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강의 - 역사와 문학을 넘나들며 삼국지의 진실을 만난다!
이중텐 지음, 양휘웅 외 옮김 / 김영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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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서기 184년에서 280년까지 96년 동안의 중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사소설이다. 후한 말기에 환관과 외척의 발호로 인하여 국정이 파탄나고, 지방관료들의 백성수탈이 극에 달하자 농민들은 '황건의 난'이라는 농민전쟁을 일으킨다. 또한 황건적을 토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전국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면서 국가체제는 마비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서진의 황제인 사마염에 의해서 통일되기까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내부전쟁의 시기에 돌입하게 된다.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룬 정사가 바로 진수의 <삼국지>. 나관중은 진수의 <삼국지>를 기반으로 하여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근사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진수(233-297)는 촉나라에서 태어나 관리를 지내다가 진나라의 천하통일 이후에 진나라에서 관리 생활을 했다. 그는 <제갈량집>을 비롯한 다양한 책을 저술했다. 진수가 서술한 <삼국지>는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채택하고 있는 기전체 역사서다. 조조는 생전에 위나라 왕으로 책봉되고 황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인 조비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무제로 추존되었다. 조조의 행적은 '무제기'에서 다룬다. <삼국지>에서는 위나라의 역사는 본기로 다루고, 촉과 오의 역사는 열전으로 다루고 있다. 위나라가 정통이라는 말이다. <삼국지>는 청나라 건륭제 때 중국 역사를 다룬 역사서를 <24>로 정리할 때 그 속에 들어갔다. <삼국지><사기>,<한서>,<후한서>와 더불어 '전사사(前四史)'에 들어가는 중요한 역사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기번역가로 유명한 김원중 교수가 민음사에서 완역본을 상재한 바 있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는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나중에 동진(진나라는 서진(265-317)과 동진(317-420)으로 나뉜다)의 문제는 <삼국지>를 읽다가 당대의 학자인 배송지(372-451)에게 명하여 주석을 달도록 명한다. 배송지는 진수가 이용하지 않은 자료를 포함하여 140여종의 역사서를 모두 찾아서 주석에 기록한다. 배송지는 차이가 있는 기록이나 이설도 전부 싣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작업했다. 그러다보니 주석이 본문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책이 되고 말았다. 배송지의 주석은 역대로 훌륭한 주석의 모범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 배송지의 주석 덕분에 나관중이 <삼국지연의>가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탄생하게 되었다.

 

삼국지 이야기는 당, , 원나라 시기에 민간에서 전승되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로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민간에서 전해질 당시의 삼국지 이야기에는 조조나 유비, 제갈량 같은 인물들이 항우, 유방, 한신 같은 초한지에 등장하는 인물의 환생으로 나오고, 이야기 전개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식이었다고 한다. 거의 서유기 수준이었던가 보다. 나관중은 이러한 삼국지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킨 주역이다. 나관중(1330-1400?)은 원나라 말에 태어나 명나라 초기에 활약한 문학가인데,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삼국지>를 비롯해서 다양한 이야기책을 서술한 사람이다. 원나라 말에는 의병장의 참모로 활약을 한 경험도 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처럼 개인적인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는 <삼국지통속연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를 통속적으로 설명했다는 뜻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삼국연의>라고 책이름을 붙이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삼국지>라고 쓰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대표적으로 두 개의 판본이 있다. 명나라 나관중이 펴낸 24240회짜리 삼국지연의(나본)가 그 효시다. 그러다가 수많은 문필가들의 개작을 거쳐서 청나라 때 모종강 부자가 펴낸 삼국지연의(모본)가 나온 것이 1679년이다. 이후 모본 삼국지연의는 이후 300여년간 정본으로 군림해왔다. 모본은 60120회짜리라고 한다. 이렇게 길게 회를 바꿔서 나오는 소설을 장회(長回)소설이라고 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하소설쯤 되겠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현재 남아있는 판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522년에 간행된 '가정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삼국지연의가 민간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삼국지연의에 푹 빠져 있는 선조를 질타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그 때가 1569년이다. 선조는 1552년생이고, 1567년에 왕이 되었으니, 그 때는 선조 나이 18살 때이다. 한창 소설 볼 나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생애 최초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창비에서 나온 황석영 번역본으로 읽었다. 앳된 시절에 읽은 삼국지가 아니라서 그만큼의 흥분은 없었지만 40대 나이에 읽는 삼국지도 나름 재미있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만큼 의문점도 많았다. 다양한 사건들과 인물들의 행적 속에 이해 못할 부분들이 많았다. 그런 의문들은 삼국지 자체로만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 마침 도서관에 김원중이 번역한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있어서 책을 빌려서 보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너무 어려웠다. 내 지식으로는 그 책 속에 담겨있는 진실을 밝혀내는 것도 어렵고, 더구나 행간에 감춰져있는 진실들을 밝혀내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 때 마침 손오공처럼 등장해서 내 의문을 해결해 준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이중텐의 <삼국지강의>였다.

