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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 독서당 / 1995년 6월
평점 :
품절
괴테의 것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에 이어 세번 째 읽은 것이다. 역시 괴테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문호다. 시대를 불문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단연 괴테, 전혜린이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 다 독일출신(?) 이구나.
친화력이라.... 제목이 참 깔끔하다. 친화력은 어떤 원자들끼리 결합해서 화합하려는 힘을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인간 사이에서 친화력에 대해 담고 있다. 뭐랄까? 괴테의 글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그런 감정의 묘사에서 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 또한 내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인생의 책(후훗)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비교하자면 감정묘사는 많이 자제된 것 같다. 아, 그러나 나는 부던히도 에드아르트에게서 베르테르를 찾으려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감성적인 글이 었다면 '친화력'은 지성이나 이성에 어필하고 있다. 이 이야기 역시 어긋난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소설이다. 오히려 그보다 훌륭한 사교모임을 통해 인간관계의 이런저런 면모, 관계가 가진 속성, 인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 이 부분들에 펼쳐지는 그들의 대화란 참으로 난해하더소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격정적인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짝사랑하는 숱한 가슴들을 위로했다면 이 이야기는 부부간의 정조와 절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만약 에드아르트의 소망처럼 에드아르트는 오틸리에와, 샬르롯테는 대위와 맺어짐으로 끝이 났다면 어떠했을까?
결국 오틸리에는 자신의 의지로 아사(餓死)하고 에드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자신의 의지로 뒤따른다. 샬르롯테와 대위의 이야기는 이어짐이 없었지만 대위의 성격 상 샬르롯테를 얼씨구나 취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이야기 역시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결말을 희망차게 묘사하고 있는 마지막 부분은 더한 비극이었다. 아, 그보다 더한 비극은 바로 번역이 너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그것 때문에 줄곧 우울했고 잡생각이라는 삼천포로 나를 한없이 데려가 준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원서를 읽는 듯 까마득함은 무슨 연유인지. 번역의 중요성을 또 한 번, 또 한 번 느낀다. 역시 문학서적 번역은 어학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