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씨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말에 굉장히 반가웠다. 신경숙씨의 작품으로는 <딸기밭> <외딴방>을 읽어 보았는데 특히 <외딴방>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내가 읽은 신경숙씨의 작품은 가족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표현력이 남다른 작가라는 생각을 갖게한 작가다. 그러던 중 들려온 신간소식. 이번에는 엄마가 화두다. 가족 특히나 '엄마'를 화두로 삼는 작가는 많았다.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는 전경린씨의 <엄마의 집>도 그랬다. 이 책은 과연 어떨까? 신경숙씨의 엄마는 어떨까 궁금했다. 어? 오타 아냐? 나가 아니고 '너'라니. 어어? 오타 아닌가 보네. '나'라는 글자가 있어야 할 곳에 죄다 '너'라는 글자가 있다. 아니 너라는 글자가 있는 곳을 나로 바꿔 읽는 것이 편했다. 어찌보면 이 글은 이인칭주인공시점이다. '왜 이렇게 쓴거지? 신경숙씨는 독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하며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을까?' 그러나 이것은 1장의 이야기였다. 2장은 아들, 3장은 남매의 아버지이자 잃어버린 엄마의 남편이, 4장은 남매의 어머니이자 남편의 아내가, 마무리는 다시 딸이. 이렇게 각 장마다 화자가 달랐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달랐으나 이야기를 하는 자를 명확히 서술해 두었기 때문인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신경숙씨가 의도적으로 소설 속 주인공에 국한 된 '나'가 아니라 독자의 엄마를 연상하며 읽어주기를 바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는 소설 속의 엄마처럼 읽어버린 엄마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여자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 발은 파란 슬리퍼를 신은 여자의 것과 같이 생겼고 그 마음은 잃어버린 그녀와 같은 나의 그녀. 그것이 나의 엄마다. 엄마는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하며 우리 삼남매의 엄마이기도 하다. 참 많은 이름을 갖고 사는 여자다. 그러나 참 자신을 잃고 사는 여자다. 마치 그것을 당연하게 치부해 온 우리는 그 여자의 삶을, 인생을 송투리째 약탈한 것은 아닐지. 무슨 어린시절 반성문을 쓰고 싶은 것은 아니겠으나, 나는 참 많이 반성했다. 한 마디도 그녀에게 다정하지 못했음을. 그런데 나는 방금 전도 그랬다. "잘 지내냐?"는 그녀의 전화도 "책 읽고 글쓰고 있어요. 지금 해야 하는데.... 내일이나 제가 전화할께요" 하며 끊어버렸다. 이렇듯 무의식 중에 그녀를 나중으로 미루어 온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녀는 정말 잃어버린 것일까? 경찰서를 찾아가 마을 이름만 이야기 해도 서울 아들네 집은 아니더라도 고향으로 되돌려질 수는 있을텐데. 어쩌면 그녀는 그녀 스스로 가족에게서 멀어진 것은 아닐지. 특히 4장을 보면 엄마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자식과 남편을 바라본다. 어쩌면 잃어버린 직 후 죽었을지도. 어찌 죽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직감한 그녀가 스스로 남편을 놓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애가 탔다. 찾기를 찾기를.... 찾아야 할텐데. 그러나 그녀는 잃어버렸다. 그러나 어디서든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 파란 슬리퍼의 여자는 내 안에도 살고 당신 안에도 살고 있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또 다시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돌아보자. 그녀가 나를 쫓아 오고 있는지를.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내 갈 길만 가고 있는게 아닌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