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겐 1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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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과연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는 별개로, 한 철학자의 "앞으로 300년은 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망할 게 무어란 말인가?"라는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주어진 상황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의 경우,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라서 - 그래서 피곤한 편이라서 - 더욱 그러하다. 짐멜의 말처럼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주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면서 이른바 자신의 밑천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때로는 사태를 넓고 느긋하게 파악하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현실에는 래디컬하게, 성과에는 느긋하게, 이런 얘기다. 관념적이지 않기 위해, 그래도 언젠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고대가 그러했고, 중세가 그러했듯, 무너지고(변화되고) 말 것이라고 느긋하게, 관념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느긋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서는 결코 창조되지 못했던 무기, 핵무기다. 고대의 어떤 전쟁도, 중세의 어떤 역병도, 인류 문명을 단번에 멸절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핵무기는 다르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무기로 내 영혼은 수 십 번 죽고도 몇 번 더 죽을 수 있다. 우주에 지구와 같이 지성을 갖춘 생명체가 문화를 영위하는 행성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개수가 수백을 넘지 않는다면, 인류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크리스 하먼의 말처럼 권한을 소유한 누군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조직화 된 인간 생활의 종말을 초래‘하는 일이 생길까봐 말이다. 영화나 만화를 보면, '버려진 자들의 반항'과 함께 세상이 바뀌는 데는 몇 개의 탑과 빌딩이 무너지는 데서 발생하는 굉음과 분진만이 필요할 뿐이지만, 아마도 자본주의가 끝날 때에는 그렇게 쉽사리 일이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실재는, 스탠리 큐브릭의 풍자처럼 ’어느 쪽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가치가 실현되는, 그 무시무시하게 쌓여있는 폭탄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다른 극단의 세계의 끝자락에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빼앗으려하는 노동자들을 과연 인간이라 생각할까?(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뭐.......)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은, 그러한 핵무기가 현 인류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사용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의 일본사회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히로시마에서의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직접 원폭을 경험한 작가는(그래서 현재 작가도 병마와 싸우고 있다), 원폭투하 4개월 전인 1945년 4월에서부터 1952년의 한국전쟁 종전 직후까지의 이야기를 마치 자서전을 쓰듯 풀어낸다. 무식했던 나는 맨발의 겐을 [닥터 노구치]나 [캔디캔디] 류의 단순한 인간승리 드라마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읽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투박한 그림체는 놀랍도록 잔혹한 현실을 묘사하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 한 시대의 정신을 증언한다. 정치와 구조가 제거되고 감정과 드라마만 부각되는 여느 전쟁을 다룬 작품들과 달리 [맨발의 겐]에는 개인과 개인간의, 그리고 개인과 사회 간의 권력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에서 겐과 그의 ‘어린’(피를 밥 먹듯이 보는 ‘어린’이들) 친구들은 특별히 공부를 한 것이 아님에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민중-권력자-천황을 통틀어 전쟁에 책임이 있는 총체적 존재로서의)과, 종전을 명목으로 무책임한 살상을 저지른 미국(등의 강대국들)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이해하고 비판하고 싸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실’은 관념적인 이론이나 미사여구로 치장된 형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처절하게 진솔한 형태로 전해지기에 가슴에 더욱 커다란 울림을 남긴다. 


