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정치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항상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의 순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손해를 요구하는 순간에 정치인인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답하기 힘들었다. 지금의 세계는 국가 내 벌어지는 양극화 만큼 심각하게, 국가간의 양극화도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누리는 삶 자체가 대한민국의 부유에 빚지고 있고, 이 대한민국의 부유는 가난한 나라들의 선망과 정치적 불안정들에 빚지고 있지 않은가. 우주로 나아가고, 영생을 꿈꾸는 미래전망 반대편에는 식량을 포기하고 니켈 따위를 채굴하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국내 정치에서 가지는 나의 어떤 정치인의 태도를 국외정치에서 일관되게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헛되이 상상으로 계속 하면서 나는 정치를 못 하겠는걸,이라고 생각했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아편전쟁을 다루었다. 도입에 영국인과 중국인에게 어떻게 배우는지 물었다. 영국인은 거의 배우지 않고, 중국인은 굉장히 중요하게 배운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과 영국은 다를 게 뭔가, 빈정거리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러고는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그 결과를 알고, 그 무도함을 할고, 의회에서 9표 차로 전쟁을 승인한 무뢰배들이 결국 이긴다는 걸 알고 있어서, 세계관의 충돌이라는 것이 꽤나 그럴 듯하게 포장한 서구의 세계관이 과연 그러한가 의심하는 거다. 동등한 국가로 보고 자유무역을 청하였다? 그럴 리가. 자신의 우월을 의심치 않았기에 자유무역을 청한 거겠지. 시장이 없이 유지되지 못하는 자신의 부를 위해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약탈하는 제국의 무도함을 본다. 아, 지난 번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미국의 서사에서도 나는 무언가 끔찍해져서 싫었던 거지. 힘의 우위로 스스로의 옳음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가, 싶어서 끔찍했었다. 그 무도함때문에 아편전쟁은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회자될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가지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교훈은 남는다. 평화에 익숙한 거대한 제국이 속절없이 힘을 잃은 뒤에 전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파멸을 모른 체 하는 무도한 파멸의 길로 뛰어든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