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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ㅣ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평점 :
내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세 번째의 소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향수> 그리고 <웃음과 망각의 책> 번번히 지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겐 '참을 수 없는 쿤데라의 무거움' 이었다. 왠일인지 집중할 수가 없었고 무척 난해했다는 느낌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생생하다.
<향수> 는 별 재미없었던 첫 데이트 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며 불쑥 '한 번 더 만나볼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과 호기심이 이는 듯한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보다는 쉬 읽혔다. 아, 어쩐지 서론이 길다구? 음.... 그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연필깍는 칼에 베이고 나서 한동안은 연필만 보아도 쓰라리게 베었던 아픈 경험을 떠올리게 되는건.... 심리적인 증후군? 그렇다면 나는 '쿤데라증후군' 을 앓고 있는 듯 하다. 그래, 정확히 그러하다. 쿤데라의 글을 볼 때면 난 항상 첫 경험이 떠오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중압감과 허덕임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경험을.
아아, 그런데 정말로 이제 그만 각설하고 이 책 <웃음과 망각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은 쉽게 말해서 그의 단편 모음 같은 책이다. 쿤데라의 입을 빌어 정확히 표현하자면 '변주곡 형태의 소설' 이란다. 모든 7segment가 독립된 이야기로 존재하는 한 편 이것들은 또 다른 굵직한 하나의 이야기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글쓰기였다. 단편과 같은 기분으로 읽어서 읽까? 쿤데라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에 갑갑증없이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은 참 절묘하다. 이 책의 큰 골자야 말로 '웃음' 그리고 '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에로스' 를 하나 더 보태고 싶다. 쿤데라의 글에서는 '성' 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그리고 분방하게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쓰리썸까지 다루고 있다. 헛. 애써 놀라지 않는 기색으로 읽었지만.... 글쎄.... 과연 그런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덕적으로나 내 상념으로는 낯설기만 했다. 나에게는 낯선 그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데 있어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책은 필시 쿤데라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리라 생각되었다. 화자 '나'의 아버지가 품고 있는 음악에 대한 애정, 그리고 망명한 사람들. 그리고 실제 밀란 쿤데라 라는 이름이 이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또 이 소설은 나름대로 해학과 풍자를 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장례식장에서 바람에 날려 벗겨진 모자를 주으러 갈 것인가 아니면 망인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뜻을 짐짓 표출하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장면이다. (끝내, 모자를 주으러 가기로 한다.) 쿤데라가 말하는 정치적인 억압, 망명....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염역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은 무지(無知)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쿤데라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망명으로 인한 고국에 대한 향수, 애잔함 또 분노는 그에게 벗을 수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지만 말이다.
쿤데라를 알기에는 더 긴 여정이 필요할 듯 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세 작품 중 어설픈 순위매김을 해보자면 이 책이 단연코 최상위다. 그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