한발자국 물러나 바라보면, [맨발의 겐]은 과도하게 소유함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국을 지배하고, 만주까지 점령했던,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 동-남아시아의 상당부분을 착취했던, 자신들만을 위한 대동아공영권을 꿈꿨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우리는 [맨발의 겐] 1권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부의 언론 조작, 비국민에 대한 차별을 통한 집단주의의 강화, 천황의 신격화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입, 그리고 이어지는 잔악한 범죄들. 우리는 난징대학살과 관동대학살을 비롯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일본의 그러한 ‘욕망’은 또 다른 지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해 ‘파괴’되어서만 멈추어 질 수 있었다. 제국을 꿈꿨던 일본은, 자신들의 욕망에 취해 가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 발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을 보며 한때의 피지배국이었던 한국의 구성원인 우리는, 직접적인 피해자들을 위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배상금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에게 면죄부를 줄 필요도 없고, 고소해 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혹자는 이 책도 ‘반딧불의 묘’의 우를 범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시선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본이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집단 안의 ‘또 다른 목소리’(겐의 아버지처럼)를 외면했듯,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 안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사회의 건강성을 잃게 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에게 남겨질 것은 피폐함과 황폐함 뿐이기 때문이다.(나는, 얼마 전 잡지에서 본, 거짓에 절망하고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 한겨레21 제591호 <‘성스러운 여인’이 신음한다.>) 같은 의미로, 우리는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가해진 범죄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의 ‘비국민’들에게 가하고 있는 범죄에 대해 과연 얼마나 반성을 하고 있는가. 황우석 쇼크를 거치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의 치부를 목도하며,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었던가? 여전히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또 다시 월드컵이라는 소용돌이에 몸을 던질 채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반성하는 만큼 일본에도 그것을 요구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당연한 것이지만, 이 얘기는 현재 한국 사회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던/하는 정부를 향해 하는 이야기이지, 수요일마다 찬바람을 맞으며 수 십 년 째 시위를 해 오고 계시는 할머니들이나, 베트남 전에서의 고엽제 피해로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을 ‘향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책을 잃으며, 솔직히 말해 꺼이꺼이 울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담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머리를 맞추면 한번에 죽일 수 있어'따위의 대사가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튀어나와 0.1초면 접속이 가능한 링크를 타고 온갖 잔인한 이미지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휘젓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온갖 가상과 실재와 실재 같은 가상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너무나도 쉽게 몸이 부스러져 죽어가고 있는 세상이지만, 조금만 반성적 사유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것 자체는 물론, 그것에 익숙해 져 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알 수 있다. 저항할 줄 모르는 우리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저항하지 않는/못하는 무관심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ps. 가능하면 목돈을 마련해서 세트로 구입하시기를 권한다. 낱권으로 구입하게 되면, 2권  이후는 읽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너무나도 비참한 만화 속의 현실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해, 읽는 도중에 몇 번이나 페이지를 그냥 덮으려 했다. 힘겹게 다 읽다 보니, 리뷰도 격해져서, 마음만 더 불편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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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2-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들은 잘 읽지 못하는데, 음, 기억해두겠습니다.

happyant 2006-02-2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여러모로 매우 불편해지는 책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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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세계명작'을 즐겨 읽지 않게 되었다. 잘된 번역과 못된 번역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에 구입했던, 깨알만한 글씨가 압박이었던 소담출판사의 책들은 어느 샌가 책꽂이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민음사나 범우사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 단테를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여전하지만, 예전처럼 더 이상 다급하지는 않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고뇌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눈길이 더 많이 가게 되는 내 취향과 관심사의 문제이자, 근래 갖게 된 문학작품의 번역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인 의심 때문인데, 이것은 더듬더듬 원서를 읽는 정도의 영어실력으로 지나친 의역이나 오역의 문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언어를 바탕으로 작가와 얼마간의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고서 과연 문학작품의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몇 년 유학한 미국인 한국어학자가 번역한 박민규의 단편을 읽은 미국인들이, 박민규와 같은(혹은 유사한) 시대를 보낸 한국의 2,30대들과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마찬가지로, '토니오 크뢰거'가 다른 독일어 이름보다 '어색하게' 들리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독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넘는 이 단편집을 손에 쥐고 하루에 한두 편씩 읽기 시작한 것은, 내 무의식에 남아있는 몇몇 그의 작품의 제목들에 대한(예컨대, [토니오 크뢰거]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처럼) 알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며, 또한 예술가적인 기질과 시민적인 기질 간의 분열이 인생의 주제였던 그가, 파시즘을 거치며 정치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언제나)흥미로운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고, 좀 더 직접적으로는 근래 두 달째 읽고 있는 [사로잡힌 영혼]에서 라니츠키가 그를 독일을 대표하는 두 이름 중의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나머지 한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한 문화의 절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꽤나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보통 그러하듯, 결코 쉽거나 즐겁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분열과 그것을 다루는 그의 지성을 읽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분열은 대체로 자서전으로 보이는 [토니오 크뢰거]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잘 드러나 있는데,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106p)와 같은 진지한 문장도 있지만, 한편에는 "나는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가끔 죽도록 피곤하단 말입니다."(46p)와 같이 재밌는, 혹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이랍니다."(108p)와 같은 순수한(!) 문장도 있다. 또한 "소박한 결혼반지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그녀의 아름답고 창백한 손은 직물로 짜서 무거워 보이는 어두운 색 치마의 무릎 주름 속에 편안히 놓여 있었다."(353p)로 시작해 한 페이지 넘게 이어지는 [트리스탄]의 묘사처럼 대체로 그의 문장은 발자크의 작품들만큼이나 화려했지만, 결코 어지럽지는 않았다.(역시!) 덧붙여 큰 감동은 없었지만, 1930년에 발표된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다룬 [마리오와 마술사]도 현실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마술적인 느낌의 문학으로서, 비교적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서, ‘따스하지만 엄격한 화려함’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격조 높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만의 정신과 마주하는 동안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토니오 크뢰거]부터 시작하여,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어릿광대]에서 선명해지는 그가 가진 어떠한 패배감(혹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컨대, 고귀한 지성이 때때로 세속적 아름다움의 앞에서 순식간에 그 빛을 잃고 마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인데, 과거 끊임없이 감탄하며 읽은 어떤 혁명가의 치열한 이론보다, 몸이 기억하는 듯한 오래 전 이성과의 짧은 육체적 접촉의 추억이 더욱 강렬하게 지금 내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혹은 연예계의 저속함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소유한 이들도, 자신의 앞에 등장한 멋진 이성/동성 배우에게 향하는 자신의 선망과 동경의 눈빛을 돌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처럼,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혹은 토마스 만 자신의) 완성된 고귀한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정신이 어떠한 세속적 대상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나는 무척이나 즐겁게 공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감히'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으며, '이 녀석, 나와 같은 종류의 열등감이 장난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낄낄대었던 것이다. 물론 토마스 만은 지성적으로 대가이듯, 열등감과 그것의 표현에도 대가이고, 나는 그저 '키 작은 프리데만’일 뿐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지금껏 아마도 나만 몰랐던 사실을 이 리뷰를 거의 작성해가는 시점에서야 알게 되었다. 유언에 따라 뒤늦게 발간된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동성애와 상업적 허리우드 영화에 대한 취향 등이 밝혀지면서, 그의 근엄한 지식인, 아버지, 시민의 이미지가 상당부분 깨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래, 역시 그랬군. 하였다.


