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송인혁.이유진 지음 / 아이앤유(inu)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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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연예인 소식은 시시콜콜 듣고 보지만, 정작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막막할 때가 있다. 요즘처럼 집이 주거 개념보다 투자 개념으로 이해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동네 재개발 소식이 아니라면 뭐, 상관없다는 투다. 주간지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지역구 단파 라디오와 마을 신문 등 ‘풀뿌리 언론’ 기사를 봤다.

작지만 알찬 성과를 거두고 있는 지역운동의 바람직한 소식이다. 하지만 어려움도 적지 않다. 대부분 상근자가 두셋에 회비, 배포, 취재 등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어렵게 꾸려나가는 형편이다. 후원이나 지원 손길을 전제하다보니 장기적인 전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데다,  공동체 라디오의 경우, 공적 방송 제작 지원 예산 중단에 따라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몇몇 채널이 폐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을 넘어서 관심을 끌어낸 몇몇 사례가 있지만 지역 내에 한정한 기사의 한계도 명확한 편이다. 그렇다면 풀뿌리 언론을 비롯해 지역과 예산의 한계를 넘어서 소통망의 대안은 없는 걸까?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이, 개개인이나 작은 목소리가 주류 매체를 넘어서는 시대가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접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그들의 얘기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그 가능성 안에 살고 있다.

소통의 비용이 0에 도달하여 인류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그 누구와도 쉽게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사상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조직이나 그룹에 속한 형태가 아닌 전 인류가 나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제4의 스크린이다. 24P

있게 될 것이다, 아니라 있게 된 것이다, 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이야기를 이들은 누구인가.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의 저자들로 모두 186명이다. 연령, 직업, 가치관, 성별, 거주지역 등이 다른 이들은 이 책을 만드는 데에 공감해 자신의 힘을 조금씩 보탰을 뿐, 자신들이 그저 바다에 물 한 방울 정도라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지역과 비용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제란 ‘사람이 원할 때 디지털 세상에 접속하는 형태가 아니다. 이 세상 자체가 디지털과 완전히 융합되어 현실 세계에 디지털이 입혀진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가상 세계의 모습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동기화’된 현실이다. 그리고 그 초창기 시작 모델이 '트위터(twitter)'이고, 이들은 트위터리안(트위터 사용자)들이다.

사전 풀이를 옮기자면 트위터는 블로그의 인터페이스와 미니홈페이지의 '친구맺기' 기능, 메신저 기능을 한데 모아놓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NS)이다. 그런데 뭐?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는 거야? 이거 오타쿠들 얘기인가?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자들에 의하면 난 ‘제3스크린’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휴대폰과 PMP를 가지고 있으며 나름 블러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소통보다 나만의 놀이(?) 세계에 빠진 나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3의 스크린과 제4의 스크린 사이 간격은 라디오에서 TV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제1과 제2의 스크린만큼이나 넓을까?  

‘이외수도 빠졌다는 트위터, 난 왜 재미가 없지?’가 작년 9월 9일 뉴스 머리기사인데, ‘김연아·김제동·오바마 공통점은? 트위터리안’(2009.11.16)로 이어지더니, ‘트위터 네트워크의 힘, 1살짜리 영아 살렸다’, ‘이석채 KT 회장 '트위터'에 꽂히다’(2010.02.02)까지 트워터는 엄청난 속도로 놀라운 전파력과 장악력을 보여준다. ‘트위터 인기 주춤?…사용자 석 달 새 26% 감소’까지 올라오는 판이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쉽고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무쟈게’ 재미있다는 게 책 저자들을 비롯해 주변 사용자들의 의견이다. (트위터에 관한 정보를 책으로 소화하는 게 편안한 나는 적어도 재미만큼은 ‘취향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다면 소통 비용 ‘0’에 쉽고 간편한 빠른 소셜 네트워크의 장점은 정치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오바마를 언급한 블러그의 포스팅 건수는 무려 5억 건이었다고 한다. 훨씬 더 강력한 자금력을 가진 매케인은 1억 5,000만 건이었다. (…) 오바마의 팔로워는 당시 무려 13만 명이었다. (…) 블러그는 네티즌이 찾아와야 읽을 수 있었지만, 트위터는 그를 팔로잉한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그룹 메시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였다. (…) 매케인 진역이 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의 팔로워는 단지 5,000명 정도였고,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136~137P

우선 이 책이 정동영, 노회찬 등 인기 트워터리안 정치인 등 트워터 홍보물이 아닌 새로운 소통 방식 SNS에 대한 환호와 열광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읽으면 책의 마지막 7장 ‘소셜 미디어가 세상을 바꾸다’를 눈여겨 읽을 만하다. 

