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스토랑을 보는데, 박솔미가 아이들을 등교?등원?시키고 아이들이 남긴 밥으로 자신의 밥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왔다. 아이들이 남긴 밥은 버리기 아까워요,라고 말하는 박솔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화려한 삶을 전시해서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매체에서, 새 것을 보여주고 소비를 촉진하고, 위생과 청결을 설파해왔던 매체에서 그런 장면을 보게 되니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아이가 남긴 밥을 먹는다. 아깝다,는 말이 한국에나 존재하는 말이라고 자원이 풍족해본 적 없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런 성정을 무언가 버려야 하는 태도처럼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확신에 차서 써놓은 그 글에 나는 경계하는 마음이 된다. 식당에서 남는 밥이 아까워 쩔쩔 매는 나에게 '그걸 왜 뱃 속에 버리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깊은 거부감이 들었다. 

가난한 자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고, 더하여 그 가난한 자의 정체성을 변호한다. 

이렇게 쉽게 버린다면, 지구는 어쩌지, 같은 것. 내가 먹을 쌀을 짓기 위해 물고기가 살고, 잡초가 우거질 어떤 땅에서 쫓겨난 풀벌레들이 있는데, 내가 먹을 고기가 되기 위해서 죽어 간 동물이 있는데, 내가 그 요리를 앞에 두고, 그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다,는 각오 같은 것. 

집에서 먹는 밥은, 그런 것도 같다. 한 끼에 예쁘게 차려서 남는 반찬을 톡 털어서 버리는 게 아니라, 어차피 가까운 식구들이라고, 뚜껑을 덮었다가 다음 끼니에 다시 내오는. 식당이라면 비위생적이라 할 만한 어떤 것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누가 남긴 밥을 먹고 싶어해? 그건 권력이 없다는 징표야,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도 같다. 

아니,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어한다. 

권력은 가장 좋은 것을 누리는 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가운데 있는 거고, 아이들을 먹이는 책임을 지고, 더하여 자연이나 지구를 돌보는 마음은 권장되어야 한다고. 

모두 다 같은 부위를 먹고 싶어한다면 소 한마리를 잡아도, 더 많이 버려지겠지. 그런 세상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먹느냐에 계급이나 권력같은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고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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