 

이중텐은 1947년에 태어난 중국의 학자다. 역사, 미학, 인류학 등을 종횡으로 오가면서 연구성과를 내놓고 대중강연능력도 탁월한 작가다. 2005년에 중국의 중앙방송국(CCTV)에서 방영하는 <백가강단>에서 '한대풍운인물'이라는 강의를 진행하면서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2006년에 방송한 '품삼국'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모두 50회로 구성된 강연이었는데, 이 강연이후 중국은 그야말로 '삼국지'신드롬을 일으켰다. 유명한 배우 유덕화는 40시간 동안 연속으로 이 강연을 다 보았다고 해서 또 유명하다. 강의를 엮어낸 책은 거의 1000만부 가까운 판매량을 보이고 있다고 하니, 가히 중국판 도올선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삼국지강의(品三國)를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1,2권을 합하면 10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다. 서문과 결문의 강의에다가 본강의 48강을 더하면 모두 50강이 된다. 한 강좌당 20쪽 정도의 분량이 들어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조조에 대해서 다룬다. 2부는 유비와 손권에 대해서 다룬다. 3부는 삼국정립이후에 대해서 다룬다. 4부는 촉과 오과 망하고 진에 의해서 삼국이 통일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삼국지연의>의 기본바탕이 되는 역사적인 사실들과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우리가 문학작품인 삼국지연의에서 다루는 조조나 유비, 제갈량, 손권을 넘어서서 실제 역사에서 활동한 그들의 본질과 행동의 동기들을 분석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삼국지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조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1부를 조조로 시작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실제 역사에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다. 사실상 조조의 행동반경을 따라서 다른 인물들도 움직인다. 제갈량조차도 그렇다. 이중텐은 조조의 진면목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다루고 있다. 이중텐이 보기에 조조의 성공비결은 그가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다. 조조는 널리 인재를 구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들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하도록 하는 용인술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삼국시대에 용인술의 천재를 순위로 매긴 것이 있다. 1위 조조, 2위 손권, 3,4위 유비와 제갈량.

 

삼국지에서 저평가된 인물로는 오나라의 주유와 노숙이 있다. 이중텐은 주유와 노숙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사실상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오히려 노숙이라고 한다. 오나라판 삼분지계인 셈이다. 삼국지에서는 주유나 노숙이 늘 제갈량의 한 수 아래 인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노숙과 주유가 대단한 지략을 가진 오나라의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오나라를 깎아 내리고 촉나라와 제갈량을 높이 올리려고 하다가 보니까 노숙과 주유가 내려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제갈량은 불세출의 군사전략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제갈랑은 소설에서처럼 싸움에서 백전백승하는 귀신같은 책략을 발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싸움에서 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대신에 제갈량은 사람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훈련하며 법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데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승상으로서 다스린 촉의 정부는 당대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이루게 된다. 촉의 백성들은 제갈량 치하에서 예측가능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제갈량의 정치이념은 정도전의 재상론과 비슷하다. 군주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승상이 책임지고 국가를 이끌어가는 식이다. 어찌보면 영국의 내각책임제 비슷한 면모를 제갈량이 보여주었다. 제갈량의 이와 같은 면은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실을 부흥시키려고 노심초사한 충신의 면모만 부각되었다. 이후의 통치자들이나 지식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었던 면만 본 셈이다. 소설 속의 제갈량은 천문을 꿰뚫어보고, 비바람을 부를 수도 있으며, 적의 모든 전략을 예측하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나온다. 제갈량이 때로는 도사나 무당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는 제갈량이 유가와 법가를 혼합한 듯한 지식인이었던 것과 비교해서 소설이 지나치게 나갔다는 면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많은 것 같다. 소설적인 재미 때문에 왜곡된 사실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고 삼국지를 읽어야 한다.

