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이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까지, 박지원에 관련된 책을 두 권 읽었더니 수업시간에 박지원 얘기만 나올라치면 얼마나 반가운지. 고전시간에 ‘예덕 선생전’이 지문으로 나오니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 어떤 질문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더라.)
별 일도 아닌데 따옴표로 강조하고, 느낌표를 남발하는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아무래도 나와 안 맞았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런 것은 연암을 향한 깊은 사랑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소녀처럼, 그녀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 저자의 글을 통해 만난 연암은, 아들의 입을 통해 만난 연암과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었다니!
연암의 재발견과 저자의 문체 이야기 말고는 그다지 쓸 말이 없으니 책 속으로 들어가 봤으면 한다.
◎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이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위, 이른바 ‘클리나멘’이 그것인 셈.(20쪽)
◎ 배후 조종자답게 연암은 도도한 어조로 당시의 배치를 이렇게 묘파한다. “비슷하다 함은 이미 참이 아닌데” “눈 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 / 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어설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지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그저 베끼기에만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 천근타 말하지 말라 / 천 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증좌소산인」)(131쪽)
-정조의 문체반정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역사의 일부였는데, 박지원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친근한 사건이 되었다.
◎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할 글자가 없는 것이다.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137쪽)
◎ 연암은 문득 말 위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도 생이별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그거야 사람마다 겪는 것이고, 천하의 순리가 아닌가. 또 죽은 이에겐 괴로움이 없을 터. 그러나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 그것도 흘러가는 물을 사이에 두고 헤어질 때의 그 애달픔을 무엇에 비할 것인가.
장복과 창대의 이별
◎ 이렇듯 열하는 ‘천신만고’를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온갖 퍼레이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연암은 이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사람이 다만 칠정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다. 지정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진대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요.(「도강록」) (286쪽)
◎ “저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근거는? 소경은 눈에 끄달려 시기하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래의 눈이 천지만물을 두루 비출 수 dLT는 것이라면, 소경의 눈은 빛이 완전 차단된 암흑이다. 하지만 둘은 모두 편협한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래의 평등안‘과 ’소경의 눈‘이 곧바로 연결되는 이 돌연한 비약. 연암 특유의 역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