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9
B. 파스칼 지음, 하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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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자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짓눌러버리는 데는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 증기, 한 방울의 물도 그를 죽이는 데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짓눌러버릴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한층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들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팡세> 180쪽

갈대 같은 존재인 인간,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는 존엄을 갖출 수 있다. 생각에 온 힘을 다했을 때 위대한 갈대로 거듭난다. 파스칼의 갈대는 한낱 갈대이나 우주를 채우는 존재이고, 몸은 나약한 뿌리로 지탱하나 땅과 하나 되는 의지이며, 바람에 휘청거리나 세상 만물의 소리와 교합한다. 우주와 합일치 되는 순간, 갈대는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을 가득 채운다.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 사상가로 그 누구보다 생각하는 갈대이고 싶었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의 <팡세>는 사람들을 신앙심으로 인도하기 위해 쓴 <기독교 변증론> 초고다. 그러나 그의 인도는 “무조건 믿으라, 그러면 천국 간다”는 식으로, 다른 갈대가 흔들린다고 덩달아 휩쓸리는 갈대이길 바라지 않았다.

11살에 이미 <소리의 전파에 관한 논고>를 썼고, 독학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해냈으며, 16살에 <원뿔곡선시론>을 발표한 천재 수학자는 확증이 불가능한 신앙 앞에 마주 서서 컴퓨터처럼 치밀하면서도 지독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파스칼은 계산기와 컴퓨터 원리를 발명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파스칼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에게 사고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은 돌이나 혹은 짐승일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으로의 귀의 이전에 신앙을 찾는 자기 자신, 그의 생각은 당연히 인간 존재 자체를 두고 깊은 물음으로 이어진다.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내놓았는가, 이 세상이 무엇인가,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나는 모른다. 모든 것에 관해서 나는 지족한 무지 속에 있다. (…) 내가 도처에서 보는 것은 무한뿐이며, 이 무한은 나를 일개의 미립자처럼, 또 한순간이 지나면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그림자처럼 둘러싸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바의 전부는 내가 마침내 죽으리라는 것뿐이지만,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피할 수 없는 바로 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107쪽

파스칼의 갈대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물아일체와 합치하는 듯, 엇갈리는 지점이다. 호접지몽이 일반적으로 덧없는 인생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면, 파스칼의 갈대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변증법을 통해 신을 향한 사랑으로 귀의한다.

병을 앓아 하반신 마비로 목발에 의지할 수는 아픈 몸으로도 파스칼은 포르루아얄 수도원 생활을 엄격하고 철저한 고행으로 일관했다. 지병으로 인해 39세에 갈대처럼 짧은 삶을 마감하였으나 병으로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긴 단편적인 초고는 이후 정리를 통해 <팡세>로 세상을 밝히는 사고(불어로 팡세)의 불이 되었다. 파스칼의 친구들이 초고를, 후세에 걸쳐 다시 정리한 900여 개 단편 모음집은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다. 허나 가감이 없는 만큼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절절한 애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그는 횃불을 들고 대지를 비췄다.’ 파스칼이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발췌한 문구이다. 이후 신에 대한 사상을 넘어서 수많은 실존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된 치열한 사고의 결정체 <팡세>는 돌 혹은 짐승이 들끓는 갈대밭에서 그래도 높고 환하게 타오르는 횃불이다.* 

밑줄긋기
인간이랑 모든 각도에서 보지 않았다는 데는 화를 내지 않지만 오류를 범했다는 말을 듣기는 싫어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인간이란 원래부터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과 감정의 지각은 항상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보고 있는 방면에서는 본래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12쪽

감성은 이성을 허위의 외관으로써 기만하고, 또 감성이 이성에게 주는 이러한 속임수를 이번에는 감성이 이성에게 받곤 한다. 이성이 그것을 보복하는 것이다. 넋의 정념은 감성을 교란하고 그릇된 인상을 그에게 부여한다. 양자는 서로 다투어 속고 속인다. 55쪽

