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책으로 읽은 뒤라, 드라마를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6학년인 딸아이가 완전 재밌다고, 관심을 보이길래 같이 보게 되었다. 책을 썼던 판사가 아예 대본을 쓴다는데, 나는, 아, 남자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완성형의 몃진 여자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서 그 여자 판사에 이입이 안 되었다.

선배 여자 판사가 유산을 했다. 성공을 갈망하는 자신의 상사가 반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였다. 유산한 그 선배 판사가 너무 안쓰러워서, 여주인공 여자 판사는 그 선배 판사의 상사를 처벌해야 한다는 서명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 선배의 슬픔에 이입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유산의 책임을 그 상사에게 돌릴 수 있을까, 것도 역시 모르겠다. 


여성은 예민한 감각을 훈련한다.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거나, 양육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거나, 혹은 절대적인 힘의 열세 때문이던지, 상대의 기분을 알아채고, 말하지 않아도 물어볼 만큼-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분을 맞춰 조심할 수 있을 만큼이 된다.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하면서 그런 감각-눈치?-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우선순위를 자기 안에서 세워두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상한다. 

그 상사는 수시로 부하인 여자 판사에게 '여자들은 데리고 일하기 힘들어''이제 곧 출산할 거 아냐'라고 눈치를 줬겠지만, 상황만을 절단해 보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일을 시킨 것 뿐이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의 강경함이 자신을 지킨다는 생각만 커진다. 


타인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그저 말인데도 나를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칼이 되어 오는 말들에 자기 자신이 설득당하고 나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조직에 속하면서 엄마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성별분업이 여전하고, 조직은 한없이 빡빡해진다. 여성이 조직에 살아남는 것은, 조직의 문화가 바뀌는 것은 정말 요원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날들이 많다. 


예전에 세종청사 공무원 엄마가 과로사했을 때, 기고했는데 실리지 못한 글을 붙여놓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내 몫을 하려는 거였다. 3년 씩 휴직하는 후배들을 말리고 싶어서, 휴직,만을 제도로 보는 정치가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일하는 여성들을 둘러싼 수없이 많은 담론들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 어리석었던 여성이었고, 그 단계 다음에 지금 세 아이의 엄마로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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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청사의 공무원 엄마가 과로사하고, 육아휴직3년을 법제화하겠다는 대선주자의 공약을 보았습니다. 그 엄마는 이미 3년의 육아휴직이 가능했고, 제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보건복지부 공무원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인 저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세금을 받아먹고 하는 일이 없다고 어디서건 욕먹을 각오는 해야 하는 직업이니 언제나 사람이 부족했을 겁니다. 할 일은 많은데도, 사람은 없고, 그런 상황에 아이를 낳아 육아휴직까지 했으니 죄책감이 컸을 겁니다. 여전히 임신이나 출산에 퇴직원을 요구하는 회사들이 있고, 법정 육아휴직도 지켜지지 않는 문화에서 휴직하고 복직할 수 있는 자신의 직장이 고마웠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도 더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저는 육아휴직 기간을 늘리기 보다 육아기 단축근로를 더 많이 선택할 수 있도록, 지금의 제도가 정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3개월 출산휴가만 마치고 복직했던 저는 제 자신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멋진 직장인, 프로다운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담론 속에서 스스로도 그렇게 서른 두 해를 살다가, 아이가 생겼다고 그 사고방식이 금방 바뀌지 않습니다. 회식을 먼저 빠져나오면서도, 출장이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위축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위축되는 순간들에 일과 가정을 이어가면서, 아이를 키우려면 회사가 나라가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을 단련했습니다. 

육아휴직을 길게 사용하면 직장에서 엄마들이 사라집니다. 직장에서 사라졌던 엄마들은 휴직을 마치고, 예전과 똑같이 일할 수 있다는 용맹한 마음으로 일터에 돌아와 똑같이 일하려고 합니다. 직장의 문화는 바뀔 필요가 없고, 똑같이 일할 수 없는 엄마는 괴롭습니다. 
지금의 법은 8세 미만의 영유아를 양육하는 남녀 직장인에게 1년의 육아휴직 또는 육아기 단축근로를 보장합니다. 육아휴직 대신 육아기 단축근로를 선택해서 그 기간 동안 단축된 시간만큼 줄어든 급여를 수령했습니다. 휴직보다 출근하는 게 좋아서 단축근로를 했지만, 육아기 단축근로가 육아휴직과 같은 기간만 허용되는 걸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8시간 노동을 가정해서 1년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면, 2시간 단축한 나는 4년 단축근로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더 많이 육아기 단축근로를 택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했습니다. 8세 미만의 영유아를 양육하는 남녀 직장인에게 1년의 육아휴직 또는 18세 미만의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는 남녀 직장인에게 1년에 준하는 육아기 단축근로(2시간 단축시 4년, 4시간 단축시 2년)를 법제화하고, 더하여 0세 미만 자녀가 있는 경우 10일의 추가 양육 휴가를 제공한다면 엄마들이 가득한 직장에서 문화가 바뀌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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