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그간 나왔던 것처럼 순도 100% 막장이 아니다. 그는 직업도 있고, 그럭저럭 메이저한 체제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스트레스 때문에 폭주를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놓아버릴 정도로 막 나가진 않으며 소박한 망상으로 자위를 할 줄도 아는 본능적인 자기제어장치가 작동하는 인간이다. 한마디로 찌질도가 기존의 캐릭터들에 비해 약간 하락한 주인공.

덕분에 되려 질릴 정도로, 계급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퍼센티지의 공감대를 획득할 현실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잘 생각해보면 이곳저곳에서 반복되어 왔던 키워드들인데 여기에 오니까 더 짜증나게 보이는 건 확실히 능력은 능력. 어딘가에 메여서 돈 벌어먹고 사는 숫컷의 입장에서 이번 편을 본다면 정말 극단적으로 사는 것 자체가 싫어지게 만들 것임. 자살 충동 방지용으로서의 샐러리맨들의 금서 목록. 아니, 그러니까 좋은 작품인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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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8-05-25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좋은거죠. 군인한테도 ㅎ

hallonin 2008-05-2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바린 그래도 해방 개념이 있잖습니까 헐헐
 

 

품절과 재입고를 반복중인 두툼한 가격을 자랑하는 마의 플라스틱 덩어리. 현재 소니BMG의 심심치 않은 돈줄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고 있는 듯. 박스 크기는 13.5*12*13cm(가로*세로*높이)로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다. 내용물을 보면 각 케이스는 종이 케이스로 개별적인 부클릿은 없으며, 하나 들어있는 부클릿은 도이치 하르모니아 문디의 역사를 다룬 총론과 한면에 텍스트가 다 안 들어가는 앨범 여섯 장의 간략한 정보가 따로 인쇄된 한 권으로, 전반적으로 경량화 작업이 이뤄졌음. 8만원대에 50장이니까 대강 계산하면 장당 1600원쯤 주고 르네상스-바로크 음악을 질릴 정도로 들을 수 있다는 솔깃한 메리트와 확실한 통장 빵꾸가 기다리고 있음. 프랑스 하르모니아 문디 50주년 앨범을 요즘은 웃돈 줘야 구할 수 있게 된 걸 선례로 삼자면 이것도 노려봐야 하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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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20대 '광장세대'는 어디로 갔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8356.html

 

그렇게 실감하진 못했는데, 암튼 10대랑 비교 되가면서 무기력과 반동 보수주의의 상징으로써 열심히 까이고 있네요. 뭐 별로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깔려면 까세요. 요즘 20대 병신 같은 거 사실이니까. 그런데 그네들도 제법 알긴 압니다 자기들이 병신이란 걸. 뭐 난 이미 20대 탈출 시점이기도 하고.... 더 문제네. 적어도 내 경우에 이런 류의 20대 비판이 여직껏 피부에 와닿지 않았던 건 한겨레나 경향 읽고 소위 386적인 왜곡에 분노할 시간에 조선 동아 읽으면서 낄낄대고 까대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변명할 건덕지가 없는 마인드 막장인 게 생활이 되서가 아닐까 싶음.

그런데 과연 20대라는 것, 그리고 광장세대라는 것의 실체는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운동권적인 편의,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이제는 사회 중심부의 준거점세력으로 자리 잡은 이들의 기준에 맞춰서 가상적으로 책정된 반동세력이 아닐까요.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저기서 그렇게도 가능성이고 미래로 얘기되는 실제로 준동하는 10대의 실체수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전체의 10대에 비추어 얼마나 될지. 그것은 월드컵 때의 들끓었던 민족주의를 가리켜 편의에 맞춰 선한 민족주의라고 표현했던 것과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현재의 20대 전반이 가지고 있는 현실정치에 대한 피로감은 분명합니다. 분명 그들은 십여 년에 걸친 시간동안 정치적 주체가 되어 바꿀려고 했고 바꿨다고 믿었지만 한결 같이 배신 당했으니까요. 경제적으로 보자면 벼락치기로 대량생산된 카드 문화를 통해서 소비세대의 정점에 쉬이 도달했지만 그만큼 쏟아지는 파산 선고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은 세대입니다. 스타크와 리니지로 소통이 가능한 세대이며, 영어에 대한 강박증과 자격증 신드롬에 뒤늦은 몸을 실고 뒷세대와 경쟁해야 하는 세대기도 하구요. 후자쪽의 강박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지만, 이후의 세대들은 그것을 훨씬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세대들일 겁니다. 그러니까 20대는 일종의 격한 마인드적 졸부이즘을 세차게 겪은 거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를 어떤 동일한 패턴 속에 몰아넣는 것은 여전히 위험해 보입니다. 20대의 정치피로감은 세대의 공통분모로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보다 인간 근본적인 계몽, 혹은 각성의 문제라고 보이거든요. 이제 와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같은 일이 계몽의 성과라고 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각성이라기보다는 단지 가능성의 표출이었고, 결과적으론 그 표층화된 가능성 이상을 보여주진 못했습니다. 

