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사라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대부분 벽면을 만져보고 두드려보느라 걷는 속도를 줄이셨을 때이다. 시트지를 만드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벽도, 아버지께는 많은 의미가 있다. 단순히 플라스틱이겠거니 생각한 스펀지의 엘리베이터 문, 그냥 벽이겠거니 했던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내부의 나무 무늬는 아버지가 타셨을 때 말고는 누구에게 그런 관심을 받아보았을까? 아버지가 벽을 만지고 계실 때마다 느낀 그런 ‘독특함’(혹은 직업병)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껴졌다. 글쓴이와 나는 같은 거리를 걷더라도 분명 다른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지나쳐 가는 풍경이거나, 답답한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많은 건물들에 ‘의미’가 있고, ‘건축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글쓴이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아빤 맨날 건물만 봐!”
'건축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부분에서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늘 전통적인 건물들이 잊혀져가고, 우리의 도시가 고층 건물들로 메워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 건물들 속에서 한국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나는 입만 살았지, 진심으로 한국의 건물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긴 어떤 건물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한국의 건축물이라고 제대로 보았겠는가. 나는 속 빈 애국자였다. 전통적인 한국의 거리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은 아쉽지만, 이미 시대는 변해버렸는데 애초에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고, 좋든 나쁘든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신념이 아니었던가. 필요한 것은 새로 지어올리는 건축물에 '한국'을 불어넣는 것이지, '조선'이나 '신라'를 불어넣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대단한 발상의 전환을 경헙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즐거움을 줄 수도 있고, 지식을 전달할 수도 있다. 책을 읽다보면, 책에서 눈을 떼고 세상을 보았을 때 전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많다. 그 책이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든, 이 책처럼 미지의 분야를 다룬 책이든,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마찬가지다. 책의 힘을 느끼며, 나를 둘러싼 건축물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내일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돌’의 사용에 관해.
요즘은 돌을 쌓는 게 아니라 붙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태권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체육관 벽을 쳤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났다. 돌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공’하고 속 빈 울림이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읽다보니, TV에서 본 '돌 쌓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매일같이 돌을 져나르고 쌓으면서 돌 정원을 만들어놓고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