나는 때때로 운명에 대해 스스로 역행하려고 애쓴다. 운명을 극복하는 영광은 나로 하여금 즐겁게 운명을 극복하게 한다. 그 대신 나는 때때로 행운 속에서도 싫증을 일으킨다. 66쪽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요,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원하고 있다. 또 행복해지려고 언제나 준비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도 행복해질 수가 없다. 93쪽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왜냐하면 머리가 발보다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경험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은 돌이나 혹은 짐승일 것이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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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향연 - 끝나면 수평선을 향해 새로운 비행이 시작될 것이다
한창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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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기분 풀어진 주인처럼 인자스러워졌다. 진짜 봄인가. 봄이라 해도 되나 몰라. 아무래도 될 듯싶다. 포근하다. 비로소 나는 내 식솔들, 고양이와 동백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온갖 벌레와 풀잎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진정 봄이 왔음을 선포한다. 다들 안녕. (…)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253~254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그러니 견디어라. 책 마지막 문장이 내 속을 따스하게 풀어준다. 견디지 못하고 얼마나 도망치고, 외면하며 겉으로 아닌 척 하나 이대로 살아야 되나 싶었던 시절이 누구라고 없었겠나. 

늦가을 방으로 들어온 모기 한 마리 앵앵 날갯짓 덕에, 왼손 검지 따끔함에, 술 취해 선잠을 자다가 얼결에 일어나 무심코 집어든 소설가 한창훈의 산문집 <한창훈의 향연>을 붙들고는, 새벽 기도회 나가는 어머니가 튼 라디오 찬송가 소리가 들릴 즈음이 되어서는, 겨울 재촉하는 창 밖 빗소리가 거문도 해무가 뭉쳐 내리는 듯 했다.

어젯밤 무겁게 툭툭 술상 발밑으로 소주병뚜껑과 뒤섞여서 떨어지고도 갈치 주둥이에 매달린 낚싯줄 납덩이처럼 입 안에서 깔깔하고 텁텁하게 찌꺼기들이, 갈칫국 한 사발 들이킨 듯 책 한 권 독파에 말끔히 가실 수 있구나, 해서 신기하기도 하다. 소설가는 말하길,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혹독한 계절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습습한 갯것들이 먹여 키운 한창훈의 소설을 읽고는 참 구성지면서도 재밌다 했으나, 관광객처럼 그뿐이었다. 관광 잘 하고 돌아와서는 힘내서 일하자 하면 뭔가 좁아터진 게 넓어지는 맛도 알겠지 했는데. 63년생인 그이보다는 한참 젊은 축인데도 닻 같고 돛 같은 당신도 늙는군요. 저도 그래요,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방금 전에 전어 눈알 같은 눈물 한 방울 떨굴 뻔했다.

그이의 첫 산문집은 소금기 밴 흰머리 섞인 봉두난발 머리카락이 하늘로 뻗대 있는 삶 이력이 만선처럼 담겼다. 이제껏 그이의 소설로 난간 위에서 수면 위 출렁이는 모양새만 봤다면, 지금은 갯바위에 게고둥처럼 배를 붙이고 누워 바닷물 속으로 고개를 들이고 물속에서 아린 눈을 뜨고, 그래도 휘익 한 번 본 기분이다.

실제 바다 속에 용궁은 없고 구멍 난 그물, 폐타이어 등속이 그득하듯이 책 속에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로 돌아온 시절 내내 외로움, 시련, 고독, 가난과 그에 따른 악다구니리가 미역 점액질처럼 진득하다.

허나 싸질러 놓고 사는 게 인간의 생겨먹은 꼴인 것을, 바다는 그래도 ‘수십만 마리의 학꽁치 떼, 서해안으로 산란하러 가는 중인 그것을 하나같이 알이 통통 배고, 흰 정소가 가득 차 있었다. 떠난 곳에 남은 것은 이렇듯 생명들의 이동과 내림’, 향연이다.

