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스탕달의 예술논쟁 범우문고 1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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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인데 꽤나 오래 읽은 책이다.  솔직히 꾸준히 읽지 않았다는게 정확한 표현이지.  생각보다 별로 흥미롭지 못했다.  발자크의 비평은 스탕달의 '파르므의 승원' 을 소개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줄거리를 짚어주고 인물 캐릭터 따위를 나열하는 일 이상이 아니었다.  비평이라는 것이 언제나 주관적이긴 하지만 객관적인 이유도 없이 내 맘에 드는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극찬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것쯤이야 무엇이 문제가 될까마는 그런 식으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이해나 지지를 얻지는 못한다.  분량의 2/3를 차지하는 발자크의 비평은 솔직히 실망스러웠어.  

  차라리 그 보다는 스탕달이 발자크의 비평에 부친 답신서가 더 나았다.  아니, 나은 정도가 아니라 훨씬 나았다.  길지 않는 편지였지만 스탕달이 어떤 사람인줄 알것 같았다.  소신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스탕달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는 교만해 보이기도 했다.  소신있는 사람이다.  그의 확고함은 지켜보는 누군가로 하여금 왠지 모를 믿음을 안겨줄 것만 같았다.

  뭐 견줄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내 입장에서도 누군가가 나에 글에 대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요' 한다면 '그럴수도 있군요.  역시 당신은 저보다 한 수 위네요.  배울 점이 많아요' 라며 수긍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내가 용납할수 없는 지적이라 할지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을 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척 할 것이다.  왜?  그것이 더 겸손해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탕달은 그렇지 않았다.  발자크는 스탕달의 글에 대해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천재적인 작품이라며 극찬했다.  그런 발자크에게 요목조목 짚어가며 답신을 쓴 것을 보고는 놀랐다.

  이 책이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스탕달의 답신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 책에 감히 논쟁이라는 도전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스탕달의 답신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얻은 것이 몇 가지 있다면 이러하다.  첫째, 스탕달의 파르므의 승원을 꼭 읽어보리라 두번째, 글을 쓰는 등 '창조(창작보다 범주가 큰 단어를 굳이 사용하고 싶네)' 를 하는데 있어서도 소신이 있어야 하겠다.  세번째, 작가들의 문체나 기술방식에 대해 좀 따져보며 읽는 눈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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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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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세 번째의 소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향수>  그리고 <웃음과 망각의 책> 번번히 지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겐 '참을 수 없는 쿤데라의 무거움' 이었다.  왠일인지 집중할 수가 없었고 무척 난해했다는 느낌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생생하다.

  <향수> 는 별 재미없었던 첫 데이트 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며 불쑥 '한 번 더 만나볼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과 호기심이 이는 듯한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보다는 쉬 읽혔다.  아, 어쩐지 서론이 길다구?  음....  그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연필깍는 칼에 베이고 나서 한동안은 연필만 보아도 쓰라리게 베었던 아픈 경험을 떠올리게 되는건....  심리적인 증후군?  그렇다면 나는 '쿤데라증후군' 을 앓고 있는 듯 하다.  그래, 정확히 그러하다.  쿤데라의 글을 볼 때면 난 항상 첫 경험이 떠오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중압감과 허덕임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경험을.

  아아, 그런데 정말로 이제 그만 각설하고 이 책 <웃음과 망각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은 쉽게 말해서 그의 단편 모음 같은 책이다.  쿤데라의 입을 빌어 정확히 표현하자면 '변주곡 형태의 소설' 이란다.  모든 7segment가 독립된 이야기로 존재하는 한 편 이것들은 또 다른 굵직한 하나의 이야기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글쓰기였다.  단편과 같은 기분으로 읽어서 읽까?  쿤데라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에 갑갑증없이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은 참 절묘하다.  이 책의 큰 골자야 말로 '웃음' 그리고 '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에로스' 를 하나 더 보태고 싶다.  쿤데라의 글에서는 '성' 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그리고 분방하게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쓰리썸까지 다루고 있다.  헛.  애써 놀라지 않는 기색으로 읽었지만....  글쎄....  과연 그런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덕적으로나 내 상념으로는 낯설기만 했다.  나에게는 낯선 그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데 있어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책은 필시 쿤데라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리라 생각되었다.  화자 '나'의 아버지가 품고 있는 음악에 대한 애정, 그리고 망명한 사람들.  그리고 실제 밀란 쿤데라 라는 이름이 이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또 이 소설은 나름대로 해학과 풍자를 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장례식장에서 바람에 날려 벗겨진 모자를 주으러 갈 것인가 아니면 망인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뜻을 짐짓 표출하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장면이다.  (끝내, 모자를 주으러 가기로 한다.)  쿤데라가 말하는 정치적인 억압, 망명....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염역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은 무지(無知)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쿤데라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망명으로 인한 고국에 대한 향수, 애잔함 또 분노는 그에게 벗을 수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지만 말이다.

