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험문제를 내느라 학교에 혼자 남아 있다가 늦게 왔다. 열심히 문제는 냈으나 아직 다 내지는 못했다. 내일까지 열심히 해야 완성될 것 같다. 학교에서 나선 시간이 10시 20분쯤이었다. 3학년들이 10시에 집에 가기 때문에 학교 밖을 나오니 몇 명이 보였다.

문방구 앞 오락기. 고등학교 3학년짜리들이 문방구 앞에 몇 대 갖다 놓은 작은 오락기 앞에 붙어서 정신없이 오락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이 낯설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아이들이 어색하게 인사한다.

느티나무 : 니들 여기서 뭐하노?

학생 : 어? 샘! 집에 가기 전에 이거 한 번 해줘야 잠이 잘 오는데요.

느티나무 : 아이구야, 이 오락기는 초등학생용인 줄 알았더니만 완전히 어른용이네?

학생 : 아침에는 초딩이 하구요, 저녁엔 우리가 점령하는데요.

느티나무 : 어, 어! 니 죽겠다. 빨리 피해라.

학생 : 어? 샘이랑 이야기하다가 죽을 뻔 했네.

느티나무 : 조금만 하다가 들어가거라!

새로 개업한 통닭집. 며칠 전에 개업한 통닭집이 닭다리 4개를 오천원에 팔아서 매번 볼 때마다 10명씩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속에 교복입은 4명의 학생. 나는 슬쩍 다가갔다.

느티나무 : 너희는 여기서 뭐 하노?

학생들 : 어머, 샘! , 샘 뭐하다가 이제 가세요?, 우리 닭 사먹을라구요.

(이쯤에서는 아이들의 큰 목소리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로 시선 집중! 이럴 때 나는 항상 민망해 하면서 '얘들아, 쉿~! 조용히...하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댄다.)

느티나무 : 근데 와 이집은 와 이렇게 사람들이 줄을 서노?

학생들 : 몰라요, 우린 싸니까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느티나무 : 내 것도 있나?

학생들 : (단호하게) 아뇨! 닭다리만 4개 나온다니깐요. (하면서 저희들 네 명을 가리킨다.)

느티나무 : (섭섭한 척 하며) 그래 알았다, 많이 먹고 살쪄라. 먼저 간대이~! ㅋㅋ

학생들 : (웃으며) 샘 삐치지 마세요. 낼 뵈요.

 

지하철역 근처. 선물 포장지 같은 것을 든 두 명의 여학생이 서성거리고 있다. 나랑 반대 방향으로 오다가 마주쳤다.

느티나무 : 안녕, 집이 어딘데 일로 가노?

학생 : 아직 집에 안 가는데요.

느티나무 : 그럼?

학생 : 저기 어디 좀 갈라고요.

느티나무 : 왜? 어디?

학생 : (머뭇거리다가) 오늘 OO 200일 되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선물 만들어 주려고 지금 가는 길이에요.

느티나무 : 200일이면 200원 주면 되는 거 아이가? 딴 친구들은 다 그렇게 하던데...

학생 : 헤헤, 그래도 친한 친군데 그거 말고 좀 특별한 거 해 주고 싶어서요.

느티나무 : 그럼 너무 늦게 들어가지는 말고, 조심해서 가거라!

학생 : 예, 낼 뵈어요.