2009년 6월 이란의 부정 선거를 막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평화 시위를 하던 열일곱 살 소녀가 총격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란 정부가 신문, 방송을 통제하고, 인터넷 서비스망 접속을 차단했지만 휴대폰 촬영 영상은 페이스북과 유투브를 통해 전 세계에 퍼졌다.

(이란) 정부가 트위터 접속 IP를 막아도 프록시라는 우회 IP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차단을 피해나갔기 때문에, 정보를 통제하는 데에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의 트워터 사용자들은 이란 국민들이 트워터를 통한 항의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게 자신의 서버를 프록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운동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348P

외국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촛불집회 때나 용산 참사 때 웹캠과 노트북을 들고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하던 시민들이 SNS의 주역들이다. 당시 정치적 성격과 거리가 먼 요리전문 사이트 ‘82쿡닷컴’을 비롯하여 몇몇 사이트는 촛불 집회 참여를 독려했다는 이유로 코미디처럼 ‘좌빨’ 사이트 혐의를 받았다. 물론 선동 주체는 정부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몇몇 메이저 언론이다.

수익을 내는 상위 20%가 전체 관심의 80%를 대변하는 팔레토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현재 미디어 시스템에서는 축소, 과장, 왜곡 보도를 막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풀뿌리 언론은 대안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에서 저자들은 기술의 발전이 자신의 이익 증진을 위한 방향으로 커나가듯이 보이나 실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전망하지만, 그 주장처럼 소셜 네트워크가 ‘소통, 개방, 참여’의 진짜 모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 책에서도 현재 트워터리안 100명 중 10명 정도만이 주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로 수익구조와 직결되는 트래픽을 들고 있는데, 현실처럼 영향력이 몰리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사회 활동이 활발한 30~40대가 주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 산업의 하향세의 원인이 매체 간 경쟁이 아닌 대중의 소비 형태 변화이며,  ‘언론매체의 성향에 따라 여과되지 않고, 아무리 소수의 목소리라도 개인이 알고 싶은 정보는 언제라도 얻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역할을 소셜 네트워크가 담당하는 현실이다. 이런 의미라면 나도 이미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위대한 집단지성의 힘’이 사례가 아닌 현실로 발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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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 무위당 장일순 잠언집
김익록 엮음 / 시골생활(도솔)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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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처럼 마음에 가볍게 내려앉는 깃털 같은 구절, 그래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이다.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밑줄을 긋는 습관을 들였으나, 피곤을 가장한 게으름에 집에서는 책을 펴들 엄두를 못 내니, 지하철과 버스가 도서관이다. 그래서 우선 밑줄 대신 페이지를 접어놓는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은 접기를 포기했다. 짧은 글 모음은 다시 읽어도 시간 반이면 충분하건만, 내내 들고 다니면서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어보니 어디 한 군데 특출하게 대하는 게 의미 없다 싶었다. 중간 쯤 읽으니 접힌 페이지가 거지반이 넘는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지요. 세상에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니에요?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요. ‘조 한 알’ 78쪽 

이 책은 좁쌀 한 알, 일속자(一粟子) 장일순의 잠언집이다. 장일순은 사전에 실린 짧은 소개에 따르면 ‘한국의 서화가·사회운동가·정치가.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자연복구를 주장하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서예에 뛰어났고 만년에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얼굴 난초' 작업’을 했다‘고 나온다. 

94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혹여 감시를 받는 처지에 다른 이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부러 글을 써서 남기지 않았지만, 일속자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여전히 따뜻한 입김이 가시지 않았다. 따뜻함에 끌려 몰려온 낮도깨비들이 그의 얘기를 귀동냥하였다가 몇 권 책으로 풀어놨다. 이 책은 2009년, 서거 15주기를 맞이해 여직 기억에 남은 얘기들을 모았다. 

바닥에 떨어진 좁쌀이 잘 보이지도 않지만, 혹여 밥에 섞어 내 앞에 두었다 해도, 걸신이 들린 뱃속은 눈을 감고 코를 막고 혀를 말고 느낄 새도 없이 꾸역꾸역 삼켜서는 잠시 묵혔다가 떠밀듯 몸 밖으로 내 보낼 터이다. 그래도 좁쌀 한 알은 내 눈을 밝히고 내 귀를 뚫고 혀에 감각을 찾아줄 것이다. 장일순은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을 빌어서 우주와 나락 한 알, 풀 한 포기에 함께 하신다고 한다. 당연한 순리이나 10원도 안 되는 것들은 당최 관심 밖으로 점점 떠밀려 가는 세상에서 그 얘기는 참 달고도 쓰다. 

