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인사합니다,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 이브닝' 영화의 마지막 대사라는데, 뭔지 아냐고 딸이 물었다. 알 것 같은데, 모르겠더라. 트루먼쇼의 마지막 장면이다. 과장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간 짐 캐리가 바다인 줄 알았던 물에 들어가 하늘인 줄 알았던 벽으로 난 작은 문을 열면서 혹은 열기 전에 하는 말이다. 전 세계에 그가 중계되고 있고, 그는 웃으면서 작별인사한다. 숨기 위해서. 

드러낸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중이다. 드러낼 수 있으려면 권력이 있어야 해, 와 그렇다고 해도 드러낸다고 해서 권력이 있다는 건 아니야. 드러내지 말라,는 말은 억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말이기도 해. 숨을 수 있는 것도 권력이야. 숨기거나 드러내거나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권력이기는 하지. 

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겁먹었다는 걸 들키면 안 돼'라고 딸에게 말한다. 목줄이 풀려 달려오는 하얀 개를 보고 금방 울음을 터뜨릴 거 같은 어린 딸에게, 지금은 안 될 거 같아도 겁먹은 거 들키면 안 되,라고 말해준다. 네가 겁 먹은 걸 알아차리는 순간, 상대는 달라져. 네 감정이 전해지거든. 처음에는 들키지 않으려고 겁먹지 않은 걸 연기한 거였어도, 조금 더 그러다보면 정말 겁나지 않을 수도 있어. 사람은 약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해서 나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괴롭히기도 해. 들키지 마, 너의 약함을. 그러니까 너무 드러내지 마.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드러내. 괜찮아. 너 자신을 보호해. 연기하라는 말처럼 들릴까. 그런 의미는 아닌데.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볼 수 있을 때 가끔 본다. 스테이지와 쉐도우, 드러나는 삶과 숨는 삶. 무언가 SNS시대의 은유처럼 보인다. SNS를 먼발치에서 보고 있는 나는 단오처럼 스테이지와 쉐도우가 저렇게까지 다른 삶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여주다를 짝사랑하는 서브남주처럼 '왜 나는 쉐도우에서도 설정값을 못 벗어나지'가 차라리 좋다. 그 간극을 줄여서, 결국 스테이지를 바꾸는 것이, 단오의 목표라는 것도 안다. 지난 목요일의 단오는 심장병으로 결국 죽게 되는 자신의 스테이지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쉐도우의 마음을 좀 더 누리기로 하루를 잊지 않고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스테이지에서 연기할 수밖에 없더라도, 지킬 수 있는 자신의 쉐도우를 좀 더 살기로 했다. 결국 죽는 운명이니 비극이고, 그게 빠를 수도 늦을 수도 있는 게 모든 인간이다. 스테이지와 쉐도우를 가깝도록 해야, 삶이 살 만 해진다. 마음이 버텨주고 시간을 지나가게 할 수 있다. 벌어진 스테이지와 쉐도우 사이에서 상처는 벌어져 피가 흐르고, 죽음을 당기고 마음은 무너진다.

SNS를 쓰는 누구나에게, 스테이지와 쉐도우가 가깝도록, 너무 과한 연기는 하지 말라고, 아무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해주면 되니까, 더 크게 웃지 않아도 되고, 더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되고, 더 크게 화내지 않아도 되고, 더 크게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만, 오직 나만,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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