보다 원초적인 치기라고 하는 것이, 진중한 결론에 도달하는 걸 방해합니다. 그것을 젊음이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것은 단순히 세대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문제입니다.

10대로 얘기를 돌리자면, 저야 설렁설렁 되는둥 마는둥 살아온 인간이지만, 교육적 제도적 차원에서 10대들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구조적 피로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반복되어 지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어떤 준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지속적인 정치적 의지에의 각성으로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좀 회의적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엔 지금의 아이들은 소비적 쾌락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경제'가 본격적으로 끼어드는 순간 어떤 현상들이 벌어질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준동에 의한 변혁은 작용반작용의 반복인 변증법적 역사를 고착시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익숙해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마땅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

여기서 '익숙해짐'이란 체제에의 편입이란 측면으로 봐서도 해당되거니와, 적절하게 사회적 타협을 이뤄낸 유사준동에 대한 익숙해짐 또한 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스템은 점점 강화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협상 테이블 위에서의 경제법칙에 의거해서 얼마나 기민하느냐에 따라 결정지어지리라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이것이 보수 반동의 마인드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아주 느리고 점진적인 차원에서의 계몽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계몽이란 표현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이것은 미묘한 마조히즘적 감각이 곰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지속성이 동반되어야 하는 길고 긴 수난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옛 현인의 말을 빌리자면, 한마디로 수도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처세, 인 거겠죠. 심지어 마더어스를 위해서도 말입니다. 치사하긴 하지만 이것은 무기력하게도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차이, 정도차라는 범주의 운용이 보장해야 할 탄력성은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농담 또한 중요해지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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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8-05-2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신입사원은 들어올 때 토익 800이 넘지만 그 위에 계신 관리자 분은 700만 넘으면 승진에 하자 없음. 하지만 이 체제는 흔들리지 않았죠. 반면에 다가오는 10대들은 중, 고딩 때 토익 만점자 속출. 저는 20대가 이들에게 먹힐 거라는 '불안'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직 20대는 '관리자'에 들어가지 못했고, 들어가도 간당간당하지 않을까 싶은. 해결 방법은 없어 보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헬스 열심히 해서 떡이나 치러 다니는 건뎅. ㄷㄷㄷ

hallonin 2008-05-2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마법사가 아니셨던 겁니까...!
 

다소 낭만적인 어휘를 가져오자면 '운명'에 의해, 일생을 스스로에게 강요한(그러나 종종 실패했을) 감정의 강제적 진공 상태로 수도사적인 고립을 강박처럼 느끼며 살았을 브람스의 음악들엔 무언가 기본적으로 묵직한 아우라가 신뢰감과 함께 붙는 듯싶다. 26살 때 완성했다는 피아노 협주곡 1번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 진중함과 무게감은 도저히 그 나이대의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으로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거의 천성과도 같은 것이리라. 어느 한 부분 함부로 쓰이는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하는 듯한 촘촘한 밀집도. 그러면서도 온갖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그 다채로움과 섬세함은 이것이 얼마나 숙고를 거듭하여 단단하게 짜놓은 드라마인지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성당의 한복판에 선 느낌.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가끔씩 격렬한 통증을 수반했을 오래되고 긴 고통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그의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1번이 발표된 후 23년이 지난 다음에야 완성된다.

 

좋은 앨범이다. 2for1에 해당하는 착한 가격도 그렇거니와 그라모폰 보증 딱지가 붙은 연주는 일천한 내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본에서부터 착실하게 시작하여 거대한 파노라마를 구조해내는 브람스의 성향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앨범을 완성한 프레이리의 나이다운 사려깊은 부드러움과 샤이의 매끄러운 진행은 브람스의 천성적인 신중함과 지극히 닮아있다. 마땅히 귀가 먼저 느낄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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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소년 - 하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소년] 1권을 봤을 때의 충격은, 비록 [몬스터] 1권을 봤을 때 만큼의 크기는 아녔지만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당시 우라사와 나오키는 [몬스터]의 막바지를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20세기 소년]의 첫 권이 보여줬던 흡입력은 [몬스터]와 맞먹을 정도의 '물건'이 나왔음을 직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확실히 [20세기 소년]의 전반부는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증명해냈던 시기로 두 '물건'을 동시에 관장하는 작가의 기획력과 전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후 무려 8년에 걸쳐서 이어지리라고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을 듯싶다.

[몬스터]는 그 출중한 흡입력에서뿐만 아니라, 작가적으론 우라사와 나오키 3기의 역동적인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작품이었다. 그 전까지 [마스터 키튼]이라는 단단한 작품의 매니악한 팬들을 거느린 작가이자 [야와라!]와 [해피]를 통해 적당한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수확한, 이미 성공한 작가였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몬스터]를 통해 그 두 영역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키면서 자신의 캐리어의 무게감을 한 단계 상승시킨다. 작화적으로도 비로소 오토모 가츠히로의 긴 자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완성시킨 [몬스터]는 현재까지도 진행중인 총체적인 우라사와 나오키 스타일의 출발점이다.

