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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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좀 설렁설렁 읽었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게 흠일 정도로 잘 넘어갔다. 유시민도 어쩌면 그렇게 쉽게 쓴 책인 것 같았다. 글이 논리적인 짜임새를 가진 책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소개한 대부분의 책과 글쓴이를 나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좀 긴장해서 읽었던 곳은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소개한 꼭지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책을 소개한 곳이었다. 내 느낌에도 유시민의 글발이 제일 살아있는 곳이 여기였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카나리나 블룸은 황색언론에 의해서 자기의 명예를 잃어버리고 거기에 분노해서 기자를 권총으로 죽여버린다. 우리의 전직대통령은 잃어버린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 차이점은 있지만 공통점은 있다. 정도를 잃어버린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검찰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에 인해서 명예를 잃었다는 점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미디어법이 현실화되면 대한민국의 언론환경은 지금보다 더 강자숭배, 시장친화, 경쟁찬양의 경향이 노골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시민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소개하는 까닭도 그 사실을 알리기위해서일 것 같다. 하인리히 뵐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다. 그런 작가도 당대 독일의 유력신문-거기도 일등신문이다-에게 좌파,빨갱이 딱지를 받고 괴로웠던 모양이다. 언론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이 책속에서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 "좋은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책보다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달리 또 있겠는가?"  책은 기적같은 일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적인가? 지혜와 소통. 하인리히 뵐의 책에 이런 구절도 있단다. "폭력은 무지에서 발생한다.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과연 옳은 말씀이다. 우리를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벌컥 화를 내거나 폭력을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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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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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이것은 조한혜정 교수가 추천사에서 밝힌 말이다. 무서운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조한혜정은 이렇게 말한다. "경쟁과 적대의 원리가 판을 치는 시대는 내부를 분열시키고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무시와 모욕으로 점철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한계가 없는 철저한  경쟁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중이다. 이보다 더한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가 이렇듯 경쟁과 적대의 원리에 충만한 곳이 될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우울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없을까?

우석훈은 혁명이라는 주문을 불러낸다. 혁명이라는 용어는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현실적으로, 학문적으로 쓸모가 없어졌던 말이 아닌가. 그 대신에 개혁이라는 말이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이명박 시대 2년차인 지금은 개혁이란 말조차도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잃어버린 10년'이니 '녹색성장'이니 '4대강 살리기'같은 빈껍데기 말들이 현 시대를 지배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2009년 지금 시점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를 불러낸 우석훈의 의도는 무엇일까? 과연 우리 사회가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란 말이던가. 그리고 그가 주문한 혁명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던가. 

우석훈이 원하는 혁명은 폭력혁명이 아니다. 찰리 채프린과 코코 샤넬로 대표되는 문화적이고 부드러운 혁명이다. 혁명의 주력부대는 20대로 본다. 우석훈은 20대 청년이 만명만 모이면 우리 사회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80년대의 전대협 수준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수준의 에너지가 모이면 그것이 가지는 파괴력이 엄청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석훈은 유럽의 68혁명과 최근 일본의 반빈곤투쟁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투쟁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우리도 지난해에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참여하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있지 않았던가. 우석훈 말마따나 그 항쟁은 규모와 기간의 면에서 68혁명을 뛰어넘는 정도였는데, 왜 사회는 변하지 않았을까. 이것도 깊은 고뇌가 필요한 질문일 것 같다.