전쟁 중 망명 지식인들의 조직화 문제(즉 지식인의 참여 문제)와 전후 독일의 책임을 둘러싸고 토마스 만과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증오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세부적인 사항은 차치하고, 둘 간의 어떠한 명백한 대조를 볼 수 있는데 - 격변기의 치열한 참여주의의 경향과, 개인주의적이고 귀족적인 성향 간의 대조를 - 나의 이성은 브레히트를 지지하되, 나의 감성은 만을 지지하니, 나에게도 토마스 만 못하지 않은 분열이 있는 셈인데, 문제는 항상 그거다. 어쨌거나 나는 [토니오 크뢰거] 같은 작품을 쓸만한 능력이나 재능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질투는 나의 힘이라, 말할 수밖에.


못된(?) 생각이지만, 그의 일기가 너무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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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2-0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에 세계 명작 어쩌구 하는 책들을 제법 봤는데, 유독 몇몇 작가들은 전혀 시작도 못한 경우가 있어요. 그 중 한명이 토마스 만이네요. 어쩜 단편 하나도 본 게 없는지. 보관함에 책이 또 한 권 늘어납니다.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ㅎㅎ

happyant 2006-02-0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재미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즐거웠어요. 토마스 만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는 캐릭터인것 같아요.^^일기를 읽고 싶은데, 어떻게 구해야 할 지를 모르겠네요.

urblue 2006-02-20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 뽑혔네요. 축하~

happyant 2006-02-2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그동안 봐 두었던 몇 권의 책을 살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오우아 2006-02-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도 이쪽에 관심이 많은데요. 좋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

happyant 2006-02-2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비연 2006-02-22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좋은 리뷰이네요.

happyant 2006-02-23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기는요...감사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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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여기에서의 '질'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의 '삶의 질'을 의미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시대인식에서부터 출발한 민주주의자로서의 저자가, 그러한 저하의 이유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담은 것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와 해결방안’이 놓여있는 공간은 각자가 견지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민주주의자로서의 저자가 파악하는 오늘 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즉 이데올로기적 양극화와 권위주의적 산업화, 그리고 87년 민주화 운동의 보수적 종결을 경험하며 성립된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는 ‘기존의 냉전 반공주의의 헤게모니와 보수독점의 정치구조에 그저 얹혀 있는 외피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 계층의 갈등이 정상적인 형태로 정당에 의해 대리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민중의 발언권이 축소되고 삶의 수준이 저하되는 것은 그것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또한 이러한 토대 위에서, 민주화 이후 연속적으로 집권한 비주류 정부는, 자신들을 지지한 세력과의 연계 고리를 유지하기보다 보수 세력과의 타협을 추구함으로써, 집권 후기 역설적으로 권위주의 정부보다도 더 관료에 포획된 무력한 정부가 되었고, 그들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세계화로 인해 재벌의 경제적 집중은 심화되는 가운데 노동은 더욱 철저히 정치의 장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시민사회는 그 규모는 성장하였지만, 그것과 동시에 내부의 보수적 헤게모니가 강화됨으로써, 오히려 한국 사회의 민주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현상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문제의 해결방식은, 대중의 갈등을 대리하지 못하는 보수독점의 협애한 정당체제로 표상되는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변화시켜, 사회에 상존하는 갈등이 정치체제 내에서 해소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저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비롯하여 책 말미에 몇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논의의 깊이의 측면에서나, 대안이 전체 내용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측면에서나,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있지 못하다. (초판에서 그러했듯)사실상 ‘기원과 (한때 그가 기대했던 현재 노무현 정부의)위기’까지가 저자가 이번 개정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의 ‘결론과 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기원과 위기’ 이후 이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저자가 참여하는 몇몇의 세미나에서 그가 발표한 글들이 아마도 그것의 내용이 될 터이다. 작년 10월 21일에 있었던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 역사와 좌표’ 심포지엄과 올해 1월 12일에 있었던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 한국사회 위기 진단과 희망 찾기' 포럼에서 발표된 각각의 그의 글은 이번 개정판이 담아내지 못한 몇 가지 중요한 지점들을 담고 있다.


