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 불만족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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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을 보내러 대구에 내려오면서 한 권의 책도 챙기지 못했다.  이유는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동행할 사람이 있어서였고 둘 째는 짐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어서 필요외의 짐은 최대한 줄이기로 했기 때문이고 셋째는 대구 집에도 읽을만한 책이 적잖이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는 책장부터 살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그 때 내 눈에 띈 책 <오체불만족>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에 대해서는 몇 해전 매스컴을 통해서도 익히 들었고 그의 두 번째 저서 <그래도 나는 학교에 간다>는 일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경숙, 공지영 등 내로라 하는 문학가들의 책을 뒤로한 채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하나다.  새해를 앞두고 있는 지금, 나에게 뭔가 긍정적인 힘을 붇돋아 줄 수 있고 삶의 열정을 한 껏 쏟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채 못되어 다 읽었다.  마치 일기와 같은 그의 글은 참 쉽게 읽혔다.  오토다케의 문장은 단정하고 간결했다.  그리고 그가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만의 위트들이 문장 곳곳에 숨어 있었다.  팔, 다리가 없는 장애인인 그의 글을 읽기 전, 나는 한 가지 염려가 앞섰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불치병과 싸우는 어린이들, 거동이 어려운 노인 혹은 장애인들의 생활을 볼 때면 그들이 안타깝고 가여워서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게 되니 말이다.  '이 책 역시 그렇겠지.  이 사람이 안스러워 마음 한 켠이 씁쓸해지겠지?' 

  그러나 나의 염려는 큰 오산이었다.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 밝았으며 희망찼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가 참 부러웠다.  이 무슨 부모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소리냐고.  물론 나는 그의 신체가 부러운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밝고 긍정적인 사고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 환경은 부러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떻게 장애인인 그가 정상인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를 지도한 선생님이나 그의 많은 친구들이 내게는 참 남다르게 비쳐졌다.  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대개 '안타깝다' '가엽다' 정도다.  기껏해야 건강한 자신의 신체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하게 만든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들은 달랐다.  그를 안스럽고 가엽게 여기기 보다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의 입을 빌자면 그는 '초개성'적으로 태어났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장애에 좌절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오토다케를 출산 후 처음 만난 어머니에게서도 초기인적인 힘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지가 하나도 없는 사내아이를 처음 보고 어찌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야' 라고 품에 안을 수 있었을까.  부모님 역시 충격과 가슴아픔은 여느 부모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으로 태어난 아이를 첫대면하는 자리에서 그토록 긍정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부모가 보여준 도전과 용기를 다 들추어 보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그 뿐 아니다.  오토다케를 받아들인 학교와 그 선생님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중증장애인을 담임으로 자청하고 독립심과 자립심을 길러준 선생님, 또 다른 학생들과의 역할 분담을 통해 오토다케만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지원해준 선생님.  그들에게 존경심이 일기가 무섭게 나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과 환경, 그리고 교사들을 과연 이에 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부터가 말이다.  '올 한 해 저 아이때문에 힘들겠구나'를 생각지 않고 그에게 최적의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 더 부지런할 수 있었을까 말이다.  참으로 부끄러워야 할 것이고 참으로 반성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오토다케 히로타다.  그는 장애인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남들과 다를 뿐이다.  장애는 불편할 뿐 불행하지 않다는 말처럼 그는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노력으로 신체의 불편함을 극복했다.  정말이지 이런 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여기며 그것을 해냈는데 '나는 못해' '못하겠어' 하며 포기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인간이라는 것이 노력과 훈련 앞에서 얼마나 단련될 수 있으며 강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오토다케와 같은 많은 장애인들이 이 지구 위에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환경 오염, 후천적 사고 등으로 장애인의 수치가 더 높아지고 있다.  다수를 위해 제작된 모든 것들로부터 외면당하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그들을 그저 운이 나쁜 소수일 뿐이라 치부하며 남일 보듯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을 위한 복지에 좀 더 힘써야 겠으며 장애인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장애를 극복한 한 일본인의 수기를 넘어서 장애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도록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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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지음, 김철 옮김 / 이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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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특별히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더우드씨를 기억하고 있다.  그가 우리나라에 온 의료선교사라는 것.  또 그가 이 나라에 전하러 온 종교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끼친 자이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또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설립하였으며 성서번역에도 기여하였으며 왕실과도 교류하는 등 그의 행보들은 굵직굵직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의 아내 언더우드 여사의 그것이다.  사실 나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업적들이 궁금해 이 책을 집은 것은 아니다.  그의 아내가 썼다는 이 책을 통해 서양인이 바라본 내 조국 한국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선.  학창시절에는 참 많이 듣고 공부했으며 지금은 심심찮게 시대물이나 사극, 또 다큐멘터리 등에서 당대를 엿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나라의 옛 사정을 적잖이 알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과연 그 동안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민비 시해 사건, 갑신정변, 청일전쟁 등 크고 작은 나라의 대소사를 섬세하게 기록한 또 한 권의 역사 교과서였다.  나는 그저 서양인이 바라본 조선은 어떠했을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는데 이 책은 실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파란 눈이 옮겨 놓은 조선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한채 안다고 믿어왔던 역사적인 사건들.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이웃나라와의 관계들....  이 책은 낱낱이 그 때를 옮겨 놓고 있었다.