 

이외에도 삼국지의 의문들 (읍참마속이나 제갈량 사후 위연의 배반, 공융의 죽음 등)에 대해서 이중텐은 마치 셜록홈즈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배송지가 삼국지주에서 인용한 대부분의 책들을 직접 인용하면서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씩 진실을 밝혀준다. 그렇게 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진짜 면모를 확인하고,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재미도 상당하다. 삼국지를 읽고 난 뒤 생기는 숱한 의문들을 해결하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진수의 <삼국지>에 도전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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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 순조실록 - 가문이 당파를 삼키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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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순조의 치세는 길었다. 정조라는 임금의 역사적 중량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나는 늘 순조를 얼마 못 가 죽은 임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1790-1834)는 정조가 죽은 1800년 7월 4일에 즉위해서 1834년11월 13일에 승하했다. 치세는 무려 34년이었다. 정순대비가 수렴청정한 초반 3년 6개월을 빼더라도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정조는 1776년에서 1800년까지 25년을 왕으로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서 더 오랜 세월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도 순조는 우리 뇌리에 남는 게 없는 임금이다. 왜일까? 박시백은 순조가 내세운 정치적인 비전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시대를 돌파하는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조는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타협한 임금이었다. 덕분에 조선왕조는 그 위기를 더해가게 된다. 순조시대를 특징짓는 다른 인물은 정순대비, 김조순, 홍경래이다. 
 
정순대비는  순조의 즉위 초에 수렴청정을 3년 6개월 동안 하면서 신유박해를 통해서 남인을 도륙하고, 벽파독재정권을 수립한다. 드라마 같은 데서는 정조나 정약용 같은 영웅에 대항하는 반영웅으로 묘사된다. 박시백은 그런 시각이 좀 과장되었다고 지적한다. 수렴청정을 오래하지 않고 물러난 일이나, 시파인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그대로 지속시킨 점, 내노비와 시노비의 혁파를 지시한 정조의 정치적 유지를 그대로 계승해서 6만여명의 공노비를 해방시킨 점 등을 들어서 정순대비가 반동의 화신처럼 묘사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은 좀 더 공부가 필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대비들의 수렴청정만 따로 다루어보는 책도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다. 정조는 김조순을 신뢰했던 모양이다. 죽기 몇 년 전에 순조에게 김조순은 왕을 잘 보필할 수 있는 인재라고 적극 추천했던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정조가 오히려 세도정치의 길을 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박시백은 김조순을 막후 김조순이라고 표현한다. 순조치세 30년의 막후실력자는 바로 김조순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의 원조라고 지칭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김조순은 그 자체로 보면 대단히 후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것은 그가 늘 겸양을 실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벼슬자리를 주면 그대로 받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고 한다. 늘 자신은 부족한 자이기 그 자리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면모를 보였다. 박시백은 이것을 김조순이 그 이전의 척신(외척출신 신하)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냉철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한다.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다른 실력자들과 연합하는 방식을 통해서 정치적인 장수를 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치를 거의 손놓다시피 한 순조에게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영조나 정조처럼 신하를 다루는 영도력이 없었기에 순조년간에는 그렇게 세도정치가 기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순조치세는 당파의 소멸과 왕가의 허약함 위에 한 가문의 위세가 꼭대기에 올라서고, 그것이 곧바로 백성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순조 11년 말에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의 반란이 일어났다. 6개월 정도를 끈 반란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반란의 지도자였던 홍경래는 평민출신이었다. 그를 따랐던 백성들도 평민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란의 원인이 된 것은 효율성을 잃어가는 조선의 통치체계였다. 더 이상 과거는 공정한 인재선발의 통로가 되지 못했고, 백성들은 각종 명목의 수탈에 짓눌렸다.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왕조의 힘도 없었다. 바야흐로 양반관료들에 의한 수탈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것이다. 홍경래의 반란은 조선왕조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홍경래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효과는 동학농민전쟁까지 이어진다. 이후 일어나는 많은 민란의 배경에는 홍경래라는 이름이 들어간다. 백성들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길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에 의한, 사대부를 위한,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 곧 양반은 나라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결코 국가에 의해서 수탈되는 법이 없었다. 죄를 지어도 얼마 안가서 사면되고 다시 양반행세를 한다. 양반은 모든 의무에서 열외다. 순조년간에는 이런 양반열외현상에 덕을 보기 위해서 양반을 돈으로 사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돈이 없어서 평민으로 머무는 자들은 지방수령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수탈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안되면 도적이 되는 수밖에. 책에서는 '이여절의 나라'라는 장을 통해서 이것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이여절은 정조 19년에 창원군수였고, 순조 22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나온다. 중간에 그는 온갖 명목으로 백성을 수탈하지만 잠시 유배나 강등을 겪고 나면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난다. 이 장을 보면서 현대의 대한민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자나 권력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법률과 조세체계는 조선시대에 양반을 우대했던 그 시절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역사는 과연 얼마만큼 전진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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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2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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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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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등록금 연간 천만원, 청년 실업 백만명 시대다. 서민의 고통은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대는 길을 잃었다. 희망은 있는가? 이 책의 지은이들은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희망의 근거인가? 2008년의 광장에 모인 촛불이 바로 그것이다. 촛불의 민심은 꺼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서 촛불은 부활했다. 조국 교수가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토론회에서 인용했다는 <정관정요>의 말을 입증해주는 사건이었다. “왕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엎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최고 지도자는 정치가가 아니라 기업대표처럼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배가 엎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 못하는 모양이다. 
 