이 책에 회에 양념 도배하듯 가타부타 설명을 다는 게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마디만 더 하자면 먼 뱃길 나갔다가 돌아오는 부모의 작은 동력선 엔진소리처럼 반가운 책이다. 해풍을 맞은 쑥이 약효가 좋듯이 이 책에 실린 그이 주변 인물들의 얘기 또한 이전에 알던 이들인가 싶게 뱃속에 회가 동한다. 그래서 몇 권 더 소설, 시집을 사러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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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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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시기가 우리 대에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식 대에는 목욕이란 풍습이 존재했던 호시절을 환상처럼 그리며, 선조들이 참 파렴치하게 지구를 말아 먹었다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아, 나는 파렴치한 사치를 누리고 있구나. 누가 이런 나를 본다면 참 궁상스럽게 산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다가 목욕 한 번 하면서.-50쪽

"어라? 고등어 먹는 게 왜 변태야? 개고기는 괜찮고 고등어는 변태야? 자기는 독일 사람이니까 생선 안 먹고 자랐지.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고등어가 고향 음식이란 말이야."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으이그, 그럼 나도 먹지 말라는 소리지. 그냥 안 먹고 말지. 어떻게 나 혼자 먹으려고 고등어를 굽겠어? 근데 당신 말이 맞네. 알았어."-63쪽

평소에 말수가 적은 그 친구는 과일 장수에게 왜 소비자들이 남아공 과일을 사지 말아야 하는지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보이콧을 하는 사람들이 유럽에도 소수였다는 것을. (…) 나중에 남아공에서 인종차별법이 철폐되고 흑백 차별 없이 자유 총선거를 치러 정치적으로나마 인종차별이 없어지는 일이 외국의 경제적 압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마음이 흐뭇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정치적으로 종결시키는 데 내 힘도 한몫한 게 아닐까 해서.-69~70쪽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77쪽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결혼 초반에 직업 세계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관이 확고하게 서기 전에 일에 대한 유혹이 먼저 들어왔다면, 승부욕이 강한 우리의 성격으로 보건대 진로를 그 방향으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런 후회 없이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폄하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런 행복감이 나만의 거짓말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이다.-85~86쪽

아이들 나이가 십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는 그나마 쥐고 있던 고삐도 늦추고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른이라고 우리가 더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참견하는 일이 낯간지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 곁에 친구처럼 있어줄 뿐이다.-96쪽

우리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이 평생 신념과 사랑을 가지고 전념할 일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공부든 기술이든 상관없다. 공부 잘해서 성공한 판나 교수도 조직의 노예가 도리 수 있고, 평범한 기술자도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늘 강조했다.
"너에 관해서 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엄마 아빠도 네 일에 관해서 너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어."-103쪽

느낌과 감은 당장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우니 남 보기에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총괄적인 성격이라고 나는 믿는다. 느낌과 감에는 경험과 기억, 잘되고자 하는 인간적 본능, 진화론에 입각한 인류의 지혜가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110쪽

"그, 그걸 말이라고 해? 공부도 안 끝난 애가 임신하면 어떡해? 그 애 인생은 어떻게 되고?"
"인생이 어떻게 되긴? 우리 아직 건강하겠다, 부모가 힘껏 도와줄 텐데 아기 키우면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걸로 사람 인생 안 망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이나 마약 같은 마음의 병이야. 그건 부모가 암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잖아."
남편은 화를 낼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더니 결국 "그래, 당신 말이 맞아" 하고 대답했다.-118쪽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무적으로 여겨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았다. 재미있게도 평소에 빠릿빠릿하게 잘 따라오는 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냈고, 평소에 이해가 좀 느린 학생들은 나와는 다른, 그러나 때로는 나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냈다.-233쪽