  '아마 역사에 대해 기술한 책이니 좀 지루할지도' 나의 첫 마음은 이러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하기는 커녕 내 나라 조선의 새로운 이야기들에 깊이 빠져 들었던 것 같다.  당시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듯 생생했다.  내가 보지 못한 내 나라의 모습이 나에게는 생경했다.  마치 아프리카 오지에 구호 활동이나 선교 활동을 나간 자들이 보고 들은 것과 같았다.  미개하고 열악한 삶의 터전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작은 민족들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실지 같은 한국인으로서 선조들의 불결함과 무식함에 대한 언급에서는 슬쩍 속상한 마음이 솟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민족을 사랑의 눈으로 보듬는 그녀와 언더우드 선교사, 또 그 밖에 많은 동지들의 희생과 봉사에 이내 숙연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 전한 것은 종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부색, 머리색, 눈동자 색은 물론 심지어는 언어까지 다른 동양의 한 작은 나라, 그 안에서는 서양을 배척하고 개혁과 개화를 거부하고 오로지 동양적인 것만 추구하려 했던 무리들도 있었고 온갖 미신과 허황된 믿음으로 점철된 민족들의 터전에서 그들이라고 왜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들이라고 왜 고국이 그립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기에 이 나라가 한 걸음이라도 빨리 선진화 되었던 것이 아닐지.  (혹자는 그들이 가져다준 문명을 달갑지 않다 할지도 모르겠다만은.)  삶의 질과 수준 향상은 뒤로 하고라도 그들이 이 나라에서 행한 많은 훌륭한 사역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이 울컥했다.  순간 목구멍이 얼얼해졌다.  그 대목을 잠시 소개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콜레라에 지천에 퍼져 병든 자들을 위해 밤낮없이 뒤치닥거리를 하는 그들을 보고 "저들은 왜 저렇게 우리한테 잘 해주지?" 라는 물음에 다른 한 조선인이 "우리들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야" 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게 아닐까?  서로 대화할 수 없어도 온기가 느껴지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주고 섬겨주는 기운이 이 쪽 가슴에서 저 쪽 가슴에 닿아 전해지는 그것이 아닐까 말이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랑이 아닐ㅋ까?  내 나라 작은 동양의 한 나라, 그렇지만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 사랑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는 후세토록 계속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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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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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나쁜 소년이라.  괜히 센치해지고 싶은 계절,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 읽고 싶었는데.  때마침, 내 눈에 쏙 들어온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의 제목에 이끌렸다.  나쁜 소년 때문이었다.  이 시집이 착하고 다정하게 '착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라며 내게 왔다면 솔직히,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쁜 소년.  그래,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뭐랄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정말 오랫만에 아주 드물게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시집을 만났다.  연거푸 두 번을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글이 너무 좋아서.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 

