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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안중식 옮김 / 지식여행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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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보다는 영화를 봤었다.  그것도 우연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 날 함께 영화를 보러 간 대다수가 이걸 보자고 해서 봤던 영화.  영화도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틀림없이 졸거나 잔 일은 없는데 이렇게 기억이 안날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의 느낌은 '별루다' 'OST가 좋구나' 정도?  그런데 그렇게도 별 감동이 없는 이 작품을 다시 책으로 본데는 이유가 있다.   얼마전 <만약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이라는 책을 참 인상깊게 읽었다.  근데 그 작가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책이 바로 이 책이란다.  내가 감동적으로 보았던 <만약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을 쓴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역시 사랑이야기는....  더더군다나 이런 사랑이야기는 너무 진부하다. 

  이 작가의 이 책을 <만약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보다 먼저 읽었다면....  아마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책을 나중 읽었음은 참 다행이다.  쉽게 말해서 이 책은 역시 영화를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별로.  그러나 단 두 작품으로 작가에 대해 판단하기는 섣부른 것 같다.  아무튼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더 보고 싶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일본 소설 특유의 간결함과 명쾌함으로는 후자쪽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섬세하고 정교한 글은 전자다.  무엇보다 <만약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에서 이 작가의 표현력이 마음에 들었는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같은 작가의 글이라 느껴지리 않으리만치 느낌이 달랐다.

  읽은 책과는 직접적이지 않은 이야기지만, 나는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별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없고 '로맨스소설' 이나 '로맨스영화' 에 재미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유일무이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야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물론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도 베르테르와 로테의 어긋난 사랑보다는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 부분, 그리고 괴테의 섬세한 감성적인 또는 격한 감정의 표현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여간해서는 사랑이야기에 감동하지 않는 스타일인지 사랑이 전부인 이 소설은 역시 나에게 잘 맞지 않았다.  더 이상한 것은(정말 이상하다) 내가 본 영화의 원작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생소하다는 것이었다.  음....  이상한 일인데 정말 내가 그 영화를 제대로 보기나 한 것이 맞는지 영화를 다시 보고픈 생각도 든다.  만약 영화까지 다시 본다면, 아주 우스운 일이다.  별 감동도 없던 이야기를 책으로 한 번, 영화로 두번 씩 보게되는 기이한 일을 벌이게 되는 셈이다.  물론 영화는 다시 보지 않겠다. ^^;;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아키가 죽은 후 사쿠라타와 그의 할아버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다.  죽음이란 정말 무엇일까?  사쿠라타는 죽음 역시 이미 죽어버린 이에게는 무의미한 것이고 '끝' 이지만 살아서 남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사후세계니 천국이니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죽은 이에게 죽음이 마지막인지 아니면 소위 말하는 영생의 입문인지는....  죽어봐야 아는 수밖에.  그렇다고 죽어보고 그것을 증명하고픈 생각은, 지금은 없다!  만약 어느 순간 내가 죽게 된다면 이승으로 돌아와 집을 잃은 영혼의 귀로는 소멸인지 불멸인지에 대해 전하리라.  어떤 방법으로?  차차 생각해보아야지.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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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
김미진 지음 / 민음사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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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참 읽고 싶던 책이었다.  근데 이제서야 읽게 됐네.  참 오래도 걸렸다.  이런걸 보면 그 많은 읽고 싶은 책들 중 실지 내가 읽는 책은 얼마나 될까?  책을 보면 '읽고싶은 책일세' 하다가 정작 내 눈 앞에 그 책이 사라지게 되면 또 잊었다가 다시 눈에 띄게되면 '아!  이 책 읽고 싶어했었지?' 하고 다시 읽을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다 상황과 여건이 잘 맞아 그 책을 내 수중에 넣게 되면 읽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읽고싶은 책' 으로 남게 된다.  결국 이 책도 '아,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책이지?' 하며 번뜩하는 생각과 함께 헌책방에서 데려온 책이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절대적으로 절실하지 않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 책을 보고 싶다는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이 책은 읽고 싶은 책이었다.   

