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얘기겠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다는 것은 크든 적든 스스로의 노선에 나름의 목표로서 작용합니다. 그 점에서 오카마는 그 선택받은 영역에 들어간 작가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카마의 이름은 우리에겐 보편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으로서 보다는 일러스트와 컨셉, 캐릭터 디자인, 그리고 18금 만화로서 먼저 다가왔습니다. 특히 오카마의 스타일은 근간에 와서 메이저에서 집중적으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중인데, [해바라기!]의 캐릭터 및 프러덕션 디자인, [톱을 노려라2]의 엔딩 타이틀 일러스트레이션, [유리의 함대]의 원안, 드라마 [전차남]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자인, [창공의 아쿠에리온] 컨셉 디자인, [카미츄]의 프러덕션 디자인, 월간 뉴타입의 별자리점 코너 디자인 등등등. 사실 요즘은 너무 많은 동네에서 놀고 계시는 양반이라 늘어놓는 게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오카마가 만들어내는 그림의 개성은 로리 취향의 한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 그만의 캐릭터 디자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부담을 안 주는 부드러움, 독특한 정감이 상존하고 있는 특유의 색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당나구를 타고 국내에도 퍼져 결국 (불법) 번역본까지 나온 [화투]는 여우요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인상적인 에로 괴담극을 풀컬러로 보여주고 있죠. 흡사 화투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몽환적인 인상을 준다고나 할까요. 혹은 고급스러운 춘화를 보는 느낌입니다(현재 아마존 저팬에서의 가격은 무려 9000엔).

오카마의 인터뷰를 보면 그자신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그림이 흥미롭게 보이게 하는 데에 집중했다고 말하는 점에서, 그의 의상디자인에서의 센스와 컬러 스타일이 유난히 다채로운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과도한 만용으로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한 것이 아니라 절제와 절묘한 배합을 통한 그만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로서의 행운이자 노력의 결과였겠죠. 그리고 이것은 [클로스 로드]에서도 적용되는 바입니다.

 

 

그가 [ROD]의 원작자와 손 잡고 울트라 점프에 장기 연재중인 작품인 [클로스 로드]는 일단은 오카마의 전적을 봐서라도 지극히 울트라 점프다운(시키 사토시, 오구레이토 등등으로 대표되는)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사실 각본쪽이 쿠라타 히데유키라는 것만으로 애초에 기대를 버린 상태였지만.

그런데 애초에 기대를 버린 탓인가, 의외로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나노기술의 발달로 인해 컴퓨터가 바로 옷이 됐고 그럼으로써 패션모델이 다양한 기술의 총합으로서 세계의 주역이 됐다는 설정도 신선하거니와, 의외로 이야기도 제법 흥미 있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 오카마의 그림에서 나옵니다. 때론 감정의 인과와 그를 표현하는 뎃셍이 다소 서툴게 느껴지고 도식화된 흐름이 감상을 방해하고 있긴 해도 오카마의 그림은 그만의 개성을 통해 보는 사람을 즐겁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 미타 류스케의 [흑발의 캡쳐드]가 생각나더군요.
또한 소재가 패션모델이란 점에서 이것은 완연하게 오카마의 것이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홍보용 멘트라곤 해도 [클로스 로드]를 그릴 때가 가장 즐겁고 차후에 애니화도 됐으면 한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현재 일본에선 3권까지 발매된 상태. 이번에 발매된 1권은 전체 190페이지에 컬러 6페이지. 1권만 훌륭했던 시키 사토시의 [신풍] 꼴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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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펼치면 우선 독자를 압박해 들어오는 것은 세밀한 부분까지 채워진 작화와 그 작화의 빽빽함을 더해주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텍스트량이다. 그만큼 팔레스타인이란 지역은 오해도 많았고 그 오해된 만큼의 해명도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소개글, 역자의 의견, 저자의 여는 글, 저자의 태도에 대한 또다른 의견 등등의 텍스트들이 더해져서 또한 빼곡하게 들어찬 텍스트 덩어리로서의 만화책을 형성해내고 있다.

다양한 시선, 작가의 객관적 태도, 미화를 거치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과의 대조를 통해 이미 나온지 15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겐 여전히 그쪽 지방에 대한 인식의 상당 부분을 고치게 만드는 [팔레스타인]의 미덕이 1차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확실하다. 그것은 저널리즘의 문제, 제삼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독자로 하여금 기이한 피곤함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지쳐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나마 달아올라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해서 이스라엘인들의 시선에는 반복되는 것에 지친 익숙한 무감함이 겹쳐져서, 그것이 무감각한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형국이다. 이것은 작품 내내 비슷한 이야기에 질려버렸다는 작가의 자조 섞인 불평과 비근하게 흘러가는 시선이다.

주목할 것은 작품의 도입부분에 몰린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빼곡한 텍스트량이 그런 피로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그중 일부인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이 만들어진 시점에서 인티파다의 열기는 이미 상당히 꺼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노는 여전히 그들을 이끄는 중요한 동기다.

반면 작품 속에서 이스라엘 여성 하나는 같은 얘기를 또 듣고 또 들으면 지겨워진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노인은 평화회담에 대하여 허탈하게 웃으며 그따위 걸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여기에 누르는 자의 무감함과 저항하는 자들이 자살로 그들을 증명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이것은 총체적인 기계화다. 의미가 사라지고 자동으로 가동되는 구조만이 남은 세계가 진행하는 반복작업에 대한 노곤한 초상.