졸업식 날 부모들은 그 말썽 많았던 수학 전공반의 평균 점수가 2점(미국식으로 B에 해당)이란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낙제 점수로 시작한 열등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상위권의 성적을 낸 것이다. 또 이 사건에서 자칫 피해자가 됐을 수도 있는 우등생들은 협동 작업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적인 공부를 경험하고 좋은 점수까지 유지했다.-242쪽

‘능력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은 구별되어야 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일에 대한 의욕을 잃겠지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다. 자칫 잘못하면 보조금을 받아 연명했을 사람도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244쪽

시험 볼 때 책, 참고서, 필기 노트를 사용해도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달달 외워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응용 능력을 묻는 창조적인 문제가 출제되기 때문이다.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는 시스템이랄까? 자율성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공부와 연구를 하는 것은 치열한 경쟁 시스템에서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246쪽

나는 나처럼 조금은 치사하고 비겁한 보통 사람도 자유와 자긍심에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지구 저편에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격려를 받고 싶었다.-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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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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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녹색평론> 편집자이자 생태운동가인 김종철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허나 커다란 대학교 세미나실이 무색하게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오붓하니 좋다고 했다. 어차피 자신과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몇 안 되는 터, 들을 귀 있는 사람들만 들으면 족하다 한다.  

생태에 바탕을 두고 종과 획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진단하는 그의 얘기는 내가 몰랐거나 혹은 알아도 그러려니 하는 관성으로 사는 부분을 꼬집었다. 그의 얘기가 이른바, 보수 언론을 떠나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쉬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일례로 들자면 그는 오는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협약을 두고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후협약을 맺는 주체들이 정권 창출이 목적인 정치인들이고 보면, 그들의 선거판은 생리적으로 기업의 자본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뿌리를 자본에 두고, 지구환경을 논한다는 자체가 난센스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지구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데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래도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식으로 살살 달래면서 세뇌를 한다는 것이다. 그이의 결론은 <녹색평론>지에서 늘 주장하듯이 자발적 공동체를 통한 순환 구조의 삶이며, 그게 가능한 이유는 딱 한 가지 ‘어울려 사는 재미’다. 그의 얘기는 내게 참 마중물 같아서 속에서 뭔가 솟구쳐 오르는 듯하나, 바쁜 일정에 쫓겨 강연을 채 다 듣지도 못하고 나와서는 도루묵이 되기 일쑤이다.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7쪽

마침 김종철 선생님의 말씀에 잘 맞는 삶을 읽었다.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저자 임혜지는 독일 남자와 독일에서 사는 52세 평범한 주부로 독일에서 건축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이름이 그 방면에서 그다지 유명한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결혼 초반에 직업 세계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관이 확고하게 서기 전에 일에 대한 유혹이 먼저 들어왔다면, 승부욕이 강한 우리의 성격으로 보건대 진로를 그 방향으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85쪽

그녀 스스로 말하길, 그녀는 프리랜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실력이 부족하거나 경쟁에 뒤쳐졌다가 보다 남편과 두 아이가 여유자작하게 늘 행복한 삶이 화두이다.

물론 그랬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런 후회 없이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폄하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런 행복감이 나만의 거짓말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86쪽

그럼 그녀의 혼혈 아이들이 독일 최고 명문대라도 수석 합격한 것일까. (독일에는 세계적 명문 랭킹 대학이 없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게 한두 개 대학의 실력이 국력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단다.) “우리 아이가 공부는 못해도 성격은 좋으니 걱정 마세요.” 아이의 유급을 걱정하는 학교 선생님을 두고 엄마랍시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읽었을 때, 이 책은 국민 필독서가 되어야 할 책이다.