  바싹 말라 있는 글들.  감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듯한 글들.  하지만 분명 뜨겁고 몰캉몰캉한 심장을 가진 시인이다.  시어가 아닌 시선으로 말하는 시인이다.  그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겠고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것만 같은.  그래서 내가 너를 알겠어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말이나 글로 전해주는 시가 아니라 가슴으로 전해지는 시들이었다.  어쩌면 이 시집을 읽고 쓰는 내 이 글은, 한 편의 모호한 시 같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를 분석하고 그것들을 낱낱이 씹어 삼킨 후 '이 시는 어떤 맛이고 시인이 하고픈 말은 이거였소' 하고 말 할 재량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느낌에 온전히 내게 와서 닿았던 그대로를 말 할 수 밖에 없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사람은 내가 쓰고 싶어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더 쉽게 말해서 그의 글은 딱 내 타입이다.  지나치게 메마르지 않고 그렇다고 지리멸렬하지도 않다.  게다가 독창적인 시선이 담긴 글 말이다.  그리고 또, 억지스럽지 않아야 한다.  (뭐 이리 까탈스러워!!)  그런데 허연의 글이 꼭 그랬다.  지나치게 젠 체 하는 시인들과 그들의 글처럼 독자와 단절을 꾀하고(!) 평론가들에게 사랑받기 위한 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통 현란한 미사여구로 정신을 쏙 빼는 글도 아니었다.  현실적인 일상을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담백하게 옮겨낸 시들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암울하고 가슴 갑갑증을 일게 할 지언정 진솔했다.  그가 시를 쓰지 못했던 이유, 무엇일까?  시만이 길이라 생각하고 쓰는 게 피곤치 않았다던 그가 오랫동안 시를 놓아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언하기는 어렵겠으나 나는 그 이유가 진실하지 못한 시를 써내고 또 그렇게 써 낸 것들을 환대하는 세상을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진실함을 잃게되는 자신이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다.  (모르긴 몰라도 시에 관한 작가의 번뇌를 많이 들여다 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의 글에서 '이 사람 솔직하게 말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이 시들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는지도.

  이 시집에서 나쁜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은 푸른 새벽 가로등 아래서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채 뽀얀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다.  그 소년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골목길을 접어드는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아주길 원하며 그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곳에 서 있다.  허기진 자신과 닮은 고양이가 바스락대며 봉지를 뜯는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쁜 소년은 나쁜 소년이 아니다.  나쁜 소년같이 보일 뿐이다.  푸른빛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절망을 노래하고 있어서.  그렇지만 그는 나쁜 소년이 아니다.   

  이 시집을 딸딸 외고 싶다.  지독하게 질투난다, 이 사람.  속이 메슥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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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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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씨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말에 굉장히 반가웠다.  신경숙씨의 작품으로는 <딸기밭> <외딴방>을 읽어 보았는데 특히 <외딴방>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내가 읽은 신경숙씨의 작품은 가족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표현력이 남다른 작가라는 생각을 갖게한 작가다.  그러던 중 들려온 신간소식.  이번에는 엄마가 화두다.  가족 특히나 '엄마'를 화두로 삼는 작가는 많았다.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는 전경린씨의 <엄마의 집>도 그랬다.  이 책은 과연 어떨까?  신경숙씨의 엄마는 어떨까 궁금했다. 