우선 저자는 과거 한국 사회 민주화의 커다란 이념적 기반이었던 NLPD론을 다시 되살릴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지금껏 그가 보여 온 지난 민주화세력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감안하면 얼마간 뜻밖인데, 사실상 저자는 과거로부터의 연장선상에서 NLPD론의 회복을 주장하기보다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사회가 추구해야할 두 가지 현실적인(동시에 어느 정도 당위적인) 가치로서 통합적인 NLPD론을 재정립 하려는 듯 하다. 분열되어 PD적 문제의식이 약화된 NL의 현실 상황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현실적 사회 변혁의 방안으로 적합한 것이 ‘민주주의’인가 ‘운동’인가?” 라는 얼마간 도발적인 이분법적 질문을 던지며, 그 대답으로 후자를 비판(혹은 걱정?)하면서 민주주의를 더욱 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면모는 그의 최대의 장점임과 동시에 주류 정당정치의 공간을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의 그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진 대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지나오는 동안, 그의 이상(혹은 학자로서의 기대감)과 그가 지지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려 왔다.


하지만, ‘한계’를 지적하기에 그의 논의는 그것 자체로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말처럼 ‘민주화로의 전환의 과정에서 운동의 역사적 기초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한국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냉전 반공주의와 보수적 산업화를 주도했던 권위주의가 해체된 민주화이후의 시기에 소멸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사회의 희망적인 대안이 노모씨나, 황모씨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민중들의 피로 유지되는 연극이라면, 적어도 규칙도 원칙도 없는 저열한 개그는 아닐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김규항의 사사로운 언어를 빌려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XX, 학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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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1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장집 선생이 말하는 바가, 대략 정리가 안 되었는데 '위험하면서도 의미있는 접근이라는 점'에서 님의 리뷰를 보고 아우트라인이 잡히네요. 일전에 <민중의 세계사>를 소개해주실 때부터 늘 먼저 책을 읽으시는구나 생각했더랬습니다.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happyant 2006-01-1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먼저는 무슨...^^ 그저 읽어봐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후마니타스 2007-06-1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한참을 - 며칠간을 - 고민했습니다. 어떠한 언어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라는 습관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요. 그리하여 간신히, 매우 사적인 언어들이나, 나름대로 공적인 단어들, 혹은 억지로 학술적인 어휘들로 이루어진 몇 문장을 만들어 보았지만, 영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몇 페이지(!) 분량의 파편적인 문장들 뿐, 생각들은 잘 엮이지 않았고, 설혹 엮였다 하더라도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면 위악적으로 보이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정상이되, 단지 저의 비평적 지식과 체계적인 사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분명, 김모교수의 멋들어진 비평 하나가, 떡하니, 소화 안 되는 설날 떡처럼 담겨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거나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쓸쓸했고, 슬펐으며,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나 자신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세상이라 생각했고, 그 감정이 소중하며, 그것을 느끼게 해준 이 작품이 무척이나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나'이며, 내가 '장모씨'이며, 장모씨가 '그'이기 때문이었고, 또한 세상은 여전히 '즐거운 그의 방'처럼 어둡고, 외롭고, 모두를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문득, 혼란스러운 작품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혼란스러운 인간이 보았으니, 무엇인가 정리된 감상이 생산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그'와 짧은 동거를 하였지만, 저는 그들과 앞으로 오랜 동거를 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만약, 제가 이 작품의 존재를 며칠 뒤에 잊어버리더라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모두를, 그냥 안전하고 완전하게, 타자를 망각한 채로, 살아가도록 놔두지를 않으니까 말입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심층의 이야기부터, 매우 거친 사회의 표면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가능성의 흔적들까지, 세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그리고 그 그림들의 여백에 작가의 진심이 담겨져 있는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쉽지 않은 일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라고, 그러하다고, 적어도 좁은 제 방 안의 어떠한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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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1-0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보셨군요. 저의 올해 첫 주문은 역시 이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올 한해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올해에도 변함없이 좋은 글 보여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

happyant 2006-01-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에- 꼭 보세요. 바람구두님의 추천페이퍼는 정말 감사한 것이었습니다.ㅋ