이 책의 부제는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이다. 오연호는 64년 전남 태생이다. 연세대 83학번이다. <말>지 기자를 지냈으며, 지금은 <오마이뉴스>대표를 맡고 있다. 조국은 65년 부산에서 태어나 82년에 서울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서울대 법대 교수를 맡고 있다. 사실상 둘은 동갑이면서 불의 시대였던 80년대의 시대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은 2012년이나 늦어도 2017년에는 진보개혁세력이 반드시 정권을 다시 찾아 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어디서부터 파열구를 내야 할까요?”라는 오연호의 질문이 그 문제의식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오연호와 조국은 이 문제에 대한 탐색을 위해서 7개월 동안 만나서 이야기를 계속해 왔다. 이 책은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6장에 걸쳐 보여준다. 제1장은 성찰이다. 왜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제2장은 사회경제 민주화다. 특권과 불공정의 시대를 어떻게 넘어설지를 이야기한다. 제3장은 교육을 이야기한다. 제4장은 남북문제를 이야기한다. 통일이 밥 먹여준다는 구호로 집약된다. 제5장은 권력이다. 검찰의 문제를 집중해서 다룬다. 제6장은 사람이다. 유력한 대권후보들을 거명하면서 비평을 한다. 진보집권플랜은 ‘진보가 밥 먹여준다’이다. 그렇게 해서 집권하면 진보적인 정책을 집행해서 진보의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우리 사회를 확연히 바꾸자는 것이 이들의 포부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집권 계획이다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다. 그래도 두루뭉술하지 않고 핵심을 짚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중에서도 나는 세 가지 측면을 재미있게 보았다. 첫째는 경제사회적 민주화의 전략에 대한 것이다. 우리사회의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비교적 단단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이에 견주면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는 아직 한참 멀었다. 우리의 비교대상인 OECD의 평균에 비추어도 우리는 너무도 후진적인 경제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OECD평균 고등교육예산은 GDP의 1.2%다. 한국은 0.6%다. 절반 수준이다. OECD에서도 사회적 구조가 평등한 축에 속하는 프랑스는 대학등록금이 한 해에 10만원이란다. 놀랄 노자로다. 우리하고 백배 정도나 차이가 난다. 부동산 정책도 최후진국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장기임대주택이 전체주택의 3%수준이다. 싱가포르는 80%다. 이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장기임대주택은 빈민들의 주거로만 인식된다. 집에 뒷덜미가 잡힌 중산층과 서민이 한둘인가. 