“어라? 고등어 먹는 게 왜 변태야? 개고기는 괜찮고 고등어는 변태야? 자기는 독일 사람이니까 생선 안 먹고 자랐지.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고등어가 고향 음식이란 말이야.”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으이그, 그럼 나도 먹지 말라는 소리지. 그냥 안 먹고 말지. 어떻게 나 혼자 먹으려고 고등어를 굽겠어? 근데 당신 말이 맞네. 알았어.” 63쪽 

고등어를 금하노라, 라는 제목의 연유가 된 대화는 친환경 혹은 동물보호 단체 회원들의 대화가 아니다. 평범한 저녁 식탁에 모인 식구들끼리 나누는 대화다. 침 튀어가며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러니 어떠니? 하고는 그래? 알았다, 는 식이다. 평범하다고 하지만 몸에 배이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삶이다. 이게 고행이 아니라 머리로 따지고 마음으로 이해하기 전에 즐거운 일상이다.

이들이 4인 식탁에서 서로 존중하는 방식은, 과장을 하자면 고등어를 통해서 세계인을 대상으로 확장한다. 그깟 고등어 안 먹는 게 뭐가 대단할까 싶지만, 구호가 크면 클수록 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증거일 뿐이지 않은가. 내 가족이 소중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 공존을 위해 노력할 때 우리 가족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물론 당연하다고 말을 하지만 대부분 말 뿐이다.  

1등을 외치는 승자독식사회의 절정인 한국에 비해 독일이 좀 더 성숙한 분위기라는 건 알지만 그 안에서도 이런 가치가 보편은 아니라고 말한다. 삶이 예배가 되는 삶이라는 구호를 많이들 쓰는데, 딱 이들이 사는 방식이 삶이 공존이 되는 삶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거창한 이슈로 무게를 잡는 책이 아니다. 임혜지 아줌마의 독일생활기는 폐경을 맞은 뒤 조심스런 성생활, 극과 극인 남편과의 아옹다옹 다툼, 난독증으로 고생했던  두 아이의 어린 시절, 한국과 독일을 떠나 밉살스런 아줌마들(특히 시어머니)의 소소한 일상부터 독일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놀라는 독일인들과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태도 등등 그녀를 둘러싼 삶 전반을 조근조근 설명한다. 

그녀와 그녀의 식구들의 이야기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보고 읽고 참여한 환경, 인권, 교육, 나치즘(독일이다 보니 특히) 등 민감하고 무겁고 중요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여유롭고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풀면서도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어서 설명한 세미나, 강연, 책, 캠페인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나처럼 조금은 치사하고 비겁한 보통 사람도 자유와 자긍심에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지구 저편에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격려를 받고 싶었다. 281쪽 

보통 사람, 이 책을 학자나 정치가나 운동가 딱지 붙는 치들이 쓰지 않았다고 해서 평가가 절하되거나 이대로 흐지부지 책 무덤에 파묻혔다가 파지가 되는 건 아닐까, 조마심이 난다. 책을 읽고 이런 우려를 하기는 정말 처음인데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런 권위의식의 철저한 깔아뭉개기다! 특히 이데올로기에서 도덕으로 살짝 갈아탄 권위주의! 하여, 자칫 여성주간지에 실릴 만한 주부 에피소드가 수필집 코너가 아니라 인문학 코너에 분류되었는지 누구든 이 책을 보면 그런 의심을 거두지 않길 바란다.

누가 읽어도 좋지만 무엇보다 부모와 아이가 꼭 함께 읽고, 토론하고, 대화를 나눴을 때 제대로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대한민국 부모라면 사사건건 간섭하는 자녀의 가치관, 진학, 성, 장래 희망, 가치관 등을 두고 그녀는 아이들의 선택과 판단에 맡긴다. 유독 그녀가 한 가지만은 막았는데, 중독 우려가 있는 컴퓨터 게임이다. 그녀가 막는 딱 한 가지를 우리 부모들은 인정하고, 나머지는 정 반대다. 누가 정답일까?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누가 보통 사람이고, 누가 이상한 사람인지 판단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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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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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맹률이 작년 기준으로 1.7%인 현실로 보면, ‘한국의 책쟁이’라는 한겨레신문 정기 꼭지는 꽤 근사한 생각이다. 하지만 문맹률과 독서량이 반비례할 법한데, 또 그게 아닌 것 또한 현실이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그 역시도 무색하다.  