  김미진씨가 이 책으로 무슨 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혼동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소설책이지만 예술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소신있게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책의 표제에 '모짜르트' 라는 음악가의 이름이 거론되어 이 책이 음악과 관련된 책이 아닐까 할 수도 있는데, 정작 모짜르트는 찾아보기 힘든 책이다.  그런데 굳이 모짜르트라는 음악가를 지칭하여 제목을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용을 함축하고 정확히 꼬집은 제목이 아니라면 뭔가 상징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 도 '브람스'도 '바하' 도 아닌 왜 모짜르트일까?  뭐 이렇게 말하니 모짜르트의 이름이 사용된 것에 불만이 있다는 늬앙스네.  그런 것은 아니고. ^^  왜 하고많은 음악가 중에 모짜르트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자, 계속 한 번 고민해보자.  이 책은 음악보다는 오히려 그림을 이야기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도 대개 화가거나 미대생들이다.  그렇다면 '고호가 살아있다면' '다빈치가 살아있다면' 뭐 이럴법한 제목이 왜 굳이 모짜르트냔 말이다.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하지 않을까?  이 역시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격이 되는 것일까?  적어도 난 뭔가가 놓여진 상황에 대해 '이게 여기 놓여 있구나' 가 아니가 '이게 왜 여기 놓여있을까?' 를 고민하는 쪽이다.  내 성향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미술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그림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다.  실제 이 책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많은 사람들(쌍, 글라스, 지후, 지니, R등....)이 등장하고 그리고 소설쓰기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류 또한 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문학과 미술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작가의 소신을 피력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완전한 예술을 총망라 했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렇다.  음악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음악적인 요소를 접목시키기 위해 표제를 이렇게 정한 것이 아닐까?  뭐 음악가의 이름을 빌어 쓴 것이야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게 된다.  왜 모짜르트일까?  하필이면.    이건 필시 모짜르트 라는 음악가의 성향이나 일생에 뭔가 다른 음악가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될--그가 아니면 안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무엇보다 자명한 것은 모짜르트는 음악의 신동으로 인정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두가 그림에 대해 그리고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번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천재적인 음악가의 대명사인 모짜르트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붓질 한 번에 작품 하나에 울기도 웃기도 하는 자들에게 뭔가 해답을 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암호가 아닐까?

  소설 속 윤이 한 이야기가 있다.  20년 평생을 쓴 작품은 불과 몇 시간만에 읽고 이것을 먹었노라 뿌듯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의 그런 예측이 불가능하며 끝까지 공을 들여 읽지 않고는 안되도록 하는 소설을 쓰겠다는 윤.  이는 작가 김미진이 윤의 입을 빌어 한 말이 아니었을까?  두어번 정도 예술가의 결과물을 너무나도 쉽게 날로 먹으려 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누구도 이견이 없을 만한 천재적인 음악가가 살아있다면 예술에 대한 분분한 의견과 입장들, 그 속에 만연한 혼란함을 잠식시키고 무언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겠느냐는 뜻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생각기에는 모짜르트가 바로 그에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짜르트가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안타까울 동시에 영원히 예술에 대해서 끊이지 않는 고민을 해야한다 뭐 이런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서로 만나는 이 소설처럼.  영원히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뜻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우리에게 예술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줄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험난하고 머나먼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또 이 책은 점, 선, 면, 보이지 않는 풍경.  이렇게 4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 2부, 3부를 유심히 보자.  1부 '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대화가 "(따옴표) 안에 들어있다.  그리고 2부 선에서는 -----(선)으로 대화를 표시했으며 3부 면에서는 『 로 대화를 표시하고 있다.  따옴표는 일종의 점으로 보고 『 이 기호를 영역을 지정해주는 기호로 이해한다면 면을 상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윤의 입을 빌어 말한 작가의 암호가 아닐까?  그리고 윤은 또 그렇게 말했다.  각 독자의 지적수준 정도에 따라 달리 읽혀지고 의미 파악도 다를 수 있는 소설을 쓰겠으며 그런 방법으로 하나가 군데 군데 암호를 넣는 것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독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지는 소설을 쓰겠다는 말이다.  그것은 김미진씨가 글쓰기에 있어 지향하는 바일터인데 그것이 이 소설로 인해 이루어졌다 할 수 있을지 여전히 그런 글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일지는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참 무거운 소재 (소위 말하는 예술, 예술가) 를 김미진씨의 경쾌한 입담으로 하여 독자에게 아주 성큼 가깝게 다가와 앉는다는 것이다.  독자는 그런 소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거나 경계할 겨를도 없이 작가의 날렵하고 신세대적 필치에 의식의 자리를 내줘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쉽게 화두를 들고 와서는 그것을 대놓고 함께 고민하자고 말한다.  돈이 가득든 가방의 행방에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라고 대놓고 의문을 던지고 독자는 자기 나름의 가치와 잿대로 그 가방에 비할 무언가를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 감각적인 언어의 재미를 느끼며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던 책인데 역시 읽은 후 뭔가 여운과 고민을 남겨주는 가볍지 않은 책임에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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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 - 신화 속에서 찾은 24가지 사랑 이야기
최복현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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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따온 스물 다섯가지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읽은게 중학교때였는데 나는 그것을 읽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같은 기분으로 읽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숙제가 되었던 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중학교때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물론 여러번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그 때 당시 나의 절친한 친구의 (가까스로 그녀를 동경하기까지 이르렀다.) 영향이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2가지였다.  첫째, 그 당시 읽었던 많은 책들 중에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이나 그들의 일화에 빗댄 대목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수선화의 유래가 된 나르키소스에 관한 언급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럴 때 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야 겠어'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던 것이다.  두번째, 앞서 말한 나의 친구, 그녀가 어느날 받는이의 란에 '아프로디테' 라고 적힌 편지를 내게 건냈다.  물론 보낸이의 란에는 '헤라'라고 쓰여진.  아프로디테와 헤라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를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 부른 그녀의 우정에 적절하게 반응하므로 그녀의 문학적 감각(내지는 수준)에 발맞추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해서 처음 읽게 되었다.  인간을 닮은 신들의 이야기.  사랑, 죽음, 복수, 분노....  이 책은 그런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사랑이야기만 모은 25가지 이야기다.  저자의 생각이 적절히 가미되긴 하였지만 순수한 창작물이라 볼 순 없기에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을 씹어도 짬조름한 맛을 내는 한 조각의 육포를 씹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우스개 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신의 경지에 이르렀어' '신에게 도전장을 내야겠어' 등등.  높은 수준 혹은 그것에 상응할 만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신의 수준에 도전하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사랑에 만큼은 예외가 아닐까?  신이나 인간이나 사랑앞에서는 매한가지였다.  똑같이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고 불같이 타오르는 마음을 가졌다가도 이내 식고 복수하고 분노하는.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영역이 바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신화에서도 인간과 신의 사랑에 관해서도 여러 편 볼 수가 있었는데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만물이 소통 가능한 언어일지도. 

