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시만 넘어가면 일단 졸음이 쏟아지는 게, 분명 원인은 피로인 듯. 아니, 근데 난 별로 힘쓰는 일도 안 하는데.... 맥주를 하도 먹어서 몸에 녹이 슬었나.

일단 잠이 들면 꿈 한 판 꿔주고, 새벽에 눈을 뜬다. 대개 한 세시나 네시쯤인데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불 깔고 음악 틀어놨던 컴퓨터 끄고선 다시 취침. 아침에 일어나면 중간에 한 번 깨어났던 걸 다시 재운 거라 피로감이 웬지 부쩍 상승해 있는 상태.

예전에 친구랑 얘기한 바도 있지만, 눈도 점점 나빠져가는 중이고 몸의 기능성도 점점 퇴화되어 가는 게, 이런 게 소진된다고 하는 거랄까. 그런 느낌이다. 농담처럼 해왔던 늙어간다, 라는 걸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랄까. 이렇게 서서히 부서져가는 거겠지.

촛불이 줄어들었다고 여기저기 이상한 곳에서 걱정해주는 이가 많은 거 같은데, 이거 자체가 일종의 이벤트화된 상태라. 건수가 있다면 다시 튀어 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건 일관성의 문제라기보단 유희 차원에서 고려해야 할 바라. 아마도 촛불이 완전히 사그라드는 건 자체 삽질 및 완전히 재미가 없어졌을 때일 듯. 후자면에서 봤을 때의 자극의 강도란 점에서 지난 6.10 만큼의 대박을 이룰 건수가 많이 없다는 것이 문제겠고.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파업과 맞물려 정치집단 애들이 끼어든 거에 대한 거부감도 있겠고. 그에 대한 저쪽의 떡밥이 아직 확실치가 않아서 다들 어물쩡거리는 상태인 듯.

청와대의 가는 길을 이정도로 뒤틀어놓았는데 이번 시위에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고 하는 양반들은 그 본인이 후기 구조주의자가 아니라면 별로 공감이 안되는 게, 그냥 주석궁에 땅크 박는 이데아를 끈질기게 견지하고 계시는 플라토니스트인 갑제옹처럼 무조건 현상 자체가 꼴보기 싫다고 하면 그게 차라리 솔직할 듯. 그걸 보면 요란하게 뒷북 치며 등장하신 이문열옹이 역시 문학하시는 분답게 디시질적인 단어 선택에 탁월하심. 의병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 양반의 제대로 재치만점인 마인드를 증명해주고 있는데, 소설도 그정도로 좀 해줬으면 하는 소망... 따윈 옛적에 포기했으니 더이상은 안 들고. 아니 생각해보면 의병 이벤트 같은 거 벌이면 사람들이 열라 신나할텐데, 실은 고도의 좆불 지지잔가.

나우콤 사장이 잡혀 간 거에 대해서 열사니 정치 탄압이니 하는 양반들이 좀 보이긴 하는데, 시대를 개척하는 프론티어 정신의 소유자셨던 그분의 놀라운 시스템 전략(나우누리의 자료실 특화 전략이랄지, 클럽박스가 P2P였다는 건 정말 신선했음)을 생각해보면 뭐 저작권 관련해서 걸려도 당연한 양반이 걸린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고 순진천만하게도 정치적 꼼수가 아주 없었던 것 같진 않고 검찰측으로선 유인촌 이후 빡쎄진 저작권 관련 실적 올림과 동시에 시위 방송 쪽도 압박하는 두마리 토끼 잡는 느낌이었달까. 근데 이 사건을 열사풍으로 바꾸려고 하는 양반 본인이나 양반들이나 다 좀 한심해보이긴 하고. 내 보기엔 잡는 쪽이나 잡힌 쪽이나 양쪽 다 아귀삘. [클로버필드]를 클럽박스에서 받아본 듯한 진선생님 정도의 어필은 못하겠지만, 암튼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심심한 유감을 살짝쿵 표명해본다. 근데 나도 모르는 틈에 내 리소스 잘도 갖다 썼을테니 원.

그리고 오늘 미야자키 쓰토무 사형 집행. 

