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비와 인연이 많은 가 보다. 지리산으로 떠나기 전날에도 썼다시피 준비물을 다 챙기고, 할인점에 가서 산행에 필요한 모든 먹거리를 다 샀는데 비가 슬슬 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텔레비전 일기예보를 귀기울이니 폭우가 쏟아진다는 우울한 소식 뿐. 그래도 '내일 일어나면 좋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가지고 잠들었는데...... 불행하게도 아침 빗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고 말았다. 아침부터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혹시나 같이 가기로 한 선생님들께 연락이 올까 기다렸으나 아무 연락이 없고, 나는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터미널로 갔다. 약속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분들이라 모두 제 시간에 모였다. 농담처럼 '비가 많아 온다는데 못 가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한 번 하기로 한 거니까 가자'는 것이 대세였다. 물론 가면 비가 그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채로 말이다. 참고로 같이 가기로 한 두 분의 여선생님들은 지리산이 처음/두번째이고, 김의주선생님은 네 번째라고 하셨다. 그러니 꼭 지리산에 오르고 싶은 여선생님들의 강한 의지로 우리는 구례행 버스를 탔고, 비가 그치기만을 기대하며 이내 잠이 들었다.
구례행 버스가 하동에서 한 번 정차했는데 그 때는 비는 점점 거세지고 앞으로 더욱 날씨는 흐려서 호우주의보를 발령하니 등산객은 주의를 당부한다는 기상특보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초보(?) 선생님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비 오는 지리산을 오를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구례에 도착한 시간은 우리가 당초 계획했던 그대로 13시였다. 구례읍내에서 널리 알려진 '부부식당'에서 대사리탕-고동 수제비-으로 점심을 먹었다.(미리 인터넷으로 지리를 익혀 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구례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있는 성삼재행 시내버스. 버스를 타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이제는 내리는 수준이 아니라 퍼붓는 수준에 이르렀다.- 국립공원 매표소를 통과할 때 직원이 지리산은 입산통제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버스로 올라가도 산행을 못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작심하고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은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는 분위기! 아무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결국 버스는 성삼재에 닿았다. 당초 우리의 계획은 노고단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새벽부터 걸어서 세석대피소에서 둘째날을 자고 천왕봉에 오른 다음 중산리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았기에 노고단까지만 갈 수 있으면 되었지만 그것마저도 입산 통제!
타고 온 버스로 다시 내려가니 속이 쓰렸다. 아깝게 돈만 3200원씩 두 번 날리고, 길이 워낙 구불구불해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구례터미널에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네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계획을 급히 수정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의논을 해서 둘째날 예약한 세석대피소로 올라갈 수 있는 지리산 입구에 민박을 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방을 잡은 곳이 하동 쌍계사 위쪽에 있는 신흥리. 신흥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의신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의신에서는 거림골을 거쳐 세석평원에 오를 수 있고, 빨치산들의 최후의 격전지로 알려진 대성골을 타고 세석평원으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다음날도 비가 오면 돌아가야 하니까 신흥리 버스정류장 근처에 민박을 구했다.
민박집에서의 하루는 더 없이 평온했다. 오후에 빗속을 산책하며 마을길도 걸어보고, 거침 없는 물소리에 귀를 씻기도 하고, 통유리로 된 민박집(그래도 방값은 무지 쌌고, 새 건물이라 시설도 좋았다.)덕분에 방안에서 줄곧 내리는 비오는 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밥을 해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다른 선생님들은 윷놀이로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나는 그 시간에 잤다.)
다음날 아침 비는 더 거침 없이 쏟아졌다. 정말 줄기차게 내리는 게 저런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보다 계곡물은 더 불어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섬진강으로 쏜살 같이 달려갔다. 우리는 지리산관리공단에 전화를 걸어 입산이 가능한 지 물었으나 여전히 입산통제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러나 오전 10시, 비가 슬슬 그치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이 정도 날씨면 입산이 통제되어도 '성삼재에서 산은 볼 수 있겠다' 싶어서 다시 구례로 나가기로 했다.
