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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향연 - 끝나면 수평선을 향해 새로운 비행이 시작될 것이다
한창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날이 기분 풀어진 주인처럼 인자스러워졌다. 진짜 봄인가. 봄이라 해도 되나 몰라. 아무래도 될 듯싶다. 포근하다. 비로소 나는 내 식솔들, 고양이와 동백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온갖 벌레와 풀잎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진정 봄이 왔음을 선포한다. 다들 안녕. (…)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253~254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그러니 견디어라. 책 마지막 문장이 내 속을 따스하게 풀어준다. 견디지 못하고 얼마나 도망치고, 외면하며 겉으로 아닌 척 하나 이대로 살아야 되나 싶었던 시절이 누구라고 없었겠나.
늦가을 방으로 들어온 모기 한 마리 앵앵 날갯짓 덕에, 왼손 검지 따끔함에, 술 취해 선잠을 자다가 얼결에 일어나 무심코 집어든 소설가 한창훈의 산문집 <한창훈의 향연>을 붙들고는, 새벽 기도회 나가는 어머니가 튼 라디오 찬송가 소리가 들릴 즈음이 되어서는, 겨울 재촉하는 창 밖 빗소리가 거문도 해무가 뭉쳐 내리는 듯 했다.
어젯밤 무겁게 툭툭 술상 발밑으로 소주병뚜껑과 뒤섞여서 떨어지고도 갈치 주둥이에 매달린 낚싯줄 납덩이처럼 입 안에서 깔깔하고 텁텁하게 찌꺼기들이, 갈칫국 한 사발 들이킨 듯 책 한 권 독파에 말끔히 가실 수 있구나, 해서 신기하기도 하다. 소설가는 말하길,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혹독한 계절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습습한 갯것들이 먹여 키운 한창훈의 소설을 읽고는 참 구성지면서도 재밌다 했으나, 관광객처럼 그뿐이었다. 관광 잘 하고 돌아와서는 힘내서 일하자 하면 뭔가 좁아터진 게 넓어지는 맛도 알겠지 했는데. 63년생인 그이보다는 한참 젊은 축인데도 닻 같고 돛 같은 당신도 늙는군요. 저도 그래요,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방금 전에 전어 눈알 같은 눈물 한 방울 떨굴 뻔했다.
그이의 첫 산문집은 소금기 밴 흰머리 섞인 봉두난발 머리카락이 하늘로 뻗대 있는 삶 이력이 만선처럼 담겼다. 이제껏 그이의 소설로 난간 위에서 수면 위 출렁이는 모양새만 봤다면, 지금은 갯바위에 게고둥처럼 배를 붙이고 누워 바닷물 속으로 고개를 들이고 물속에서 아린 눈을 뜨고, 그래도 휘익 한 번 본 기분이다.
실제 바다 속에 용궁은 없고 구멍 난 그물, 폐타이어 등속이 그득하듯이 책 속에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로 돌아온 시절 내내 외로움, 시련, 고독, 가난과 그에 따른 악다구니리가 미역 점액질처럼 진득하다.
허나 싸질러 놓고 사는 게 인간의 생겨먹은 꼴인 것을, 바다는 그래도 ‘수십만 마리의 학꽁치 떼, 서해안으로 산란하러 가는 중인 그것을 하나같이 알이 통통 배고, 흰 정소가 가득 차 있었다. 떠난 곳에 남은 것은 이렇듯 생명들의 이동과 내림’, 향연이다.
이 책에 회에 양념 도배하듯 가타부타 설명을 다는 게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마디만 더 하자면 먼 뱃길 나갔다가 돌아오는 부모의 작은 동력선 엔진소리처럼 반가운 책이다. 해풍을 맞은 쑥이 약효가 좋듯이 이 책에 실린 그이 주변 인물들의 얘기 또한 이전에 알던 이들인가 싶게 뱃속에 회가 동한다. 그래서 몇 권 더 소설, 시집을 사러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