  어? 오타 아냐? 나가 아니고 '너'라니.  어어?  오타 아닌가 보네.  '나'라는 글자가 있어야 할 곳에 죄다 '너'라는 글자가 있다.  아니 너라는 글자가 있는 곳을 나로 바꿔 읽는 것이 편했다.  어찌보면 이 글은 이인칭주인공시점이다.  '왜 이렇게 쓴거지? 신경숙씨는 독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하며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을까?'  그러나 이것은 1장의 이야기였다.  2장은 아들, 3장은 남매의 아버지이자 잃어버린 엄마의 남편이, 4장은 남매의 어머니이자 남편의 아내가, 마무리는 다시 딸이.  이렇게 각 장마다 화자가 달랐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달랐으나 이야기를 하는 자를 명확히 서술해 두었기 때문인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신경숙씨가 의도적으로 소설 속 주인공에 국한 된 '나'가 아니라 독자의 엄마를 연상하며 읽어주기를 바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는 소설 속의 엄마처럼 읽어버린 엄마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여자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 발은 파란 슬리퍼를 신은 여자의 것과 같이 생겼고 그 마음은 잃어버린 그녀와 같은 나의 그녀.  그것이 나의 엄마다.  엄마는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하며 우리 삼남매의 엄마이기도 하다.  참 많은 이름을 갖고 사는 여자다.  그러나 참 자신을 잃고 사는 여자다.  마치 그것을 당연하게 치부해 온 우리는 그 여자의 삶을, 인생을 송투리째 약탈한 것은 아닐지.  무슨 어린시절 반성문을 쓰고 싶은 것은 아니겠으나, 나는 참 많이 반성했다.  한 마디도 그녀에게 다정하지 못했음을.  그런데 나는 방금 전도 그랬다.  "잘 지내냐?"는 그녀의 전화도 "책 읽고 글쓰고 있어요.  지금 해야 하는데....  내일이나 제가 전화할께요" 하며 끊어버렸다.  이렇듯 무의식 중에 그녀를 나중으로 미루어 온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녀는 정말 잃어버린 것일까?  경찰서를 찾아가 마을 이름만 이야기 해도 서울 아들네 집은 아니더라도 고향으로 되돌려질 수는 있을텐데.  어쩌면 그녀는 그녀 스스로 가족에게서 멀어진 것은 아닐지.  특히 4장을 보면 엄마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자식과 남편을 바라본다.  어쩌면 잃어버린 직 후 죽었을지도.  어찌 죽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직감한 그녀가 스스로 남편을 놓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애가 탔다.  찾기를 찾기를....  찾아야 할텐데.  그러나 그녀는 잃어버렸다.  그러나 어디서든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 파란 슬리퍼의 여자는 내 안에도 살고 당신 안에도 살고 있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또 다시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돌아보자.  그녀가 나를 쫓아 오고 있는지를.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내 갈 길만 가고 있는게 아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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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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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사라>로 외설시비를 일으켰던 마광수 교수의 <발랄한 라라>  19금 딱지를 버젓이 붙이고 비닐포장된 채로 날아온 녀석답게 불량스럽다.  그런데 나는 분명 19금인줄 알고 있었던 이 책을 왜 들었을까?  제 아무리 19금이라 할지라도 이 곳 저 곳 떠도는 그 어떤 야설과는 분명 다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작품의 외설이니 예술이니를 논하기 전에 '마광수'라는 인간이 궁금해서 집어든 책이다.  <즐거운 사라>에 뒤이은 <발랄한 라라>라면 라라는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멍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약간의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런데 이것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발랄한 라라>는 볼 것없는 쓰레기라 치부하기에는 살짝 아쉽고 그렇다고 수작이라며 손가락을 세우는 것은 미친 짓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몇 작품은 아주 좋았고 몇 작품은 쓰레기통에 넣기도 아깝다.  (※ 경고 - 우리의 통기레쓰님께서 갑자기 구토와 복통을 호소할 수도 있음) 

  누군가가 하지 않은 시도.  아니 그것이 도전이라 여길 수 없을만치 일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가며 책을 펴냈을 그의 뚝심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군가가 딛지 못한 대륙을 소개했다고, 아니 조그마한 배를 타고 겨우 몇몇이 오가는 이름없는 섬을 소개했다고 그를 훌륭하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것이라는 모르겠지만 그 섬에 다녀온 자들이 모두 절름발이가 되고 마는 그런 섬이라면 오히려 영영히 묻어두고 꺼내지 말아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너무 적나라하다.  퇴폐적이고 변태적이다.  도덕과 윤리 조차 찾을 수 없는 작품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쾌락만을 담은 이것을 과연 우리는 두 눈을 뜨고 보아야 할지 궁금하다.  이 책을 보면 섹스는 모든 것을 구원하고 마광수 교수 그 자신은 교주나 다름없이 그리고 있다.  진리(?)를 모르는 자를 향한 측은지심의 시선이 너무나도 고스란히 담겼기에 불쾌했고 그의 오만함에 짜증이 일었다.  30센티가 넘는 손톱에 흥분하다니 가히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분명 성도착증의 하나일 뿐인 것들을 마치 대단한 것을 설파하는 양 하는 그의 태도는 참으로 아연실색할 만하다.  더군다나 그의 작품은 문학적인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저속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과 표현은 인터넷에 떠도는 무명씨의 야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친구를 보면 그를 안다고 '사라'는 보지 않아도 '라라'를 보니 알 것 같다.  왜 그 소설이 외설시비가 일었는지를 말이다.  그나저나 쇠약한 단발머리 아저씨, 한 마디만 할께요.  뭐요?  보들레르가 뭐, 포우가 어쨌다구요?  슬쩍 한 묶음에 묶여보겠다는 심산이라면 그것만큼은 그만 두세요!  그냥 당신의 사라와 즐겁게, 발랄한 라라와 행복하게 사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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