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야 한다.
직장의 신,을 보면서 내가 한 최초의 코멘트.
회사란, 무엇일까,가 요즘의 화두.
미스김에게 회사란, 잔인하고 냉정한 존재라서 일한만큼 돈을 받으면 그 뿐이고, 그 안에 속한 사람들과 회사밖에서 만나는 일은 끔찍한 일이 된다. 장규직에게 회사란, 타인에게는 잔인하고 냉정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중요한 존재라서 회사 안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하고 '회사'에 애정없는 미스김이 그렇게 끔찍한 거다.
15년차 직장인인 나는, 회사가 무엇일까, 생각한다. 미스김처럼 정의하기에 나는 회사에 이입하는 순간이 많고, 장규직처럼 정의하기에는 나는 애가 둘이나 있는 엄마다.
아직 아이가 있기 전에, 가정이 있기 전에, 나는 회사를 '이윤추구를 목표로 움직이는 조직' 이라고 생각했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 혹은 타인의 존재가 회사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내 딴에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고 더이상 회사에 그 이전만큼 헌신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정의한 회사의 방식에 비추어 내 자신을 경멸하거나 혐오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회사를 특정하게 가상하지 않는다. 회사는 회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정의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회사를 구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또 회사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고도 생각한다. 회사 안의 사람들이 '회사'가 이윤추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회사 밖의 사람들이 '회사'가 이윤추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회사는 결국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계약직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시기가 우리에게 있었고, 우린 드라마의 시작에 언제나 되풀이되는 'IMF' 이후로 '회사'는 회사 '안과 밖'에서 그런 존재로 정의되어 버린 거다. 우리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그렇게 바뀌었다면, 회사가 다르게 움직이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다른 회사를 바란다면, 다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회사는 '이윤추구를 하는 조직이라서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믿음 대신, 다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윤추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으로 함께 가기 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믿음. 애가 둘이나 있는 엄마인 나는, 나의 회사를 다르게 정의해야, 나의 어떤 식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것이다. 회사밖에서 회사에 청렴이나, 사회공헌을 요구하는 것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특정하기 어려운 '회사'라는 조직에게 '사회적 책무'를 원하는 것이라면, 회사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구성하거나 정의할 수도 있고, 노력할 수도 있다.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하는 회사던지간에, 그 회사가 그 회사에 속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단지, 회사에 속한 사람들의 얼굴로만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회사의 얼굴로 드러날 때, 아픈 당신을 위해 짐을 나눠질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