[팔레스타인]은 그 두텁게 부유하는 무력감과 피로를 만화 자체로서 표현해낸다. 그래서 우리의 탈력스러운 화자는 자신의 무력함을 끊임없이 자각하지만 이내 그 이율배반성에 익숙해진다. 이것은 그저 태도와 입장의 차이 문제일 뿐인가? 글쎄, 그렇게만 단정내리긴 힘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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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6년 7월 28일 금요일 9시 50분 한일시네마.

 

2. 한강의 주변은 돌아다녀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영 볼품없는 공간이다. 그 주변은 너무 열려있어서 황량하다. 그리고 한강 자체가 워낙 굵다. 그 굵기를 잇기 위해 세워진 무식하게 두꺼운 철골구조물들과 강가를 따라서 단조롭고도 무덤덤하게 펼쳐져있는 잔디밭. 하지만 분당이나 일산이 숨막히게 짜여진 듯한, 그러면서도 절제 없이 펼쳐낸 듯한 황량함으로 인해 콘크리트 사막과 같은 독특한 삭막함을 자아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한강은 미니멀적인 음습함과 내밀함을 통해 긴장감 넘치는 세계로 거듭난다.

 

3. 그래서 백주대낮에 괴물이 벌이는 살육씬의 포커스는 노골적으로 펼쳐져있는 공간인 고수부지에 비추어 의도적으로 좁게 맞춰져 있다. 우린 시작하자마자 밝은 하늘 아래에서 한강의 일상적이고도 익숙한 키워드들을 볼 수 있다. 돗자리, 매점, 컨테이너, 자전거족.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진 가운데에 괴물의 살육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창문 안쪽이거나 도망자의 시선 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뒤에 주로 하수도로 집중되는 한강의 다른 장소에서의 시선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즉,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서 한강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다고 봐도 좋을 듯 싶다.

 

4.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스릴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축축한 골목가에서의 죽음 만큼이나 개방된 공간에서의 죽음 또한 긴박하다.

 

5. 괴물은 모호한 존재다. 그것은 디자인에서부터 특징까지 두리뭉실하다.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 심지어 스피시즈보다도 캐릭터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단지 먹어치우고 부수는 괴물로서의 존재감만을 갖추고 있기에 국지성 재해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잔인한 모호함, 피해의식적 재해는 영화 내내 세계를 한바탕 휩쓸지만 끝난 후에는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의 괴물은 카프카적이기까지 하다.

 

6. 물론 괴물의 존재이유는 명확하고, 그것이 은근한 사회비판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조합이 진부함의 우려를 떨쳐버리고 제법 매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면에서 영화는 두 번 모험을 강행한다. 강두의 미군병원 탈출 이후 한강까지의 도착 과정의 삭제와 마지막씬.

 

7. 마지막씬은 괴물의 모호함이 실제적인 위협의 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은 모호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떠오를 수도 있는 존재다. 그때 TV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숙주. 그러나 존재하는 숙주.

 

8.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군중적 공포감이 보다 세밀하게, 확장된 모습으로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강두의 가족들은 그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강두의 탈출 이후 한강에의 도착에 대한 묘사나 에피소드의 부재가 내러티브에서의 모험일 수밖에 없는 것은 환자복 입은 사람이 별 탈 없이 검문을 뚫고 잘도 거까지 도착했다는 생각에서 기반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강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의 묘사를 거세시킴으로서 가족과 괴물의 대결구도에 영화를 집중시키려는 나름의 잔가지 치기는 아니었나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괴물]은 보다 히스테리컬하고 잔인하며 풍부해질 수 있었으리라.

 

9. 서스펜스물로서 [괴물]은 종종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모호한 연쇄살인자-괴물, 계속되는 무작위적인 죽음-연쇄살인, 죽음의 위협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죽기 직전의 지난한 고통을 겪어야했던 피해자들, 가족-쫓는 자들.

 

10. 도심을 활보하는 중형 사이즈의 괴물은 나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잔뜩 기대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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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7-30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눈을 찡그리거나 마음이 아파야 하는 상황에서도 웃음으로 넘기라는 반복적인 요구와 원하지 않았던 결말에 끝나고 나서는 조금 기분이 안쓰러웠다고하나요.. '괴물'을 아릅답게 그리기 원했었나? ㅋ

hallonin 2006-07-3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봉준호의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웃음은 상황을 그냥 넘기는 게 아니라 더 아프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죠.
 

마지막에 감정선이나 상황이 좀 싸구려삘 나게 튀어나온 걸 빼면, 전체적으론 전부터 정말 탐내고 이상적으로 생각되던 소재와 주제를 소설 자체의 구조로 써먹고 괜찮게 적응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읽어낸 다음 이거 곤란하잖아....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뭐.... 뭐라고 해야하나. 세상에 이런 물건만 나오게 된다면 작가들 80%는 짐싸야한다.... 초강력 스트레이트 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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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장점을 찾아야 할지 난감해진다. 아니, 내가 이걸 왜 봤는지부터가 난감하다. 쇼타콘?

자료의 나열. 그 이상은 영 안 될 것 같고 이하가 될 가능성은 보인다. 수박겉햝기라는 느낌. 서울이라는 지형을 재미없게 드러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

이상적이다.

18금 게임의 하위 장르인 다크물, 그리고 비주얼노블과의 근접조우에서 봤던 거의 모든 요소들의 원형. 캐릭터에서부터 내용, 심지어 문체마저도.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백과사전. 빈말이 아니다. 그러니 독법 또한 똑같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악의에 대한 방대한 퍼즐놀이. 아무리 인간이 이득을 따르는 냉철한 짐승이라 하더라도 심연 깊숙이 담겨있는 악마적 감수성에 대한 혐의를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역사는 종종 인간이 그저 괴물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지긋지긋하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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