민박집을 나오자마자 군내버스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터벅터벅 물기가 밴 도로를 걷다가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그러나 좀처럼 차가 다니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얻어탄 차는 트럭! 우리는 트럭 뒷자리에 앉아서 이제야 걷히는 구름이며, 싱싱하게 자란 야생 차밭이며, 섬진강으로 달려가는 물줄기며, 내년 봄 화려하게 꽃피울 준비를 하는 벚나무를 보며 개구쟁이 마냥 신났다. 세차게 달리는 트럭을 맞으러 오는 시원한 바람에서 이제는 가을 향기가 문득문득 묻어나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화계장터에 도착해서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지 않고 차를 얻어탔다. 구례터미널에 도착해서 마침 출발하려는 성삼재행 버스를 타고 성삼재에 올랐다. 날씨는 구름이 산밑에서 올라오고 있었으나, 날은 그런대로 화창한 편이었다. 바로 노고단대피소로 직행. 1시간을 걸어 올라간 대피소에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일정을 다시 잡기로 했다. 어차피 2박 3일의 지리산 종주산행은 힘들어졌기 때문에 노고단에서 가까운 뱀사골산장에서 1박을 한 후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가서 남원의 실상사에 들렀다가 부산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오후 3시. 구름이 휘감고 도는 반야봉을 바라보면서 노고단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노고단고개에서 뱀사골산장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는데, 초보 여선생님이 계시니까 괜히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실제 산행을 해 보니 두 분 다 생각보다 잘 걸으셨다.
돼지평전-임걸령-노루목-삼도봉-화개재까지 가볍게(?) 능선을 따라 걷고, 화개재에서 200m 아래에 있는 뱀사골산장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비가 온 탓인지 등산객들이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슬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동안 밥을 지어 먹고(이번 산행의 야심작품인 재첩국을 끓였다. 산꼭대기에서 먹는 재첩국맛이라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 분 선생님은 모여서 노래와 이야기로 신나는 밤을 보내고 계셨다. 나중에 나도 살짝 끼여서 모처럼 활짝 웃었다.
후덥지근하고 축축하며 사람들로 복작대는 대피소에서의 잠은 일찍 깨기 마련이다. 새벽 3시부터 계속 깨다 자다를 반복했다. 아침 6시 30분. 본격적인 식사 준비를 시작해서 아침을 끓여 먹고 8시에는 내려갈 짐을 모두 꾸렸다. 이제부터는 완만한 4시간의 하산길. 계속 계곡을 끼고 도는 길이라 지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길이(9km)가 만만하지 않았다.
내려오는 내내 뱀사골의 명소인 많은 '소'와 '담'과 '대'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쉬었다. 어제의 피로까지 겹쳐서 여선생님들이 좀 힘들어 하셨다. 그렇지만 뱀사골이 만들어내는 절경에 다시 힘을 얻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예정된 시간에 산행을 끝마칠 수 있었다. 반선마을 입구에 있는 제 2야영장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준비물도 빠진 것 없이 다 챙겼고, 먹을 것도 딱 적당히! 그래서 쓰레기가 거의 남지 않아 이번 산행 내내 감탄을 했다.
지친 선생님들이 실상사는 다음에 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남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남원터미널에 도착해서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로 복작대는 터미널이 마치 딴세상 같았다. 한 시간 후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타서는 잠이 들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터미널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자판기 커피도 한 잔 마셨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챙겨갔던 코펠을 다시 씻어서 신문지를 깔고 말렸다. 산에서는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씻고 났더니 한결 개운하다. 차에서 잠을 잤더니 그리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 이제 내일 좀 쉬면 목요일부터는 개학이다. 힘차게 2학기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좀 얻은 것 같다. 지리산이 있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