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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종말론적 신비주의자 ㅣ 중세르네상스연구소 연구시리즈 1
주경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11월
평점 :
영어로 Christopher Columbus라고 부르는 이 인물은 다른 나라에서는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크리스토포로 콜롬보(제노바), 크리스토발 콜론(스페인), 크리스토파오 콜롱보(포르투갈), 크리스토프 콜롱(프랑스).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새로운 대륙의 발견을 위대한 위인에서 인디언의 학살자, 노예사냥꾼 등 다양한 평가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이 태어난 나라는 이탈리아의 제노바다. 1451년 여름이라고 알려져있다. 아버지의 직업은 직조공이었다. 그도 가업을 이으려고 하다가 젊은 시절에 방향을 전환하여 선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나중에 제노바를 떠나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건너간다. 1476년이라고 한다.26살 때다. 대관절 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세계사적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제국의 메메트 2세에게 함락된다. 이로써 지중해 동부는 이슬람권이 장악하게 된다. 지중해동쪽을 이용한 교역로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중국과 인도를 대상으로한 비단과 향신료무역으로 덕을 보던 이탈리아자본은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한다.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통상국가들은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주목한다. 아마 이 무렵에 콜럼버스 일가도 리스본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에 체류한 10년간은 그가 가장 젊었던 시절이다. 26살부터 10년간 그는 포르투갈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항해에 대한 것부터 세상사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당대의 진리인 기독교에 대한 것 까지도. 그는 방대한 독서량을 가지고 있는 독서가였다. 그 때는 책 한권의 가격이 굉장히 비쌀 때였는데, 그가 남긴 문고는 상당하다고 한다. 책 여백에 그가 남긴 주석이 상당할 정도로 그는 당대에 유행한 교양서들을 거의 다 보는 독서가였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의 재료가 된 것은 바로 그가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들이었다. 유명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해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중세의 베스트셀러였던 맨드빌의 <여행기>같은 책들이 그가 열심히 읽고 주석을 달았던 책들이다. 그런데 이들 책 가운데는 이른바 '안락의자 여행자'들이 쓴 터무니없는 소설 같은 책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열심히 믿었다고 한다. 이 책들은 아직도 남아서 연구자들이 콜럼버스의 생각을 연구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무렵 포르투갈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왕국인 모로코를 정복하려는 군사적 욕망과 동시에 아프리카해안과 대서양을 향해서 새로운 교역로를 찾으려는 상업적 욕망이 팽창해있는 국가였다. 콜럼버스는 1485년 포르투갈왕에게 대서양을 넘어선 아시아 항해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한다. 명목은 황금의 나라인 시팡구를 찾아서 금을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시팡구는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말하는 황금의 나라이다. 오늘날의 일본(Japan)을 말한다고 여겨진다. 똑같은 제안을 스페인왕에게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중에는 프랑스로 가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거의 마지막 순간에 스페인의 왕이 받아들여서 세 척의 배로 첫 항해를 하게 된다. 이들이 타고간 배는 한강 유람선 정도의 작은 규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발견을 국제적으로 알릴 때 그들이 타고간 배가 작은 규모였다는 것을 기밀로 숨겼다고 한다. 그렇게 작은 배로도 대양을 항해하는 게 가능하다는 게 비밀이라면 비밀이었던 셈이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서쪽으로 직선항해하여 아시아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또 그는 왜 아시아에 가려고 했던 것일까? 당시 유럽인의 지리학적 상식을 구성한 지도는 이른바 마파 문디(Mappa Mundi. 중세세계지도)다. 이 지도에 의하면 세계는 예수의 몸의 이미지에 맞게 되어있다. 지도 가운데는 세계의 배꼽(옴팔로스)인 예루살렘이 있다. 성경에서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아시아를 셈에게, 유럽을 야벳에게, 아프리카를 함에게 주었다고 한 것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상낙원인 에덴은 동쪽 끝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큰바다(ocean)이다. 이들에게 대서양은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큰 바다였다. 아직 유럽인에게 태평양이나 인도양의 개념도 없을 때이다.
