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사라>로 외설시비를 일으켰던 마광수 교수의 <발랄한 라라> 19금 딱지를 버젓이 붙이고 비닐포장된 채로 날아온 녀석답게 불량스럽다. 그런데 나는 분명 19금인줄 알고 있었던 이 책을 왜 들었을까? 제 아무리 19금이라 할지라도 이 곳 저 곳 떠도는 그 어떤 야설과는 분명 다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작품의 외설이니 예술이니를 논하기 전에 '마광수'라는 인간이 궁금해서 집어든 책이다. <즐거운 사라>에 뒤이은 <발랄한 라라>라면 라라는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멍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약간의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런데 이것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발랄한 라라>는 볼 것없는 쓰레기라 치부하기에는 살짝 아쉽고 그렇다고 수작이라며 손가락을 세우는 것은 미친 짓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몇 작품은 아주 좋았고 몇 작품은 쓰레기통에 넣기도 아깝다. (※ 경고 - 우리의 통기레쓰님께서 갑자기 구토와 복통을 호소할 수도 있음) 누군가가 하지 않은 시도. 아니 그것이 도전이라 여길 수 없을만치 일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가며 책을 펴냈을 그의 뚝심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군가가 딛지 못한 대륙을 소개했다고, 아니 조그마한 배를 타고 겨우 몇몇이 오가는 이름없는 섬을 소개했다고 그를 훌륭하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것이라는 모르겠지만 그 섬에 다녀온 자들이 모두 절름발이가 되고 마는 그런 섬이라면 오히려 영영히 묻어두고 꺼내지 말아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너무 적나라하다. 퇴폐적이고 변태적이다. 도덕과 윤리 조차 찾을 수 없는 작품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쾌락만을 담은 이것을 과연 우리는 두 눈을 뜨고 보아야 할지 궁금하다. 이 책을 보면 섹스는 모든 것을 구원하고 마광수 교수 그 자신은 교주나 다름없이 그리고 있다. 진리(?)를 모르는 자를 향한 측은지심의 시선이 너무나도 고스란히 담겼기에 불쾌했고 그의 오만함에 짜증이 일었다. 30센티가 넘는 손톱에 흥분하다니 가히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분명 성도착증의 하나일 뿐인 것들을 마치 대단한 것을 설파하는 양 하는 그의 태도는 참으로 아연실색할 만하다. 더군다나 그의 작품은 문학적인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저속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과 표현은 인터넷에 떠도는 무명씨의 야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친구를 보면 그를 안다고 '사라'는 보지 않아도 '라라'를 보니 알 것 같다. 왜 그 소설이 외설시비가 일었는지를 말이다. 그나저나 쇠약한 단발머리 아저씨, 한 마디만 할께요. 뭐요? 보들레르가 뭐, 포우가 어쨌다구요? 슬쩍 한 묶음에 묶여보겠다는 심산이라면 그것만큼은 그만 두세요! 그냥 당신의 사라와 즐겁게, 발랄한 라라와 행복하게 사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