 

 

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8061615091321503&outlink=1

아아, 맥주 사재기해놔야 할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심해어적인 삶을 살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렇게 편하게 경비원 생활하면서 사는 것도 나름 축복이 아닐까 하는 작중 깨달음은 아주 빗나간 건 아닌 듯. 후루야 미노루 만화의 특징이라면 항상 나이스 바디의 미녀 캐릭터가 주인공들 주변을 떠돌고 있다는 건데, 여기서도 하나 나온다. 그런데 당연한 것처럼 똘끼 또한 갖추고 있다는 게 현실적이랄까....

 

4권부터 봤는데도 내용 파악이 다 되버린다!

 

아직도 중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음. 그럼 이제 고교편 시작인가....

 

표지가 내용을 말해주고 있음. 업그레이드 막장화되서 돌아온 여자. 아 그런데 하나자와 켄고의 그림은 날이 갈수록 정감이 넘치는 게.

 

오시이 마모루 자신의 마음의 고향인 전공투 시절로 돌아가서 피를 뿌려대던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괜찮았던 기획이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열화되고 있는 걸 보면 좀 안타까움. 뭐 본인이 직접 썼던 소설도 썩 별로였으니, 프러듀서로서의 책임만 다하고 장기전으로 정말 확실한 크리에이터들을 쓰는 게 어땠을까 싶은데. 아직까지도 계속 나오는 거 보면 장기전이긴 장기전.

 

다시 봐도 썩 별로. 긴장 관계가 어정쩡한 게 작가적 한계였다면 그거대로 문제고, 의도였다면 별 효과를 못 본 거 같고. 자전거에 대한 애정의 동인도 그리 와닿질 않아서 감정부여가 안되니, 자전거와 하나가 되라는 대사는 전형적인 사물 페티시적인 클리셰로 보여서 점수 깎아먹는데 일조.

 

신 캐릭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정도로도 어디야 차원에서도 어쨌든 이토 아키히로 만화의 평균치.

 

이제 수수께끼 그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건 아무래도 작가 본인밖에 없는 듯.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접어버리는 게 우에시바 리이치의 작가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스티븐 킹의 장편들은 때때로 끝내주는 실망감을 안겨주는데, 바로 이 소설이 그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대인원이 모이고 난 뒤의 무언가 명목이 붙은 첫번째 시위날. 그리고 어쩌면 정치색이 가장 강할 수도 있었던 날. 충돌의 화학작용을, 그리고 그 너머를 보고 싶어서 죽도록 같이 걸어서 마침내 KBS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상쩍은 영감님들은 내일 아차산 등산이라도 계획되어 있는지 다들 사라진 뒤였음. 행렬은 줄었다 늘었다 줄었다 늘었다를 계속 반복하면서 이동했는데, 뭐 가장 그림이 좋았던 건 고가도로 이동씬이었음. 하여튼 도착해서는 지치기도 했겠다 공짜로 주는 녹차 홀짝거리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이는 라디오 FM을 구경했는데 박정현 노래를 그럭저럭 잘 부르는 여자가수 한 명이 라디오 라이브를 하고 있더라.... 누군진 잘 모르겠고.

정력도 좋은 인간들은 그 다음엔 국회의사당 쪽으로 이동 시작. 대강 오늘의 할 일은 끝난 듯 해서 나는 이만 후퇴. 오늘은 질리게 걸었다는 거외엔 없었다.

이 모습이 외부에선 어떻게 비춰졌을지가 궁금했는데 딱히 네트에서의 무언가 특이사항은 안 보이고. 죙일 자잘하게 긴장감은 있었으나 어째 좌나 우나 다들 요리조리 잘도 피하고 다녔던 듯.

고엽제 관련 할아버지들이랑은 예전에 한겨레에서 알바할 때 공성전을 벌였던 경험이 있어서. 그땐 주차장 그 좁은 공간에서 차를 재주도 좋게 부숴서 뒤집어놓으시고, 편집부도 뚫고 들어올 뻔 했었는데, 가스통 가지고 노는 거야 뭐 일도 아니신 분들이라. 술을 좀 좋아하셔서 그렇지 나름 순수한 극우분들이셨던 걸로 기억. 뭐 그때나 지금이나 경찰분들이 그분들에겐 이상할 정도로 수수방관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라고 해야 할려나.

근데 백수 시절에, 그래도 먹고 살려고 이분들에게 세금 빼서 연금 넣어 주는 보훈처 서류 데이터화하는 일의 일말에 참여했었다는 건 역사와 월급의 아이러니.

아 그리고 주말에도 근무하네 니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06-1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도 근무하네 니미 2

hallonin 2008-06-1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량 낭비...
 

