랑이란 게 대체 뭐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이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까지, 박지원에 관련된 책을 두 권 읽었더니 수업시간에 박지원 얘기만 나올라치면 얼마나 반가운지. 고전시간에 ‘예덕 선생전’이 지문으로 나오니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 어떤 질문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더라.)

  별 일도 아닌데 따옴표로 강조하고, 느낌표를 남발하는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아무래도 나와 안 맞았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런 것은 연암을 향한 깊은 사랑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소녀처럼, 그녀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 저자의 글을 통해 만난 연암은, 아들의 입을 통해 만난 연암과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었다니!

  연암의 재발견과 저자의 문체 이야기 말고는 그다지 쓸 말이 없으니 책 속으로 들어가 봤으면 한다.
◎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이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위, 이른바 ‘클리나멘’이 그것인 셈.(20쪽)

◎ 배후 조종자답게 연암은 도도한 어조로 당시의 배치를 이렇게 묘파한다. “비슷하다 함은 이미 참이 아닌데” “눈 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 / 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어설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지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그저 베끼기에만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 천근타 말하지 말라 / 천 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증좌소산인」)(131쪽)
-정조의 문체반정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역사의 일부였는데, 박지원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친근한 사건이 되었다.

◎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할 글자가 없는 것이다.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137쪽)

◎ 연암은 문득 말 위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도 생이별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그거야 사람마다 겪는 것이고, 천하의 순리가 아닌가. 또 죽은 이에겐 괴로움이 없을 터. 그러나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 그것도 흘러가는 물을 사이에 두고 헤어질 때의 그 애달픔을 무엇에 비할 것인가.
장복과 창대의 이별

◎ 이렇듯 열하는 ‘천신만고’를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온갖 퍼레이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연암은 이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사람이 다만 칠정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다. 지정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진대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요.(「도강록」) (286쪽)

◎ “저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근거는? 소경은 눈에 끄달려 시기하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래의 눈이 천지만물을 두루 비출 수 dLT는 것이라면, 소경의 눈은 빛이 완전 차단된 암흑이다. 하지만 둘은 모두 편협한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래의 평등안‘과 ’소경의 눈‘이 곧바로 연결되는 이 돌연한 비약. 연암 특유의 역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2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