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신문스크랩은 원자력관련 이슈를 모아서 보여줍니다. 지난 금요일, 회사의 신문스크랩에서 한겨레의 아침햇발 '국회의사당에 원전을 짓자'(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0669.html)를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설명할 말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커런트 워'란 영화에서 에디슨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고압의 전류로 소를 죽이고, 교류가 위험하다는 여론전을 펼칩니다. 교활한 여론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기의 대중적 이용은 교류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교류와 직류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선택하게 됩니다. 기술은 칼과 같은 도구일 뿐이고, 선택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지금 옳은 게 먼 미래에도 과연 옳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저는 그 논설이 에디슨이 펼쳤던 교활한 여론전처럼 독자들을 두려움을 조장하여 조종할 수 있는 존재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논설은 '원자력발전소가 안전하다면 수소충전소를 지은 것처럼 국회의사당에 원전을 짓고 그 주위에는 주상복합을 지어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살게 하라'고 합니다. 아직까지 수소충전소만큼 컴팩트한 원자력발전소는 없는 상황에서 그 말은 그저 '원자력을 안전하다고 말하는 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논설위원님은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토론에 대해 토론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토론의 결과는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 밖에 없지만, 토론의 과정은 민주주의를 학습할 수도 있고, 공동체의 가치관을 더 단단하게 할 수도 있고, 무언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의 깨달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의 과정에서 협잡이나 사기, 협박이나 조롱이 끼어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상대방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그 선택을 했다고 단정하고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결국은 얻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단정하고 조롱하는 토론자에게 어떤 사람이 동조하고 싶어할까요? 결국에는 토론을 보고 결정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 외면하게 만듭니다. 어떤 결정이든 이뤄지고 난 다음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토론자로서의 예의를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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