이 시위의 욕망은 단순하다. 그리고 이미 그것은 쇠고기 문제를 떠났다. 지금 시위의 흐름은 현정권의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한 반발이다.

나는 이 집합에서 자발적인 반대 객체들을 발견한다. 이들을 묶는 것은 반발한다라는 단순한 욕망이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정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다양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묶을 수가 있었던 것, 그래서 이 집합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반성적 객체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과격파들(프락치라는 얘기도 있고 정보도 있지만 분명 시위측 안에는 과격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었다)의 행동에 대한 군중 수준의 빠른 반발과 자기제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행동주의자들에겐 열불 나는 일이겠지만 단순한 욕망과 자기제어라는 모순이 파생시키는 정체감이 현 시위의 특징이다.

그래서 소위 '배후세력'에 대한 화두는 이 시위를 바라보는 비판적 태도의 양축이 가지는 공통된 동기다. 시위대 내의 행동주의자들은 이번 시위의 가시적 목적결여를 비판한다. 그들은 여기에 배후가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정반대편에 이 시위가 정치적인 불순함을 가진 '배후세력'의 조종, 혹은 그에 의한 변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판자들이 있다. 우파와 보수주의자들, 니힐리스트들은 정도차와 입장은 다르지만 그것을 386, 좌파, 진보조직들의 조직적 개입의 결과, 혹은 진행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보단 훨씬 단순하며 파편적이다. 그 모든 '배후세력'에 대한 의구심들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보여지는 행동으로서의 비폭력 평화 시위라는 구호는 온갖 계층들을 흡수해버릴 수 있는 명분으로서의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파의 행동주의에 대한 반발이 이토록 빠르게, 적극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도구의 유용함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이들의 방법론이다. 일단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은 완성된다. 그것이 크기로서의 두려움과 관련된 증거다.

이 시위가 정치적으로 쉬이 이용 당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생존권과 건강권과 관련된 단순한 욕구로만 움직이는 이 통합계층적인 군중은 네트를 바탕으로 한 정보력을 기반으로 한다. 쇠고기 문제만 보자면, 우리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우리네 축산업 구조의 부조리와 광우병의 위험성 또한 의심하고 있는 이들이다. 시위에서 우리 소만 먹자고, 우리 소를 사랑하자고, 뭐 그런 류의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는 바는 접하질 못했다. 다만 취사선택으로서의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대한 우선적 반발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노무현 때의 이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토록 촛불로 밀어줬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은 정치적 손해를 가져왔다. 그것은 수많은 배신 당한 이들을 만들어냈고 이어진 민노당의 노선 갈등은 사회준동을 꿈꾸는 이들에게 또다른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줬다. 가장 최근의 쬐그마한 일례라면 최고경영자 출신 대통령에게 질려버린 이들에겐 명분이(혹은 환상이) 때론 실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무시해버린 문국현의 CEO 마인드 삽질도 들 수 있겠다. 여기 모인 이들은 그 정치적 상처들을 간직한 이들이다. 그래서 가끔씩 노무현 이슈가 슬그머니 올라와도,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것 또한 취사선택의 가능성 이상이 아니다. 이들이 그보다 더 열광하는 것은 풍자와 유희 쪽에 가깝다. 그래서 그 흐름엔 단순한 욕구만을 쫓으면서도 특정 정치적 선동을 배제하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있다. 이들은 인물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들은 작용 자체에 희망을 건다.

모든 감시인으로서의 시민 객체의 집합. 

이 집단은 또 무언가 올라와서 잘못을 저지르면 갈아버리면 된다는 이들이다. 말하자면 그렇다. 그들이 선택해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고, 이들 인구의 정치적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이들은 아직 오래 전 시절에 갇혀 있는 이들이다. 반성따윈 필요없다. 누가 되든 상관 없었던 파벌 민주주의의 썩은 괴임이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가버렸던 지난 대선에서부터 현재까지, 여기엔 누가 그 자리에 있든 상관 없지만 뜻에 맞지 않으면 부숴버리겠다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보면 이들은 정치 그 자체의 적으로서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에 열린 재선에서 통합민주당의 전반적 승리는 이명박의 승리와 똑같은 역학으로 기능한 것이라, 그네들 입장에서 보면 별로 기뻐할 일은 못된다. 