   나는 아직 차가 없다. 학교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오는데 약 10분. 이 사이에 많은 아이들을 만난다. 가끔 교복을 입었는데도, 나를 외면하거나(?), 한눈 팔다가 못 보고 가거나 하는 아이들을 내가 보면 서운할 때가 있다. 반대로 나를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녀석을 만나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퇴근할 때 만나는 아이들의 행동이 집에 가는 내 기분을 좌우한다. 그래서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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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8-3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기에도 즐거운 풍경이네요. ^^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던 책을 드디어 사게 되었다. 후후- 일단, 기쁘다. 어제 우연히 컴퓨터 옆에 있는 빈약한 책꽂이를 보다가 김봉렬님의 한국건축의 재발견 시리즈가 2,3권만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부터 알았지만 어제야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알라딘에서야 예전에도 찾아 봤지만, 절판된 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에 비발샘께서 올려준 헌책사랑을 찾아가서 검색해 보니, 한 군데 파는 곳이 있었다. 책의 상태는 상이라고 하는데 값은 정가의 50%인 9,000원이었다. 냉큼 집어들고 더 살 책이 없난 싶어서 구경다니다가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마저 채우고 싶어서 검색했더니 5권은 있는데, 6권은 거기서도 절판이라고 한다. 다시 5권을 넣어서 주문을 했다. 그래서 이 밤길을 타고 '시대를 담는 그릇'(김봉렬, 이상건축, 1999)과 '해방전후사의 인식5' 나에게로 달려오고 있다.

   저번에 사 둔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슬슬 욕심이 나는 책들이 생겼다. 전에 '질러족 출입금지'라는 페이퍼 보고 무슨 소린가 싶어서 들어갔다가 찍어둔 책도 있고, 이래저래 구경다니다 보면 필요하겠다, 읽고 싶다, 갖고 싶다 하는 책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 산 책을 좀 소화하고 나서 주문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또, 자랑해야지!) 한겨레 21에서 문화상품권이 보내주면 그 때 장바구니에 보관된 책을 털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겨레21! 빨리 좀 보내주세요!ㅋㅋ) 

   아무튼 책 읽는 게 또 부진한 요즘이지만 그래도 책이 오는 동안은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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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8-3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영엄마 2004-08-3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사고 싶던 책을 사시게 된 걸 먼저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알라딘 서재에 마실 다니면서 읽어보고 싶은 책만 늘어나서 걱정입니다, 그죠?

118100


ceylontea 2004-08-3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사고 싶은 책을 살 때만큼 기쁠때가 또 없지요.. 좋으시겠어요...아침저녁으로 날씨도 선선해졌는데... 즐독하세요... ^^

느티나무 2004-08-3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선인님의 웃음의 비밀을 알 것 같아요 ^^
아영엄마님 맞아요. 세상에 좋은 책들이 너무 많네요. 고맙습니다. 8100번째 방문객이시네요.
실론티님 기쁘기는 하지만 또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으니 부담이 살짝~! 열심히 읽겠습니다.
 

곡목설

 - 장 유

   이웃에 장씨 성을 가진 자가 살았다. 그가 집을 짓기 위하여 나무를 베려고 산에 갔는데, 우거진 숲 속의 나무들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꼬부라지고 뒤틀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산꼭대기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발견하였는데, 정면에서 바라보나 좌우에서 바라보나 곧았다. 장씨가 쓸 만한 재목이다 싶어 도끼를 들고 다가가 뒤쪽에서 바라보니, 형편없이 굽은 나무였다. 이에 도끼를 버리고 탄식하였다.