둘째, 검찰권력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다. 조국은 검찰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검찰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다른 권력기관에 비해 ‘문민통치’를 받지 않고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227쪽). 검찰은 보수적 세계관과 엘리트주의를 체현하고 수사권과 공소권을 독점한 권력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당도 아닌데 정치결사체 같은 조직같이 굴러간다(235쪽). 검찰개혁의 핵심은 그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서 검찰이 독점하는 공소권을 나누고, 수사권은 경찰과 나눠갖도록 해야 한다.(242쪽) 조국은 검찰과 비슷한 조직이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뭘까? 삼성이다. 어찌보면 진보개혁세력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면 이와 같은 경제권력, 국가권력의 독점적 지배현상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핵심에 검찰과 삼성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진보가 집권하면 이 부분에서 대회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노무현 집권 기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특히 2004년 탄핵이후 진보개혁세력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했던 1년 동안 과연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하여 심도깊게 조명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민심은 무서운 것이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정치인들을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도 자기들의 운명을 걸어볼 만한 세력이나 인물이 나타나면 무섭게 밀어준다. 이른바 신명이고 바람이다. 민중들이 깨어나면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정치판을 부수어버릴 정도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만 해도 여러 번 그런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민중이라는 거대한 생물을 깨우고 그 등에 올라타는 탁월한 지도자나 조직이 나타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체현한 존재로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관료에 의지하고, 재벌들과 타협함으로써 스스로 민중에게서 멀어지는 존재가 되었다. 민중들은 그런 노무현과 노무현의 정당을 버리고,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 순간 노무현의 정치적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을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명박 정권의 지나친 시도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정신이 가진 순수함을 모멸함으로써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선비는 죽게 할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는 논어의 말을 노무현의 죽음은 실례로 보여주었다. 노무현은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민중 속에서 자기를 따르던 세력이 부활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진보의 집권과 우리사회의 진보적 재편은 노무현 시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진보의 혁신을 가리키는 열쇳말로 나오는 것이 바로 ‘김상곤 효과’다. 진보개혁세력은 ‘밥먹여주는 정치’와 상관없는 집단이라는 것이 민중들의 상식이었다. 무상급식은 말 그대로 나라가 돈 안 받고 밥을 먹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그 동안 우리는 꿈도 꾸지 않았다. 나라에서 무엇인가를 공짜로 받아간다는 것은 빈민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부의 양극화, 사교육비 폭등, 저출산과 고령화쇼크를 겪어가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의 양태를 어떻게 바꿀지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희망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없었던 탓이다. 김상곤 효과는 그 급격한 사회적 충격을 완화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 한 자락을 보여주었다. 촛불 만으로는 부족했다. 광장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근원적인 힘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34쪽) 것이다. 새시대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인물을 통해서 나타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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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정치에 몸을 바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기 천성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48쪽) 
 
메리 스튜어트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정치가인 자기의 본질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정열이라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순간 그녀의 삶은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적대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는 불행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세에서 승리자가 되었고, 대영제국의 기틀을 놓는 역사적인 위업도 달성했다.  글쓴이인 스테판 츠바이크는 이 책을 통틀어서 시종일관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의 성격과 성장과정, 사고방식, 통치행태 등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메리 스튜어트가 중세시대의 이상을 물려받은 낭만주의자이며, 골수 가톨릭인데 비해서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상공업시대의 현실을 현실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현실주의자이며, 개신교도이다. 이 둘의 대결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대결이며, 중세와 근대의 대결이면서, 가톨릭와 개신교의 대결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1542년 스코틀랜드왕인 제임스5세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에 30세였던 아버지는  메리가 태어난지 6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메리는 9개월 뒤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정치는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  청소년기에는 프랑스의 앙리2세의 아들인 프랑스아2세와 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당대 유럽 최고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인 프랑스 왕이 1년만에 사망하면서 그녀는 결국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당대의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변방이며 문화적 오지였다. 또한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이 부닥치는 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가톨릭 신앙을 지닌 여왕으로서 다수의 개신교귀족들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한 사람의 여자라로서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사람을 끄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또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여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런 메리스튜어트의 삶에 닥친 위기는 바로 '사랑'때문에 온다. 두번째 결혼 때 그녀는 겨우 스물세살이었다. 남편은 스코틀랜드의 귀족 단리였다.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여자를 끄는 매력이 있었던 단리에게 메리 스튜어트는 단번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애초에 두번째 남편으로 선택하고자 했던 대상은 강력한 왕권의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사랑 때문에 그녀는 귀족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리와 결혼을 통해서 메리 스튜어트는 아들 제임스6세-나중에 통합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제임스1세-를 낳게 된다. 문제는 단리라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했다는 사실이다. 

