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펼치면 우선 독자를 압박해 들어오는 것은 세밀한 부분까지 채워진 작화와 그 작화의 빽빽함을 더해주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텍스트량이다. 그만큼 팔레스타인이란 지역은 오해도 많았고 그 오해된 만큼의 해명도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소개글, 역자의 의견, 저자의 여는 글, 저자의 태도에 대한 또다른 의견 등등의 텍스트들이 더해져서 또한 빼곡하게 들어찬 텍스트 덩어리로서의 만화책을 형성해내고 있다.

다양한 시선, 작가의 객관적 태도, 미화를 거치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과의 대조를 통해 이미 나온지 15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겐 여전히 그쪽 지방에 대한 인식의 상당 부분을 고치게 만드는 [팔레스타인]의 미덕이 1차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확실하다. 그것은 저널리즘의 문제, 제삼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독자로 하여금 기이한 피곤함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지쳐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나마 달아올라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해서 이스라엘인들의 시선에는 반복되는 것에 지친 익숙한 무감함이 겹쳐져서, 그것이 무감각한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형국이다. 이것은 작품 내내 비슷한 이야기에 질려버렸다는 작가의 자조 섞인 불평과 비근하게 흘러가는 시선이다.

주목할 것은 작품의 도입부분에 몰린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빼곡한 텍스트량이 그런 피로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그중 일부인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이 만들어진 시점에서 인티파다의 열기는 이미 상당히 꺼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노는 여전히 그들을 이끄는 중요한 동기다.

반면 작품 속에서 이스라엘 여성 하나는 같은 얘기를 또 듣고 또 들으면 지겨워진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노인은 평화회담에 대하여 허탈하게 웃으며 그따위 걸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여기에 누르는 자의 무감함과 저항하는 자들이 자살로 그들을 증명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이것은 총체적인 기계화다. 의미가 사라지고 자동으로 가동되는 구조만이 남은 세계가 진행하는 반복작업에 대한 노곤한 초상.

[팔레스타인]은 그 두텁게 부유하는 무력감과 피로를 만화 자체로서 표현해낸다. 그래서 우리의 탈력스러운 화자는 자신의 무력함을 끊임없이 자각하지만 이내 그 이율배반성에 익숙해진다. 이것은 그저 태도와 입장의 차이 문제일 뿐인가? 글쎄, 그렇게만 단정내리긴 힘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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