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위의 욕망은 단순하다. 그리고 이미 그것은 쇠고기 문제를 떠났다. 지금 시위의 흐름은 현정권의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한 반발이다.

나는 이 집합에서 자발적인 반대 객체들을 발견한다. 이들을 묶는 것은 반발한다라는 단순한 욕망이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정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다양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묶을 수가 있었던 것, 그래서 이 집합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반성적 객체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과격파들(프락치라는 얘기도 있고 정보도 있지만 분명 시위측 안에는 과격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었다)의 행동에 대한 군중 수준의 빠른 반발과 자기제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행동주의자들에겐 열불 나는 일이겠지만 단순한 욕망과 자기제어라는 모순이 파생시키는 정체감이 현 시위의 특징이다.

그래서 소위 '배후세력'에 대한 화두는 이 시위를 바라보는 비판적 태도의 양축이 가지는 공통된 동기다. 시위대 내의 행동주의자들은 이번 시위의 가시적 목적결여를 비판한다. 그들은 여기에 배후가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정반대편에 이 시위가 정치적인 불순함을 가진 '배후세력'의 조종, 혹은 그에 의한 변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판자들이 있다. 우파와 보수주의자들, 니힐리스트들은 정도차와 입장은 다르지만 그것을 386, 좌파, 진보조직들의 조직적 개입의 결과, 혹은 진행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보단 훨씬 단순하며 파편적이다. 그 모든 '배후세력'에 대한 의구심들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보여지는 행동으로서의 비폭력 평화 시위라는 구호는 온갖 계층들을 흡수해버릴 수 있는 명분으로서의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파의 행동주의에 대한 반발이 이토록 빠르게, 적극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도구의 유용함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이들의 방법론이다. 일단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은 완성된다. 그것이 크기로서의 두려움과 관련된 증거다.

이 시위가 정치적으로 쉬이 이용 당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생존권과 건강권과 관련된 단순한 욕구로만 움직이는 이 통합계층적인 군중은 네트를 바탕으로 한 정보력을 기반으로 한다. 쇠고기 문제만 보자면, 우리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우리네 축산업 구조의 부조리와 광우병의 위험성 또한 의심하고 있는 이들이다. 시위에서 우리 소만 먹자고, 우리 소를 사랑하자고, 뭐 그런 류의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는 바는 접하질 못했다. 다만 취사선택으로서의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대한 우선적 반발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노무현 때의 이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토록 촛불로 밀어줬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은 정치적 손해를 가져왔다. 그것은 수많은 배신 당한 이들을 만들어냈고 이어진 민노당의 노선 갈등은 사회준동을 꿈꾸는 이들에게 또다른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줬다. 가장 최근의 쬐그마한 일례라면 최고경영자 출신 대통령에게 질려버린 이들에겐 명분이(혹은 환상이) 때론 실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무시해버린 문국현의 CEO 마인드 삽질도 들 수 있겠다. 여기 모인 이들은 그 정치적 상처들을 간직한 이들이다. 그래서 가끔씩 노무현 이슈가 슬그머니 올라와도,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것 또한 취사선택의 가능성 이상이 아니다. 이들이 그보다 더 열광하는 것은 풍자와 유희 쪽에 가깝다. 그래서 그 흐름엔 단순한 욕구만을 쫓으면서도 특정 정치적 선동을 배제하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있다. 이들은 인물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들은 작용 자체에 희망을 건다.

모든 감시인으로서의 시민 객체의 집합. 

이 집단은 또 무언가 올라와서 잘못을 저지르면 갈아버리면 된다는 이들이다. 말하자면 그렇다. 그들이 선택해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고, 이들 인구의 정치적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이들은 아직 오래 전 시절에 갇혀 있는 이들이다. 반성따윈 필요없다. 누가 되든 상관 없었던 파벌 민주주의의 썩은 괴임이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가버렸던 지난 대선에서부터 현재까지, 여기엔 누가 그 자리에 있든 상관 없지만 뜻에 맞지 않으면 부숴버리겠다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보면 이들은 정치 그 자체의 적으로서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에 열린 재선에서 통합민주당의 전반적 승리는 이명박의 승리와 똑같은 역학으로 기능한 것이라, 그네들 입장에서 보면 별로 기뻐할 일은 못된다. 

희망은 이렇게 거칠게 찾아왔다. 물론 이것이 실질적인 재협상으로 어떻게 이어지느냐는 불가해한데다 미지수에 가깝지만. 하지만 누가 되든 어떤 대안을 내놓든 그것에 대한 군중의 답이 원하는 욕망이 아니라면 다시금 비판과 행동은 시작될 것이다. 그 지속력은 현재 비판으로서의 행동 자체가 유희로 시스템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공백을 만들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정치적 혼돈따위엔 관심 없는, 그런데도 나라는 그럭저럭 굴러가는 세상의 군중이 만들어내는 이 상황은 여전히 그 미래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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