한편으로 새로운 지도도 있었다. 이른바 포르톨라노(Portolano)지도인데, 이것은 실제적인 지형을 기록한 지도다. 당대까지 얻어낸 최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만들어낸 지도였다. 뱃사람들은 두 개의 지도를 같이 갖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1406년에는 고전시대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지구를 360도의 경도와 위도로 나누는 혁신적인 방식의 지리학이었다. 이 때쯤에는 이미 뱃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지구는 평평해서 먼바다로 나가면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선원들이 믿었다는 이야기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다. 오히려 선원들이 먼바다로 항해할 때 두려워했던 것은 물과 식량이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선원들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가 나름대로 공부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육지가 바다보다 6배나 더 크고, 바다는 아주 작다. 아시아는 광대한 대륙이다. 아시아의 끝에는 시팡구라는 황금이 가득한 섬나라가 있다. 시팡구로 가는 길에는 8,000개 가까운 섬이 있다. 그 섬들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서 식량과 물을 해결하면 될 것이다. 콜럼버스의 계산으로는 카나리아제도에서 일본 사이의 거리는 2,400마일 정도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실제 거리는 16,000마일이라고 한다. 중간에 아메리카 대륙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이 스페인의 팔로스 항을 떠난 것은 1492년 8월 3일이다. 10월 10일에 선원들이 반란을 기도했다. 가도가도 망망대해만 나오니 선원들은 두려워진 것이다. 콜럼버스는 며칠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육지가 안 나오면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이틀 뒤인 10월 12일 현재의 바하마 제도에 있는 '구아나아니'(이구아나를 닮았다고 현지인이 부르는 이름)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 붙였다. 원주민들은 발가벗고 다니고, 정말 친절하게 그들을 환대했다. 콜럼버스가 이곳에서 찾은 것은 금이었다. 그렇지만 금은 없었다. 나중에 그가 발견한 것은 쿠바였다. 그는 쿠바를 아시아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모두 4차에 걸친 항해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강도 있었다. 바다가 아니라 민물이 흘러나오는 강을 발견한 그는 이곳이 바로 에덴동산이 있는 곳일 거라고 생각한다. 중세의 지도에 의하면 낙원은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유럽인의 항해에는 이런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간 것이고, 그것을 해석할 때는 성경에 근거했다. 인어를 보았다고 믿는 장면도 나온다. 마치 우리가 지금 태양계를 탐사하면서 온갖 추측을 하듯이 그들도 당대의 지식으로 온갖 상상을 다한 것이다.
중세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세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세계는 창조된지 7000년 정도면 종말에 이른다고 계산했다. 콜럼버스 당대에서 종말까지 남은 시간은 150년 정도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밀하게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당대의 과학자들인 뉴턴이나 케플러, 파스칼, 로저 베이컨 같은 인물들도 종말론을 적극 연구하고 종말의 시간을 계산했다고 하니, 사람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15세기의 스페인은 이러한 종말론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세력의 흥기가 끝나면 종말론에서 말하는 마지막 종파인 적그리스도가 활개를 친다. 진짜 마지막은 적그리스도와 벌이는 아마겟돈 전쟁이다. 그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종말이 온다. 책에서는 콜럼버스를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라고 하는데, 기록과 분석에 근거해서 하는 이야기다. 콜럼버스는 단지 세속적인 욕망만으로 대서양항해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분상승의 욕망이 강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기독교 종말론에 깊이 심취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황금의 나라인 시팡구를 찾아서 금을 얻고, 그 금으로 스페인 왕을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마지막 황제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카리브해에서 발견한 것은 금이 아니었다. 그가 볼 때 돈이 되는 것은 원주민노예밖에 없었다. 그는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어서 팔 생각을 했다. 이게 나중에 스페인 왕과 충돌하는 이유도 된다.
결국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의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고, 식민지를 만드는 데 첫삽을 뜬 인물이다.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콜럼버스가 도착한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기념하길 거부하고, '원주민 저항의 날'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죽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같은 이는 콜럼버스가 원주민을 학살하고 식민체제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격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전 지구적인 교류의 문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콜럼버스 덕분에 담배나, 고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맛보고 있다. 그렇지만 1만년전 빙하기로 건너가면 우리의 친척이기도 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받았던 끔찍한 대접을 잊으면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