[몬스터]의 자장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미스테리물로, [20세기 소년]은 소재적인 확장을 통해 우라사와 나오키의 새로운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은 4, 50대가 되었을 이들이 가졌던 고리짝적 추억들로 이뤄진 확대재생산을 통해서다. 기실 [20세기 소년]이 노리고 있는 미스테리적 쾌감과 스펙터클은 주인공들이 겪었던 과거로의 주기적인 환급을 통해 세계대전의 전후 20세기의 경제성장기를 거쳐 온 이들이 가지고 있을 레트로적인 공통분모에 기반하고 있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리들에게도(이크!) 무척이나 익숙한 것들이다. 괴담, 비밀기지, 불량식품, 괴수대백과사전, 변신로봇과 외계인, 사춘기 초입 무렵에 치루게 되는 하드록의 세례와 같은 것들. 그것이 언젠가는 미래의 아이들에게 피시방 온라인게임과 창고형 매장, 힙합, 편의점의 형광등 불빛으로 대체될런지는 모르겠지만. [20세기 소년]은 반갑고도(또는 세대에 따라선 신선할, 그러니 이미 두 개의 공략포인트 확보) 천진스러웠던 노스탤지어적 감정을 자극하는, 삶에 치여 잊어버린 시절을 어떻게든 기억해내야 하는 강박을 가지게 된 중년들의 긴박감 넘치는 후회담이다. [20세기 소년]의 악몽은 바로 그 병적인 고착에 대한 것, 천진한 공상과 추억으로 남아 있었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로 여기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이 꾸준하게 보여주는 '사소한 노스탤지어적 원형으로의 귀환'이란 테마가 다시금 발견된다. [마스터 키튼]의 에피소드들에서 심심찮게 쓰였던 '귀향' 소재도 그렇거니와 키튼 자신은 고고학자라는 자신의 본분을 억지로 접고 보험조사원으로 방황하는 인물이었다(여기서 [마스터 키튼]의 표적은 현대 서구문명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는 비교되게 일본이라는 자국의 역사적 치부는 건드리지 않는다. 전체적인 양상으로서의 귀환 테마와는 상반됨과 동시에 서구(주로 유럽)문명에 대한 비판을 통해 성립되는 이 '원형'에 대한 외면은 이후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의 정치적 좌표-[몬스터]는 네오나치에게 쫓기는 선한 일본인의 억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에 대해 심심찮케 의심을 품게 만드는 꾸준한 일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유럽을 다 말아먹을 것 같았던 요한의 발걸음이 비로소 멈춘 것은 자신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던 시골 구석에 있는 오랜 옛날 지옥의 한 현장에서였다(그 상대적으로 소박했던 결말에 적지 않은 이들이 불평을 쏟아냈던 걸 기억해볼만 하다). [20세기 소년] 또한 마찬가지다. 아예 구조적으로 과거소급을 깔아두고 전개되어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길었던 이 이야기는 때가 되면 튀어나오는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반전 행렬과 함께 그 주기적인 환급이라고 하는 구조 자체가 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반복되면서 서스펜스의 패턴화를 불러왔다. 그 결과, 때 되면 나올 반전에 대한 예정된 기다림으로 인한 긴장감의 결여는 소위 나오키 매너리즘의 어떤 증표로 굳어버리는 상황까지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종 관성마저 떨어질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체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물음표는 [20세기 소년]을 끝까지 끌어 온 중요 동력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1세기 소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의 시작을 우라사와 나오키답게 보여준다. 티렉스의 '20th century boy'와 함께 시작됐던 무척이나 소소했던 그 때를. 깨닫고 후회하고 용서를 빌지만 그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 신기루에게 물어봤자 시간과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즐거웠던 추억이든 비극이든, 시간에겐 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겐 후회만이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죽을 수가 없는 법이다. 이 기구하고 어지러웠던 만화에서 해피엔딩으로서의 인생긍정이 진정 빛나는 부분은 '신령님'의 말씀으로 유쾌하게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다. 비바 볼링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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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8-05-25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작 끝날때 나오던 '친구'의 정체는 관심을 잃어버렸던지 오래..
중요한건 가르쳐줘도 누군지 모르겠더군요 -_-;;

hallonin 2008-05-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그럭저럭 언급되던 친구던데요. 하지만 확실히 문제는 그 전에 이미 관심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는 거지만.

배가본드 2008-06-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은 물론이고 당연히 '주인공은 켄지였다'라고 할거라 예상은 했지만 스토리는 칸나가 다 끌고가놓고 마무리는 당연히 주인공이 깔끔히 정리해버리는 결말은 괜히 보기에 껄끄러웠습니다. 차라리 '피의 그뭄날?'에 같이 돌격했던 친구들中 하나가 '친구'였다고 하는게 스토리상의 완전성?이 더 높았을거라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뭐 결국 문제는 너무 질질 끌었다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