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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 한자경의 일체유심조 강의
한자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3월
평점 :
책장에서 포스트잇이 남은 이 책을 찾았다. 심층마음의 연구를 이미 좋게 읽은 다음이라, 같은 저자의 책을 찾아 읽은 것이다.
책에 포스트잇을 붙이면, 그 부분을 여기 옮겨적고 떼어내기 때문에 의아했다. 21년 5월에는 아직 그러지 않았나 보다. 너무 좋은 책은 아직 남기지 않을 때, 책에 붙인 포스트잇을 떼어놓지 않을 때, 였나 보다. 책이 이래 저래 잘 읽히지 않는 날들이라 오래 전 읽은 책에 남겨진 포스트잇을 떼어내며 남긴다.
모든 책을 적어놓은 수첩에는, 언어라는 그릇에 담는 게 가능한가 싶은 이야기들,이라고 남겼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아는가, 모르는가, 같은 이야기다. 사라졌을 때에야 하는 늦은 자각, 너무 가까워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경계를 알아내려고 멀어지는 태도, 이미 어디에나 있고,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대개 여성과 남성을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여기지만, 사실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통해 서로가 있는 상즉의 존재입니다. 나아가 둘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상입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있고,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있는 것이지요. 20세기 서양 분석심리학자 융은 여성 무의식 안의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부르고, 남성 무의식 안의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불렀습니다. 음과 양의 상입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p62
반면 신비주의를 제외하면, 서양철학에서 일一은 개체들 내의 성性이 아니라 개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神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현대과학에 와서야 비로소 '일즉다 다즉일'이 주장됩니다. 일즉다 다즉일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프랙탈 무늬'입니다. 프랙탈 무늬를 보면, 전체의 무늬가 각 부분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지요. 그리고 그 부분의 부분도 다시 또 전체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각 부분이 다이면서 그대로 일이 되는 것이지요. '홀로그램 필름'에서도 일즉다 다즉일이 나타납니다. 일반 필름은 그 필름 전체의 일부만을 잘라서 현상하면 그 부분만 나타나지요. 그런데 홀로그램 필름의 경우는 전체의 일부분만을 잘라서 투사해도 그것으로부터 다시 전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부분이 그대로 전체가 되는 것이지요. -p77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행위자 내지 실체를 묻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언어구조 내지 사유구조가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구조는 '주어-술어' 형식인 'S는 P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 형식이 바로 주어-술어의 구조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언어구조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세계 또한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즉 세계가 '주어-술어' 형식에 상응하는 '실체-속성'의 관계로 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빨간색을 보면 그 빨간색을 속성으로 갖는 '빨간 사물'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런 생각을 일으키는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물리적 속성에 대해 물리적 실체를 심리적 속성에 대해 심리적 실체를 설정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유를 실체론적 사유라고 합니다.-p84-85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우주의 본질,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요. 모두가 근원에서 하나이며 불이不二라는 것,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명이기에 '나는 나다'라는 아집我執을 갖고, 그 집착을 따라 업을 지으며, 또 그 업력에 의해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무명 이후의 11개 항이 모두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p90
그런데 유식은 그런 번뇌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대해, 그래도 식 자체, 우리의 마음 자체는 번뇌를 떠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헝겊을 물들일 때 본래 헝겊 자체는 무색이고, 종이에 향수를 스며들게 할 때 본래 종이 자체가 무향인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번뇌에 물들어 있어도, 그 번뇌 있음을 아는 그 마음 자체는 번뇌를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본래 마음 본심本心, 진짜 마음 眞心 또는 선한 마음 良心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나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분명 깨끗하고 선한 마음이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p189
아뢰야식이 무한 무외의 마음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그 마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마음은 우리가 아는 전체이고, 우리는 그 마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나가본 적이 없기에, 우리에게 전체이기에, 우리는 그 마음을 마음으로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p219-220
본각이면서도 불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요?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알면서도 그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있지요.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으면, 그 사랑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 사랑이 끝나야지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고 있어야지, 그 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이 끝났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고 있되, 다만 자신이 그 사랑을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일 뿐이지요. -p22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