   '아, 재목으로 쓸 나무는 보면 쉽게 드러나고, 판단하기도 쉬운 법이다. 그런데 이 나무를 내가 세 번이나 바라보고서도 재목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겉으로 후덕해 보이고 인정 깊은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그 본심을 알 수 있겠는가? 말을 들어보면 그럴 듯 하고 얼굴을 보면 선량해 보이고 세세한 행동까지도 신중히 하므로 우선은 군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큰일이나 중대한 일에 당하여서는 그의 본색이 드러나고 만다. 국가가 망하는 원인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무가 자랄 때는 짐승들에게 짓밟히거나 도끼 따위로 해를 받은 일이 없이 오직 이슬의 덕택에 날로 무성하게 자란다. 따라서 마땅히 굽은 데 없이 곧아야 할 텐데 꼬부라지고 뒤틀려서 이처럼 쓸모 없는 재목이 되고 말았다. 하물며 요즘 같은 세상살이에 있어서이겠는가? 물욕이 진실을 어지럽히고 이해가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천성을 굽히고 당초에 먹은 마음에서 떠나고 마는 자가 많다. 때문에 속이는 자가 많고 정직한 자가 적은 것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장씨가 이러한 생각을 내게 전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대는 정말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서경 홍범편에 오행(五行)을 논하면서, 나무를 곡(曲)과 직(直)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무가 굽은 것은 재목감은 안 될는지 몰라도 나무의 천성으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자는 요행히 죽음만 모면해 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하지 못한 자가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가는 것 또한 요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이 세상에서 굽은 나무는 아무리 서투른 목수일지라도 가져다 쓰지 않는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도 버림받지 않고 쓰여지고 있습니다. 큰 집의 구조를 살펴 보십시오. 공(公)과 경(卿)과 대부(大夫) 그리고 사(士)가 예복을 갖추어 입고 궁전에 드나드는데, 그 중 정직한 도리를 간직하고 있는 자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굽은 나무는 항상 불행을 겪고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자가 항상 행운을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말에 '곧기가 현(絃 : 악기 줄)과 같은 자는 길거리에서 죽어 가고 굽기가 구(鉤 : 갈고리)와 같은 자는 공후(公侯)에 봉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굽은 나무보다 많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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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30일(음력 7월 14일)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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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8-3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게 어제 그 달이로군요. 가리키는 손가락도 하나 있었으면... 갈대가 무르익을 즈음에 바람이 오르던 그 능선에서 노을부터 보는 건 어떨까요? 노을이 끝나면 이번엔 달을 바라보면서 걷는거죠.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져요. 라면에 넣을 찬밥은 제가 챙기지요.
 

기분이 들었다.

   달이 훤하게 밝은 밤, 금정산의 동문에 모인 여섯 명. 전부 구름 사이로 나오는 달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산행을 시작했을 때가 여덟시 반쯤이나 되었을까 그랬다. 그리고 북문에 도착해서 라면으로 야식을 먹고 나니 벌써 열 두시를 훌쩍 넘겼다. 서둘러 범어사 쪽으로 하산했다. 여섯 명이서, 범어사 순환도로를 터벅터벅 내려오니 반가운 빈 택시 한 대. 고마운 기사님 덕분에 택시에 여섯 명이나 타고 부산대학교 앞에 도착했다. 이 때가 새벽 한 시 삼십 분쯤이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학생 같은 청년들이 많은 게 거리가 활기차 보였다. 우리는 뒷풀이를 하기로 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생맥주집은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학생 때 가끔 가던 허름한 술집 골목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면서 모두 한 마디씩.

- 어, 우리 부대꼼장어 갈 거야? (아니!)

- 홍보석은 그대로 있네. 어 근데, 여기 있던 낙지볶음 잘 하던 집은 없어졌네?

108 강의실이 여기 있었는데... 아, 저기 있구나!

- 오랜만에 학교 앞에 오니까 진짜 많이 바뀐다.

그러더가 새벽 3시 30분까지 문을 연다는 '우리터'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4,000원하는 오뎅탕과 3,000원하는 파전을 안주로 놓고 소주를 마셨다. 모두가, 이렇게 늦게까지 술집에 있는 건 진짜 오랜만이라며 즐거운 기분으로 술잔을 비웠다. 그러면서 시작된 이야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놓고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일요일에도 일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논쟁 속에서 쉽게 자리를 접을 줄 몰랐다. 그러나 분위기는 아주 따뜻하고, 서로가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즐거운 웃음이 나기도 했다.

   세 시를 넘어서서야 술집을 나섰다. 모두들 이렇게 늦게까지 이야기하고 놀아본 적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대학생 때처럼 즐거워했다. 우리는 같이 모임을 하고 뒷풀이도 자주 있지만, 대개 11시를 넘지 않고 일어서곤 했었다. 그러나 가끔은 모두가 밤이  깊도록 무엇인가에 열중해 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것 같다. 우리는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애쓰는지...

   아무튼 어제는 내가 아직도 '학생'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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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tim 2004-08-30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서른이 넘었소...

느티나무 2004-09-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서른 넘은지 좀 되었죠? ㅋ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샘은 꼭 대학생 같아요' 라는 말도 듣곤 했답니다. ^^ 참,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재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