  쿤데라를 알기에는 더 긴 여정이 필요할 듯 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세 작품 중 어설픈 순위매김을 해보자면 이 책이 단연코 최상위다.  그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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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이성 친구
장자끄 상뻬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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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의 삽화가로 국내에 소개된 장자끄 상뻬의 책이다.  그는 글쟁이이기보다는 그림쟁이다.  이 책은 그의 그림과 글이 함께한 책이다.  왼쪽에는 글이 오른쪽에는 그림이 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를 말하자면 바로 표제다.  속깊은 이성 친구라....  뭔가 진지한 듯 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발랄한 느낌?  여하튼 나는 책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아, 이건 뭐랄까?  이야기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화책이라 할 수도 없고....  

  이 책의 글들은 길지 않다.  그러나 이 짧은 단락들이 우리네의 일상을 함축하고 있다.  주로 이성친구 혹은 친구들을 사귀면서 있을 법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아무튼 무어라 명명하기 모호한 이 책은 얇지만 깊고 짧지만 여운이 긴 책임에는 틀림없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 전문] 

   끌레르와 나는 친구사이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친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그 애가 니꼴과 놀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는 마리 크리스띤을 찾아가서 우리 둘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고 말 했지요.  그 놀이란 우리가 정말로 친한 척함으로써 끌레르와 니꼴의 화를 돋우자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내가 제안한 놀이를 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놀았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날 끌레르가 와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니꼴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 얘기였어요.  자기는 니꼴과는 별로 친하지 않으며 그냥 친한 척을 했을 뿐이라더군요.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는 오전 내내 함께 놀았지요.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마리 크리스띤과 친한 척하며 놀 때보다 한결 재미가 덜했어요.  그래서 나는 친한 척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결국 우리는 정말로 친한 사이로 남되, 그 애는 니꼴과 나는 마리 크리스띤과 노는 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끌레르와 니꼴은 언제나 붙어 다닙니다.  그렇다고 그 애들이 정말로 친한 사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냥 친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그럼에도 그 애들이 무척 재미있게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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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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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머씨 이야기' 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명성을 얻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과 같은 소설이다.  요즘 서점가에는 그의 신간 '향수'로 도배되다 시피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 '향수'는 못 읽어봤는데....  향수는 어제 주문해 두었으니 조만간 읽을 수 있겠구려~ 

  콘트라베이스는 두어번 읽었다.  연극인 이정훈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 를 보기전에도 읽었었고....  읽을 때마다 콘트라베이스의 굵직한 음과 잔향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 글을 읽고는 관현악단의 웅장한 연주 중에서 유독 콘트라베이스의 음색을 쫓고 연주자를 관심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역시 글이라는 건 차(茶) 와 같다.  처음 우려낸 차와 두어번 우려낸 차의 맛이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듯이 말이다.  이 책은 처음 읽었을 땐 난해했고, 읽기를 거듭할 수록 매력적이다.  '좀머씨 이야기' 가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책이라면 '콘트라베이스'는 참으로 예술적이다.  쥐스킨트의 음악적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점....  쥐스킨트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할 수 있을까?  만약 YES 라면 다방면에 소질이 있다고 말하고 싶고 No 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 콘트라베이스 주자와 같은 묘사를 할 수 있는지 말이다.

  색바랜 니트에 은둔작가로 더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  역시 그만큼이나 베일에 쌓인 오묘한 작가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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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 독서당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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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것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에 이어 세번 째 읽은 것이다.  역시 괴테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문호다.  시대를 불문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단연 괴테, 전혜린이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 다 독일출신(?) 이구나. 

  친화력이라....  제목이 참 깔끔하다.  친화력은 어떤 원자들끼리 결합해서 화합하려는 힘을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인간 사이에서 친화력에 대해 담고 있다.  뭐랄까?  괴테의 글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그런 감정의 묘사에서 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 또한 내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인생의 책(후훗)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비교하자면 감정묘사는 많이 자제된 것 같다.  아, 그러나 나는 부던히도 에드아르트에게서 베르테르를 찾으려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감성적인 글이 었다면 '친화력'은 지성이나 이성에 어필하고 있다.  이 이야기 역시 어긋난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소설이다.  오히려 그보다 훌륭한 사교모임을 통해 인간관계의 이런저런 면모, 관계가 가진 속성, 인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 이 부분들에 펼쳐지는 그들의 대화란 참으로 난해하더소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격정적인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짝사랑하는 숱한 가슴들을 위로했다면 이 이야기는 부부간의 정조와 절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만약 에드아르트의 소망처럼 에드아르트는 오틸리에와, 샬르롯테는 대위와 맺어짐으로 끝이 났다면 어떠했을까?


  결국 오틸리에는 자신의 의지로 아사(餓死)하고 에드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자신의 의지로 뒤따른다.  샬르롯테와 대위의 이야기는 이어짐이 없었지만 대위의 성격 상 샬르롯테를 얼씨구나 취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이야기 역시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결말을 희망차게 묘사하고 있는 마지막 부분은 더한 비극이었다.  아, 그보다 더한 비극은 바로 번역이 너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그것 때문에 줄곧 우울했고 잡생각이라는 삼천포로 나를 한없이 데려가 준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원서를 읽는 듯 까마득함은 무슨 연유인지.  번역의 중요성을 또 한 번, 또 한 번 느낀다.   역시 문학서적 번역은 어학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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