단리는 나중에 메리의 왕권에 지나친 간섭을 일삼게 되고, 메리는 단리의 정치적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메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메리가 보스웰 백작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보스웰 백작은 강력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보스웰이야말로 진짜 사내였다. 츠바이크의 표현을 옮겨본다. " 그동안은 오직 애송이 같은 남자들만 겪어보았다. 그들은 병들고 허약한 남자들이었다." 애송이 같은 남자들이란 병사한 첫번째 남편인 프랑수아2세와 두번째 남편 단리를 말한다. 두번째 남편 단리는 폭사당한다. 여기에 가장 혐의가 많은 사람은 보스웰 백작이었다. 온 나라에 보스웰 백작과 메리가 합작하여 단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번졌다. 그런데도 메리는 보스웰 백작을 가장 신임하고, 권력은 보스웰이 쥐고 군사독재를 실시하게 된다. 메리는 보스웰과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다. 결국 둘은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게 되고(그 사이 내막이 복잡하다), 귀족들은 '단리의 살해자 보스웰 처단'을 깃발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다. 메리여왕은 보스웰과 같이 귀족들에 대항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결국 보스웰은 망명하고, 메리 여왕은 어느 섬에 유폐된다. 귀족들은 메리의 한살짜리 아들인 제임스6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메리의 이복오빠인 모레이백작이 전권을 쥐게 된다. 메리는 1년 뒤에 탈출하여 반란세력 타도를 목표로 봉기하지만, 결국 귀족연합군에 패배하여 도망가게 된다.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 여왕은 엘리자베스1세였다. 둘 사이에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둘 다 헨리7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메리는 명시적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1세는 한 때 아버지인 헨리8세에 의해 '사생아'라는 선언을 당하기도 했던 전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1세로서는 왕권에 대한 알레르기 비슷한 감정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곳에 망명했으니 늑대의 소굴을 피해서 범의 소굴로 뛰어든 셈이었다. 엘리자베스1세는 메리스튜어트를 사실상 감금상태로 18년 동안이나 잉글랜드에 잡아둔다. 메리는 잉글랜드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사실상 잉글랜드 가톨릭의 희망 비슷한 존재가 되었던 모양이다.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제거되면 바로 메리는 왕위계승권자로서 가톨릭을 다시 잉글랜드에 살릴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감금되어있던 동안에도 메리는 끊임없이 스페인과 프랑스, 로마의 가톨릭 세력에게 구원과 반란을 요청하는 원격정치를 해나간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1세와 월싱엄(일종의 경찰총수?)이 펴놓은 그물에 걸려 결정적인 물증을 제공하고 만다. 이른바 '배빙턴 모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가톨릭반란 세력인 배빙턴에게 엘리자베스 암살을 종용하는 편지에 확답을 써 보냄을 보써 반란세력의 수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87년 2월에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엘리자베스1세의 사후에 잉글랜드는 메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6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1세)가 통치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실상의 통합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메리는 근세유럽에서는 왕으로서는 최초로 참수형을 받은 존재였다. 메리 이후에 메리의 손자인 찰스1세는 청교도혁명으로 역시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참수형을 받은 왕과 왕비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메리는 유명하기도 하고, 또한 골수 가톨릭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유명하기도 하다. 그녀는 엘리자베스1세와 대비되면서 다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엘리자베스1세는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을 고난 속에서 보낸 것에 비해서 메리는 성인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타고난 여왕이요 왕비라고 할 수 있겠다. 외모와 교양도 당대 유럽에서는 비길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치가로서 지녀야할 냉혹하고 계산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다. 두번째 남편인 단리의 죽음 전후에 그녀는 정치가로서 계산적이지 못한 행태를 드러낸다. 이것이 결국 그녀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기가 되고 만다. 이에 반해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총애했던 더들리백작의 부인이 사고사로 죽는 일이 벌어지자, 역시 유언비어에 휩쓸리게 된다. 이 때 엘리자베스는 정치가로서 판단력을 잃지않고 더들리를 과감하게 멀리하는 결정을 단행한다. 이런 점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경쟁자인 엘리자베스에게 모자랐고, 결국에는 엘리자베스의 포로가 되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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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그레그 모텐슨은 평범한 미국인은 아니다. 여러모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지만,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 미국에 가서 40대 후반에 죽었다.아버지 탓에 그레그는 어린 시절을 탄자니아의 밀림에서 다양한 흑인부족들과 같이 지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레그에게는 평생 불치병에 시달리가 아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그가 파키스탄의 산골 오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학교를 지어주는 별난 사업을 하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그레그 모텐슨은 군인경력도 있고, 간호사 경력도 가지고 있는 산악인이었다. 여동생이 어느날 죽게 되면서 그레그는 여동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K2 등반대에 비상간호 담당으로 참가한다. K2봉우리에 여동생의 유품을 묻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등반은 실패하고, 내려오는 길에 그는 길을 잘못 접어들게 된다.힘든 하산길에 우연히 그레그는 코르페 마을에서 쉬게된다. 거기서 그는 하지 알리라는 마을 촌장을 만난다. 촌장의 따뜻한 대접에 감사하여 촌장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자, 하지알리는 그 대신 학교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는 지식의 빛을 안겨주고싶었던 것이다. 하지 알리는 쿠란을 암송하면서도 쿠란을 읽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쿠란에는 '순교자의 피보다 학자의 잉크가 더 귀하다'는 문구가 있다.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이슬람에는 있다.