원인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고, 그저 ‘보기’에 능한 이들은 많아도 ‘읽기’에 능한 이가 점점 드물기만 하다. 그래도 늘 애들한테 책을 읽어라, 읽어라 입버릇이 달라붙은 우리이고 보면 책 위에 책 두께만치로 먼지가 더께마냥 눌어붙을지언정, 귀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책 한권 들고 다니는 게 폼이 난다는 풍토라, 책시장이야말로 물건 회전이 가장 빠르고, 유행을 가파르게 치고 올라오는 바닥이다. 책 한 권을 내고 ‘모 아니면 도’인 로또판인거야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하루키의 신작 선인세가 십수억 원에 달하는 게 이해 못할 일도 아니란 말이다. 평론가가 말하길 인터넷 서점에 올라오는 리뷰를 보면 상품이 책일 뿐이지, 내용은 일반 기성품 품평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숨을 쉰다.  

신간이 억수로 쏟아져 나오는 요즘 과거 오래된 애물단지,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책을 보물단지마냥 끼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임종업 한겨레신문 선임 기자가 자신이 신문에 쓴 기사를 모아서 낸 <한국의 책쟁이들>이다. 

해묵은 고전도 개정판이 시시때때로 나오는 판에 때깔(디자인)이 볼품없는 책들은 상품가치가 뚜욱 뚝 떨어져서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마련이다. 개중 책 중간상 김창기 씨 역시 책을 책으로 보기보다는 골동품 정도로 보는 장사꾼이지만, 그의 얘기가 한 자락 끼어있다고 해도 책 전체를 나무랄 정도는 아니다. 어쨌거나 그이 같은 이가 있어서 책에 소개된 나머지 인물들이 빛나는 것도 맞는 말이다.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각자가 책 한 권으로 나와도 모자라지 않겠으나 짤막한 신문 기사라는 애초의 한계에 몇 가지 얘기만 도드라져 보이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각자 비중이 차별을 둘 수 없었던 것 또한 같은 이유로 마땅치 않다. 띄엄띄엄 기사로 읽을 때는 몰라도 한꺼번에 몰아넣고 보니 기사마다 자연스럽지 않고 짜낸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이 책은 임종업 기자의 것, 그의 입맛에 맞춘 것이니 불평은 그냥 이 정도다. 이들이 한국대표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이들은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나는 상서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취미로 혹은 재산불리기로 ‘모으기’만 열중했다면 이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할 사람들이다. 

책에 소개된 인물들의 고민은 대충 한 가지로 모인다. 서재다. 거저로 기증을 하겠대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가 기사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사료 가치든, 희소가치든 뭐든 특출하지 않은 책은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파지나 불쏘시개로나 쓰일 일이다. 장서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쌓은 책은 그래서 딱 자신의 업이다. 책을 읽는 일이 행복한 만큼 사다 나른 책들은 넘지 못할 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사재기를 해서 산 게 아닌 이상, 그 특출한 안목은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고, 또 상품만 판을 치는 책 시장에서 물려 배워 익힐 만한 건 확실하다. 위에서 선인세 얘기를 들먹였지만, 반대로 누구라도 팔리지 않는 책을 출간할 때에는 용기 혹은 무모함이 필요한 법이다.

이럴 때 책쟁이들의 존재는 그들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경지는 다 제각각이지만 내가 아는 책쟁이들만 해도 꽤 되는데, 책 같지 않은 책을 사는 건 어설피 아는 이들이나 범하는 실수지 이들의 책責이 아니다. 이 책에서 잘 드러나거니와 내가 아는 그들은 책 한 권을 사도 꼼꼼히 따지는 안목을 가진 이들이다. 책에 미친 대표적 인물 이덕무의 호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처럼 책이 좋아서 스스로가 스스로의 친구로 살면서도 세상 만물과 친구로 사는 이들이 곧 이 다음 권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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