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6년 7월 28일 금요일 9시 50분 한일시네마.
2. 한강의 주변은 돌아다녀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영 볼품없는 공간이다. 그 주변은 너무 열려있어서 황량하다. 그리고 한강 자체가 워낙 굵다. 그 굵기를 잇기 위해 세워진 무식하게 두꺼운 철골구조물들과 강가를 따라서 단조롭고도 무덤덤하게 펼쳐져있는 잔디밭. 하지만 분당이나 일산이 숨막히게 짜여진 듯한, 그러면서도 절제 없이 펼쳐낸 듯한 황량함으로 인해 콘크리트 사막과 같은 독특한 삭막함을 자아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한강은 미니멀적인 음습함과 내밀함을 통해 긴장감 넘치는 세계로 거듭난다.
3. 그래서 백주대낮에 괴물이 벌이는 살육씬의 포커스는 노골적으로 펼쳐져있는 공간인 고수부지에 비추어 의도적으로 좁게 맞춰져 있다. 우린 시작하자마자 밝은 하늘 아래에서 한강의 일상적이고도 익숙한 키워드들을 볼 수 있다. 돗자리, 매점, 컨테이너, 자전거족.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진 가운데에 괴물의 살육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창문 안쪽이거나 도망자의 시선 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뒤에 주로 하수도로 집중되는 한강의 다른 장소에서의 시선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즉,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서 한강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다고 봐도 좋을 듯 싶다.
4.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스릴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축축한 골목가에서의 죽음 만큼이나 개방된 공간에서의 죽음 또한 긴박하다.
5. 괴물은 모호한 존재다. 그것은 디자인에서부터 특징까지 두리뭉실하다.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 심지어 스피시즈보다도 캐릭터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단지 먹어치우고 부수는 괴물로서의 존재감만을 갖추고 있기에 국지성 재해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잔인한 모호함, 피해의식적 재해는 영화 내내 세계를 한바탕 휩쓸지만 끝난 후에는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의 괴물은 카프카적이기까지 하다.
6. 물론 괴물의 존재이유는 명확하고, 그것이 은근한 사회비판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조합이 진부함의 우려를 떨쳐버리고 제법 매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면에서 영화는 두 번 모험을 강행한다. 강두의 미군병원 탈출 이후 한강까지의 도착 과정의 삭제와 마지막씬.
7. 마지막씬은 괴물의 모호함이 실제적인 위협의 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은 모호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떠오를 수도 있는 존재다. 그때 TV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숙주. 그러나 존재하는 숙주.
8.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군중적 공포감이 보다 세밀하게, 확장된 모습으로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강두의 가족들은 그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강두의 탈출 이후 한강에의 도착에 대한 묘사나 에피소드의 부재가 내러티브에서의 모험일 수밖에 없는 것은 환자복 입은 사람이 별 탈 없이 검문을 뚫고 잘도 거까지 도착했다는 생각에서 기반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강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의 묘사를 거세시킴으로서 가족과 괴물의 대결구도에 영화를 집중시키려는 나름의 잔가지 치기는 아니었나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괴물]은 보다 히스테리컬하고 잔인하며 풍부해질 수 있었으리라.
9. 서스펜스물로서 [괴물]은 종종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모호한 연쇄살인자-괴물, 계속되는 무작위적인 죽음-연쇄살인, 죽음의 위협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죽기 직전의 지난한 고통을 겪어야했던 피해자들, 가족-쫓는 자들.
10. 도심을 활보하는 중형 사이즈의 괴물은 나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잔뜩 기대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