희망은 이렇게 거칠게 찾아왔다. 물론 이것이 실질적인 재협상으로 어떻게 이어지느냐는 불가해한데다 미지수에 가깝지만. 하지만 누가 되든 어떤 대안을 내놓든 그것에 대한 군중의 답이 원하는 욕망이 아니라면 다시금 비판과 행동은 시작될 것이다. 그 지속력은 현재 비판으로서의 행동 자체가 유희로 시스템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공백을 만들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정치적 혼돈따위엔 관심 없는, 그런데도 나라는 그럭저럭 굴러가는 세상의 군중이 만들어내는 이 상황은 여전히 그 미래가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저속령 Day Dream 10 - 완결
사키 오쿠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드디어 10권으로 완결된 [저속령 데이드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일종의 시체 뒤지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시점이었던 어제, 아키하바라에서 어떤 오타쿠에 의한 대낮 참살극이 벌어졌다. 지난 세기말을 열어제꼈던 악령들은 여전히 저 사회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저속령 데이드림]은 명백히 저 1990년대 말의 냉소적인 감각을 가지고 2000년대의 초입에 나타난(그것도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와 같은 소년 에이스에 연재된), 다소 시대착오적이라고 오해될 법도 한 작품이었다. 매너리즘, [저속령 데이드림]의 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질릴 정도로 낭비된 이미지들. 그런데다 주인공이 SM여왕님이라고? 하이구야.

그러나 [저속령 데이드림]은 매너리즘의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만화가 자신의 길을 나아감에 있어서 지면에 그려지는 달콤하게 팬시화된 캐릭터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야마다 레이지식으로 말하자면 '전후 수십년간 흑백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채 안이하게 굴러 온 세상'에서 작품은 진지해지는 것만이 적절한 공격무기가 된다. 그래서 [저속령 데이드림]은 쉼없는 실패와 타협으로 이뤄진 시스템의 역사 밑에서 피어난 악마들을 불러낸다. 도시괴담이란 형태로 드러나는 위협들을.

그것들은 마치 백일몽처럼, 둥둥 떠다니는 공포들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저속령 데이드림]의 적들은 그래서 작품 안에 내내 느슨하고 나른한 탈력적인 분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공포는 더없이 치명적이다. [저속령 데이드림]은 종종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소름끼치는 씬들을 제공해준다. 햇빛 가득한 오후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헤쳐 열려진 자신의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열심히 빨고 있는 악령의 퀭한 눈과 마주친 순간의 그 낯선 공포. [저속령 데이드림]은 악몽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는 만화였다.

[저속령 데이드림]의 공포는 또한 제대로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찜찜한 무력감에서도 비롯된다. 영과 퇴마사의 격렬한 전투 같은 쌍팔년도 먼치킨 퇴마물적인 활극감은 엿먹으라는 듯 무겁고 침침하게 악령과 마주하고 그에 빙의되어 텁텁하게 해결(에 비슷한 결말)을 가져오는 패턴을 보여주는 각 에피소드들은 이미 처음부터 틀어진 것들 중에 근본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없다는, 어쩌면 세계의 법칙 비스무리한 것을 은연중에 견지한다. [저속령 데이드림]의 이러한 모호함과 내러티브의 복잡성은 캐릭터성의 빈약함을 견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연인 미사키나 소이치로는 제법 괜찮게 잡힌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영 힘을 못 쓰는 두루뭉실하고 무력하기까지 한 인상으로 종종 남는다는 것에서 확인이 된다.

10권에 이르러 [저속령 데이드림]은 아쉬운 감을 감추기 힘들게끔, 일단 끝을 거둔다. 어지간히 복잡했던 이야기의 일단락적 수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완결편은 어떻게 봐도 어정쩡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훌륭했던 9권까지의 전개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문제다). 그것은 언젠가 다시 시작될 이야기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결국 여기서도 끝까지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과 그것을 기술적으로 관철하는 마인드와는 별개로 갈등들이 너무 빠르게 식어버리는 감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 내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급작스럽게 진행시킨 건 [저속령 데이드림]의 전체를 봐서도 드문 것으로 어떤 작가적 한계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마 [저속령 데이드림]의 끝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여기서 드러나는 총체적인 모호함과 결론 미루기가 이 세상을 드러내는 어떤 표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도 악령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속령 데이드림]이 보여준 시대착오적인 세기말적 공포는 여전히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 우울하게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