  그리고 신화의 매력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자연의 신비로움과 그 시초에 사연을 담았다는 점이다.  이는 바람, 풀, 새, 꽃....  어느 하나를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자연의 고귀함과 신비로움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그 또한 억지스럽지 않고 '실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묘하다.

  끝으로, 스물 다섯가지의 사랑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이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사랑이야기였다.  이런 진부한 스토리의 순애보적 사랑이야기는 개성이 없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말로 비통함의 극치고 애절함 끝에 애잔함을 남기는 것 같다.  오늘도 그 어딘가에서 에로스의 황금화살과 납화살에 맞아 가슴앓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그러나 에로스의 화살이 운명의 화살이라고는 믿지 말자.  나는 에로스의 황금화살을 맞은 것일까 납화살을 맞은 것일까?  납화살을 맞은 가슴이랄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여전히 뜨거운 심장을 지킨다면 아마 신들도 그 심장에 감동하지 않을까?  그대의 눈물겨운 사랑에 감동한 나머지 가슴에 박힌 납화살을 어느새 뽑아버리고 황금화살을 바꾸어 꽂아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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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현대문학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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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는 은희경의 4번째 소설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마이너리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그리고 이 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  이 책은 헌책방에서 데려온 책인데 몇 쇄 찍어냈는지 표지가 3가지 종류가 있다.  이것은 그 첫 번째.  요즘 은희경이라는 작가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은희경스럽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이 그다운 것인지....  그녀에 글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그가 주로 이야기로 다루는 소재와 같이 모호하다.  <마이너리그>를 제외하면 내가 읽은 세 편은 모두 꿈같은 이야기였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들....  가만, 그런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이 편 아니면 저 편에 굳이 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겠다.  엄밀히 하자면, 현실과 비현실의 그 중간쯤, 그 둘이 살짝 포개진 교집합 영역에 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은희경의 문체는 매끄럽다.  이게 바로 그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거추장스럽지 않고 간결하고 단정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미건조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 여인으로 표현해 보자면 쪽진 머리의 단아한 여인이다.  그래.  겨우 네 작품 뿐이었지만(누군가를 알아가기에 4번의 데이트라면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상대에 대해 어느정도 감은 잡을만한 횟수일 듯 싶다) 그녀의 글은 매력적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글을 더 읽고 싶어진다.  이는 그녀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은희경의 글에 좀 더 다가가고 싶어서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은희경의 소설은 비현실적이면서 꿈과 같은 모호하며 몽환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접해본 바로는.  그런데 이것이 은희경 다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런 성격의 작품들만 읽은 것인지 좀 더 앍고 싶다는 얘기다.  은희경의 글들을 더 읽어 볼테야.