2008년의 촛불항쟁은 10대와 30-40대의 연대투쟁 같은 성격이 강했을까? 이른바 386세대의 부모와 그 자식인 10대들의 연대투쟁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는 진단도 많이 나왔다. 20대의 조직적인 참여는 많지 않았다. 20대는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모습의 집단적인 참여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이 우석훈의 진단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여서 외치지 않으면 자기집단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단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대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요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면 시대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얼마전에 우리는 경제위기를 넘어서는 대책으로 대졸 신입사원 연봉을 20-30%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20대를 희생양 삼은 대표적인 조치의 하나인데, 여기에 대해서 20대는 조직적으로 반항하지 못했다. 이것이 20대의 집단적인 무력증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20대의 당사자운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먼저 '20대 권리선언'을 할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권리는 노동권, 주거권, 보건권, 교육권이다. 여기에다가 군복무기간단축과 사회복무제도의 강화를 더하여 제안하고 있다. 사실상 이것은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적인 사안들이다. 이미 유럽의 주요선진국들에서는 보편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만 예외라고 할 수 있다. 386세대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 오랫동안 싸워왔다면 그 다음 바통을 이어받아서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해서 후배세대들이 투쟁해야만 민주주의는 완성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토건세력과 경찰이 힘쓰는 이류국가의 국민으로 늙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전환은 빠를 수록 좋은데, 이것을 두손들고 환영할 세력보다는 온몸으로 막고 나설 세력이 더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이해당사자들이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희망으로만 남을 뿐이다. 늘 그렇듯이 대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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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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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는 자들을 배려하는 책이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독서를 불편하게 느꼈다. 그 전에 읽었던 소설책이 너무 술술 넘어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 전에 두 주 동안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쫒는 아이>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는데, 언제 그 두꺼운 책을 다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책읽는 일이 쉬웠다. 이 책은 무려 3주 동안이나 들고 있었다. 200쪽 정도 읽고나니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라마구의 글쓰는 방식이다.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글을 보는 것처럼 빡빡하게 들어찬 글의 숲을 헤쳐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이었다. 문장 안에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구분해주는 문장부호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따옴표도 없고, 물음표조차도 없다. 오로지 반점과 온점이 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장이 바뀌면 나오는 소제목도 없고, 장 번호조차도-1,2,3 하는 식으로 구분되는-없다. 책의 내용이 눈먼 자들의 곤혹함을 다루는 것처럼 책을 읽는 자들도 문장의 늪 속에서 헤매야 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쨋든 나는 그게 힘들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소설에 희망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소설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희망-눈을 뜨게 되고, 세상이 질서와 평화를 되찾는-의 싹을 도무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읽는 이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의 태생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당대 최고의 작가이다. 경력을 보니 재미있는 것은 그가 20대에 소설가로 데뷔하고서도 상당히 긴 세월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간에 그는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현대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그가 왜 그랬는지는 추측만 할 뿐이다. 60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소설을 써 내기 시작한 그는 이후에 '환상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들을 써냈다. 위대한 소설가들이야 대부분 당대의 이단적인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도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그와 비슷한 이미지로 겹쳐지는 작가는 남미의 마르께스,터키의 오르한 파묵, 우리나라의 황석영 같은 이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책뒤에 보니 사라마구의 책들은 많은 분량이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해냄'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다른 책들도 대부분 '해냄'출판사에서 나온 것 같다.  

이런 책들을 묵시록적인 책이라고 하던가. 미래세계에 닥치는 무시무시한 파탄을 보여주는 문학갈래들이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개념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까뮈의 <페스트>나 오웰의 <1984> 같은 소설들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한다. 하나같이 미래세계의 암울함을 비춰보임으로써 인류의 추악한 면을 반성하게 하는 책들이다. 그 속에는 저항하는 고귀한 인간성을 가진 존재들이 늘 등장한다. 카뮈의 <페스트>는 도시를 덮친 질병으로 인하여 변해가는 인간사회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소설과 비교해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간단하다. 어느날 갑자기 어떤 한 남자가 갑자기 눈 앞이 안 보이는 병에 걸린다. 도로 한 가운데서 이 사내는 눈이 멀어 버린다. 이어서 안과 병원에 간다. 눈에 안과적인 병의 흔적은 전혀 없는 특이한 질병이다. 이어서 안과 의사도 눈이 먼다. 이 백색질병-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마치 우유 속처럼 뿌옇게만 보이는-은 순식간에 도시를 덮친다. 정부에서는 병에 걸린 이들을 수용소에 격리시킨다. 정신병원 건물이 수용소로 이용되는데, 이 곳에서는 인간사회가 파괴될 때 생길 수 있는 온갖 야만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곳곳에 넘치는 오물들, 음식을 둘러싼 아귀다툼, 사적인 이익을 갈취하는 폭력집단의 등장, 여자들에 대한 강간, 살인.  이 곳에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딱 한 사람, 의사의 아내 뿐이다. 작가는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의사, 색안경을 쓴 여자, 처음으로 눈 먼 사내, 의사의 아내 하는 식으로 부를 뿐이다. 의사의 아내는 마치 여신 같이 여겨진다. 어쩌면 작가는 그런 의도성을 내포하면서 이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야기의 중간 정도에서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눈먼 자들 중에서도 총을 가진 폭력집단이 등장하고, 그들이 음식을 독점하고 배급하면서 사람들에게 돈과 귀중품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주춤했다. 200쪽 정도 되는 부분이었다. 어지간한 분량의 소설같으면 결론부 정도에  해당할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이 쯤에서 소설을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번에는 끝까지 읽기로 마음먹고 계속 나아갔다. 드디어 강간과 살인, 화재, 탈출이라는 대목이 이르자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왜 나는 이 대목에서 흥미를 느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감정이입을 한다면 어둡고 무시무시한 장면이기도 한데 왜 이런 것에 끌릴까. 우리가 추리소설이나 모험소설에 열광하는 이유의 한 단면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는데, 극장에서는 간판이 내려졌다. 비디오로 나오면 한번 빌려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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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상담실 이야기 - 마음이 멍든 아이들을 위한
이지성 지음 / 성안당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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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은 참 부러운 심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딱딱한 교직사회에 적응하지 않고 자기만의 심성을 계발해서 독특한 자기 색깔을 찾아냈으니 그는 교사로서 성공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많은 교사들이 '가르친다는 것'의 어려움에 괴로워하다가 가르치지 않고 관리하는 직업인 교감, 교장으로 올라가려고 자기 길을 정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계의 대세다. 교사가 되고자 한 이들도 어린 영혼을 가르친다는 일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고 그 길로 접어드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때문에 교직에 나와서야 그 영혼들을 만나고, 그 일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정말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이 인간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탈무드>에서 랍비는 탈무드교사가 되고자 찾아온 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학문을 배우려면 도서관을 가거나 혼자서 집에서 책을 읽으면 된다. 학교는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위대한 영혼을 가진 이를 만나는 곳이다."
학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일러주는 말이다. 아이들의 영혼을 매만질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고, 아이들도 기꺼이 제자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교육제도라는 틀 속에서 만나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예비해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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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 - 미국 산 육류의 정체와 치명적 위험에 대한 충격 고발서
게일 A 아이스니츠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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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서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뒤져보았다. 도살장(屠殺場)이란 한자를 풀이한다면 ‘동물을 찢어서 죽이는 마당’이란 뜻이었다. 살(殺)의 의미만 무서운 줄 알았는데, 도(屠)의 의미는 더 무서웠다. 영어로는 slaughterhouse다. slaugher란 푸줏간 주인이란다. 우리로 치자면 백정쯤 되겠다.