블루님도 올 한해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좋은 리뷰와 페이퍼, 항상 그렇듯 기대하겠습니다.~

happyant 2006-01-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앗앗. 매번 바람구두님의 리뷰나 페이퍼를 보며 여러가지를 배우는 처지인데;; 그리 말씀하시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구두님의 이 책 리뷰 또한 잘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추천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3-1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happyant님의 하나의 리뷰를 읽고 글이 좋아 여러작품 리뷰를 읽다가 글 남깁니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다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286 컴퓨터는 어느새 펜티엄이 되었고, 386 혁명가들은 어이없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무엇인가 변하기는 변한 것도 같다. 세상이 변했으니 사람들도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으니 그 사람들이 창조해내는 작품들도 변한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민주사회다. 책들의 표지는 반짝반짝, 연예인들을 비추는 조명만큼이나 빛나고, 이 찬란한 시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취향이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얼마나 변하였는가. 선명한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에 투명한 파시즘이 자리 잡았다는 얘기는, 얼마간 타당하지만 대체로 복에 겨운 헛소리다. 방패에 찍혀 죽어나가는 농민들과, 기계에 찍혀 죽어나가는 이주노동자들을 담은 사진이 선명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변한 것은 사람이지, 세상이 아니다. 때문에, 대체로 ‘변한’ 오늘날의 문학이 그것의 기반으로서의 세상을 얼마나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얼마간 비판적인 대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그늘을 바라보는 작가는 오늘 날에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소년은...'는 그러한 작가가 풀어놓는 여전한 세상을 여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극도의 가난을 겪고 열 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어린 화자와, 성매매를 통해 생을 유지하는 그의 누이, 그리고 그녀를 착취하거나 사랑하는(그럼으로써 착취하는) 몇몇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무척이나 무거운 어조로 그려낸다.


소설이 우선적으로 ‘재미’를 주는 것은, 화자가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이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어린이날에 어울리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나이의 화자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어른들과 우정을 쌓을 정도로 노숙하다. 근대로 접어들며 구성된,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아이'라는 개념은 실질적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시대에 해체되고, 그것이 해체된 잔해를 걷으면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한걸음의 상승과 영속적인 추락의 문체로 진행된다. 예컨대, 새로운 삶을 꾸려보려 이것저것 가재도구를 장만했다, 태풍이 불어왔다, 삶이 잠겨버렸다. 이런 식이다. 작품 속에서 절망은 공기와도 같고, 고독은 끼니보다 자주 찾아온다. 무거운 문장은 더 무거운 현실과 부딪쳐 끊임없이 부서지고, 이것은 소설의 끝까지 지속된다. 난장이가 공을 쏘아 올린 지 무려 30년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고독한 작가가 뱉어내는 문장 또한 여전히 쓰다.  


책을 덮고서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은 누이의 전형성이다. 저열하게 말하자면, '무능력한 가족들을 몸 팔아서 부양하는' 누이의 캐릭터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반복되지 않았던가. 물론 여전히 여성을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내모는 사회체제는 존재한다.(아니,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남성 작가로서 그러한 부분들을 좀더 올바르게 그리려면, 좀 더 겸손하던가, 혹은 좀 더 창의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의 대부분이 '나'의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필연적으로 외부의 인물들이 얼마간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불가피했겠지만, 작품 속에서 성매매라는 것이 단순한 소재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만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과연, 소년은 눈물을 그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은 무리한 기대인 것 같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문득 진정 뜬금없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삽입곡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물 흘리는 소년이 신화가 되기에, 세상에는 그보다 멋진 이미지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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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2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라도 가능할까요? 책을 볼 때, 혹은 님의 리뷰같은 이런 글을 볼 때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하여, 다시 무겁습니다.

happyant 2005-12-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을 덮고 우울한 마음에 깊이 생각 못하고 글을 싸질러놓았는데, 블루님의 물음을 받으니 너무 쉽게 쓴 것 같아 제 마음도 더 무겁고 부끄러워 집니다. 어쨌거나, 할 수 있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것의 크기 역시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