이렇게 해서 그레그가 파키스칸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려는 사업은 궤도에 오른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유명인사들에게 500여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중에 답장이 돌아온 것은 단 한통. 장회르니라는 사람이었다. 정보통신업계의 거물이면서 엄청난 부자였다. 그에게 회르니는 몇만 달러의 기부를 약속하고 학교를 지은 뒤에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레그는 학교를 지어주기 위해서 마을로 간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그는 좋은 사람도 만나지만, 눈치빠른 사람도 만난다.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을에 갔더니, 마을 촌장을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 학교보다 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회르니에게 말하니 회르니는 다리를 지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그레그는 계곡에 다리를 건설한다. 이 다리는 그 계곡의 마을을 문명세계에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다리였다.  

코르페에 학교를 지은 뒤에 그는 파키스탄 계곡에 수십개의 학교를 짓게 된다. 이것은 장 회르니가 유산으로 남긴 100만 달러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회르니는 그레그를 '중앙아시아협회' 대표로 임명하고, 협회를 통해서 학교짓는 사업을 하게 한다. 그 동안에 그는 산악인을 아버지로 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게 된다. 그 와중에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고, 파키스탄 변경지대는 탈레반과 알카에다에 대한 공격의 거점이 된다. 운명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연결된 그는 아프칸에 대한 침략과 복수가 아니라 교육을 통한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순식간에 엄청난 후원금을 모은 그는 새롭게 아프카니스탄의 오지에 새로운 학교를 짓는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에 학교를 짓는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그레그 모텐슨의 평생의 삶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필생의 사명을 찾아낸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그는 두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장 회르니와 파키스탄의 하지 알리라는 두 현인의 도움으로 그레그 모텐슨의 삶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사람의 삶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는 보여준다. 그가 아내를 만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레그가 하지 알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묻는다. 문맹이지만 그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하지 알리를 끌어안고 한 가지만 더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다음에는 그를 만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묻는다. 
"먼 훗날에 그 날이 오면 그 때는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 알리는 코르페 K2의 정상을 올려다보면서 할 말을 진중히 골랐다.
"바람을 말을 듣게."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고지대에서 사는 어느 늙은이의 지혜는 현대도시의 최고 지식인 못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 지혜란 책속에, 혹은 학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하지 알리는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그레그 모텐슨이 지은 이 학교들이 히밀라야 오지에 지식의 단비를 퍼붓기도 하겠지만, 문명의 해악도 가져오지 않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정답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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