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알면서도 꿈꾸는 것들이 종종 있다.
애니메이션의 장점과 덕목은 그 꿈들을 기꺼이 이미지화해 준다는 데 있다.
날으는 탐험선이 되는 오래된 집,
난생 처음 보는, 꿈에서 봄직한 자연 풍경 속에 폭포며, 동물들이며, 말하는 개, 거기에 새까지.
무엇보다 꿈꾸었던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은 우리 모두를 대리만족으로 이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녹록하지 않은 삶의 자국들이 남겨있다.
칼은 한 평생 행복했지만, 지금은 아내도 먼저 가 버렸고,
집은 대형 건축물 사이에 알박이처럼 박혀 있을 뿐이다.
집 구석구석 추억하고, 회생할 것들 천지이다.
다른 곳으로 갈래야 갈 수 없고, 갈 데도 없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추억 속에서만 빛을 발할 뿐이다.
거기에 난데없이 등장한 꼬마 러셀.
러셀의 등장은 애매모호하다.
그가 '업'에 끼어들게 된 이유는 단지 경로봉사 배지가 필요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오랫동안 자식을 바래왔지만 불가능하게 된 칼에게,
대안가족이 될 러셀의 등장은 그래서 좀 억지스럽다.
또 한 사람의 러셀은 탐험에 정신이 팔려 가족을 등한시하고,
가족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남미의 어떤 곳에 '개'들과 살아간다.
탐험이라는 키워드가 두 러셀에게 적용될 듯 싶지만,
두 러셀 모두 가족에게서 버림 받았다는 아픔이 있다.
쓸쓸하게 인생을 마무리해가는 칼,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두 러셀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하여, 그들의 탐험은 어떤 이미지로 포장되었다 해도, 결국은 다시 가족을 만들어 가는 것에
최종적인 목표가 있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상상의 이미지화말고,
깨진 관계를 회복해가는 그 과정에 대리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공상들은 현실의 도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돌아갈 추억이나 상처를 깨버리고(칼이 집의 모든 추억들을 버렸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업'의 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