  이 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는 정말 절묘하고 기가 막힌 제목이다.  이 책을 덥자마자 나는 '이게 모두 꿈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준과 진이 나흘간 머물렀던 레인캐슬은 이미 준의 꿈 속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준은 실레의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야기에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그녀 마리아(혹은 미리암)는 실레가 그려낸 여인과 정확히 일치한다.  노란 빛의 길지 않은 머리칼에 푸른색 소매가 없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  이것은 준이 실레에 그림에 심취한 나머지 꿈에서 볼 수 있었던 환영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너무나도 꿈같아서 뭔가 시원찮은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작가만이 아는 일.  그렇지 않다면 독자의 확신만이 줄거리가 될 뿐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장자()의 '호접지몽' 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그 일화를 잠시 소개하자면 꿈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나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원래 자신은 나비인데 사람이 된 꿈을 꾸고있는 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교과서를 놓고 배운 것이었는지, 무언가를 읽음으로 알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그 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의 내가 실상이고 꿈 속의 내가 허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을까?  꿈은 과연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욕구불만 혹은 소망충족의 수단이며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했다.   

  중학교 시절 친구의 이야기인데 그는 늘 같은 꿈을 꾼다고 했다.  꿈 속에 한결같이 한 남자가 등장하고 처음 그 남자를 보았을 때는 두렵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 남자의 얼굴까지 기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현실공간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꿈에서만 존재하는 남자와 시종일관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이야기 만들기를 즐겨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지금에야 이 꿈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물론 이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 꿈의 진위여부부터 가려야겠지만.  (아, 꿈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어.  글을 쓰기전 머릿 속으로 한 번 정리를 하고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가 있겠다.)

  음....  꿈이란 현실의 쉼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나는 악몽때문에 미칠지경이라구요.  이게 쉼이라구요?'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의학이 발달해 우리네 수명은 백세는 넘긴다긴 하지만) 인간의 심심하고 무료한 삶 속에서 마치 로봇이 변신을 하듯 무한히 열려진 공간을 허락하기 위한 인간에 대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본디 희망에 차있고 환상적인 것이다.  그처럼 우리는 꿈이라는 몽유를 통해 현실에서 얻거나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쉽사리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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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빠상 괴기소설 광인
모빠상 지음 / 장원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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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비계덩어리> 로 유명한 모파상의 단편 괴기소설 모읍집이다.  그동안 미발표된 작품으로 국내 최초 소개란다.  이 책은 헌책방에서 질러온 책인데 완전 보물 낚은 기분이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해지는 책이다.  먼저 이 책의 표제를 살펴보면 2가지 뜻을 담고 있다.  첫번째, 모파상은 괴기소설의 광인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파상의 괴기소설집.  타이틀은 광인? 이다.  이 책에 실린 그의 25편의 괴기소설(?) 중 한 편의 제목이 바로 '광인?' 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25편의 제목을 한 번 짚어보자.

  제목이라는 것은 대개 그 글과 개연성이 있게 마련이다.  <박제된 손> <고인> <괴물들의 어머니> <머리카락> <몽 ›?미쉘의 전설> <유령> <손> <물 위에서> <최면술> <공포> <늑대> <크리스마스 이야기> <시체 곁에서> <그 사람?> <광인?> <매물> <미지의 여인> <어떤 이혼의 경우> <산장> <오를라(제 1판)> <오를라(제 2판> <에르메 부인> <수면의자> <누가 알아?>  이렇게 25편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오싹 오싹 공포체험' 같은 책이나 이상한 렌즈의 종이 안경을 쓰고 보면 책 속 사진들이 마치 입체와 같이 느껴지는 무서운 이야기들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가만 생각하니 심취라고까지 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까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걸로 보면 나에게는 공포는 무척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글은 뭐랄까?  공포스럽다니 보니는 신비한 이야기들이었다.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힘, 그리고 외로움, 강박을 다룬 이야기들이다.  단순히 등골 오싹한 한기를 느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권선징악과 보복으로 난무한 귀신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다.  오히려 무섭기로는 어린시절 읽었던 귀신이야기들이 몇 배나 더 무섭다.  이 책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공포' 라는 두려움을 현상과 상태를 여러 이야기들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원혼이라던가 귀신이 나타나 해꼬지를 하기에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과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 심리에 대해 잘 쓰여져 있다.   깔끔하고 단조로우면서도 강렬한 심리묘사.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발표시기순으로 되어있는데 조기 작품이 원초적인 공포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후기 작품들로 갈 수록 환상적이고 초자연적이다. 

   정신병적인 기이한 강박에 가까운 25편의 공포 이야기들.  이 소설을 읽고 그의 약력을 살펴보던 중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었다.  모파상의 동생은 정신병으로 죽었고 모파상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으며 정신착란증세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단다.  그것도 1월 1일 정초에.  결국 그는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모파상의 괴기소설은 단순히 상상력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그의 병적인 현상이 작용한 글이리라.  이 책은 쉽게 말해 기이한 현상과 공포라는 이름에 담겨진 사회적 금기 사항과 윤리의 위선에 대한 비웃음이다.  물론 이 소설의 특성상 줄거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누군가가 이 책을 짚어들고 내 후기를 읽게되는 거의 희박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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