이 책은 끝까지 읽기가 힘든 책이다. 책의 내용 곳곳에 넘치는 것이 동물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피 냄새다. 잘 짜여진 과학다큐멘터리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은 동물의 비참한 죽음과 도살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에 대한 신랄한 고발장이다. 글의 갈래로 치자면 ‘르포르타주’에 속하겠다. 책의 80% 이상이 소와 돼지, 말, 닭을 도살하는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주된 내용이 도살장 노동자들에 대한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글쓴이인 게일 아이스니츠는 여자다.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동물학대를 고발하기 위해서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갖가지 고생을 겪는다. 나중에는 이 일 때문에 유방암에 걸리기도 한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온몸이 불편했는데, 그것을 직접 겪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글쓴이는 미국 전역의 도살장을 다니면서 도살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젊은 여자가 도살장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도살장은 근무여건이 워낙 나쁘다보니 대부분 미국내 최하층 계급이나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도살장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가정에서 폭력적으로 푸는 경우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마약이나 알콜에 손을 대는 사람도 인터뷰 중에 나온다. 글쓴이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것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80년대에 채광석이 번역해서 나왔던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1906년에 발간된 소설이다. <정글>은 시카고 식육공장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이 너무나 실감나고 노동현실은 끔찍하다. <정글>의 반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당시 대통령인 테디 루즈벨트는 정육법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정육공장에는 정부 검사관이 상주하면서 고기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검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20세기 후반에 와서 서서히 역전된다. 이른바 ‘자비로운 도살’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지만, 내용은 더 후퇴해서 검사관이 도축과정을 제대로 검사하고, 문제가 생기면 정지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대폭 후퇴한다. 그 결과로 동물들은 목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껍질을 벗기우거나 삶은 물에 데쳐지기도 한다. 또한 세균에 오염된 고기가 생산되어 소비자들은 소나 돼지가 가지고 있던 병에 걸리게 되기도 한다. O157대장균이나 살모넬라균에 오염된 고기를 먹고 무서운 병에 걸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80년대 들어서 레이건 행정부가 집권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른바 규제완화가 식육공장에도 적용이 된다. 고기에 대한 검사도 모두가 아니라 일부 표본을 추출해서 하게 된다. 이른바 HACCP의 경우에는 검사권한 자체를 식육회사 자체에 맡기는 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기업에 대한 감시가 약화되는 시대분위기를 따라서 정육공장도 그러한 감시와 규제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과는 오염된 고기의 대규모 유통이다. 작업속도를 빠르게 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다보니 도축하는 시간은 단축되고, 노동자들의 작업강도는 더 세진다. 그 과정에서 온갖 불법행위들이 벌어진다. 글쓴이가 한국어판 머리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의 도살장 실태는 믿을 수 없다. 1997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미국의 도살장은 큰 변화가 없다고 하니까 어떤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더라도 안심하고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더불어 한국의 도살장 실태는 과연 어떨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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