작은 것들, 못난 것들, 깨진 것들에 대한 각별한 마음씀씀이는 일속자의 삶을 관통하는 줄기이다. 허나 쇠막대 같이 단단한 듯해도 곧 삭는 줄기가 아니라 흐르는 물줄기와 같아서 시시때때로 찾아 들어서 마름이 없고 쉼이 없다. 그가 내어주는 삶을 선택하여서 그렇다. 그리고 흐르는 물은 수도꼭지가 아니어서 만물이 깃든다고 한다. 청강(靑江)이라고도 호를 썼던 장일순의 삶이 그랬다. 

예수가 하필이면 왜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서 태어났을까요? (…) 인간 세상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 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몽땅 해결을 하러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일체 만물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 94쪽

무위당(無爲堂)이라고 자신을 불러달라던 장일순은 동학과 천주교를 아우르며 스스로가 사상의 화합을 이루어 내어서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에서는 목사 이현주와 대담을 하면서 노자와 예수님을 앞서고 뒤서고 없이 나란히 하여 풀어냈다. 이 책이 점점 낡아갈수록 대신 눈이 맑아졌던 좋은 기억이 있어 장일순의 책은 찾아 읽으려고 하였다. 

이 얘기는 반대로 내가 세상 핑계대면서 점점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조용헌은 무위당 집에서 시장까지 도보로 15분 정도의 거리지만, 무위당은 보통 두세 시간이 걸렸다고 기억한다. 그 사이 만난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는데, 엿장수, 리어카 행상, 소매치기, 창녀 등 누구여도 마찬가지라 했다. 아마 빈 들판에 서 있다 해도 ‘풀섶에서 들려오는 (…)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 그 벨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라고 말하는 무위당이라면 사람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고스란히 실천한 이다. 그러니 무위당을 알았다면 이것저것 말 앞에 말을 홀치고 겹치고 덮어 씌워 핑계를 댈 게 없다. 그냥 속담 그대로 살았으니 뭔 말을 더 보태겠는가.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에 실린 글들도 어디서 들은 듯도 하고 이미 아는 듯도 하지만 입방정이 아니라 삶으로 걸려 나온 한구절 한구절은 비비꼬아놓은 어지간한 사상서보다 쉽고 가벼우면서도 어렵고 무겁다. 

운 좋게도 2010년 새해를 시작하는 즈음에 이 책을 읽었다. 요대로만 살자고, 살려 노력하자고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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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눈을 달랜다 -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60
김경주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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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아는 시인 형님이 한 분 계시다. 대여섯 권의 시집을 내셨지만 창비나 문지 같은, 이른바 한국 시단의 유명 시인들의 이름으로 익숙한 출판사를 통해서 나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형님의 시가 동호회 수준이라는 건 아니다. 가끔 재미삼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형님의 책이 절판일 때가 많다. 난 그때마다 책이 잘 팔려서 그랬거니, 하고 사인본의 고이 간직한 책들을 슬쩍 본다. 

농 부 같고 잡역부 같은 오십 줄 형님은, 필경 어려서 농부로 살다가 도시에서 잡역부로 살았지만, 늘 속에서 꺼낼 시어가 많다고 하셨다. 아무려나, 이 얘기를 김경주 시인의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앞에 놓고 들먹이는 건, 형님도 그렇지만 김 시인도 그렇고, 고상하게 들리는 시인이라는 어감과 다르게, 꽤나 투박하게 부대끼는 삶을 견디는 부류들, 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그 렇지 않은 시인들이 더 많아야지 믿고 싶지만, 내가 아는 가장 시를 잘 열심히 쓰고 진실하게 쓰는 시인, 형님은 그랬다. 그래서 내가 가진 시인의 기준은 그 형님이다. 김경주 시인의 이름을 간간히 여기저기에서 본 듯하다. 그래서 저이가 시인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시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책 꽤나 읽었다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 한두 시간씩 잘도 떠들지만 시를 두고 읽는 고통부터 호소한다. 동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게 서로 암묵적 동의를 하고나면 시집의 대여섯 배 두껍고 깨알 같은 글자가 박힌 책을 들먹이면서 딴 소리를 늘어놓는다. 우리가 시인에 대해 늘어 논 얘기라고는 화간이냐, 강간이냐를 놓고 제자와 소송을 벌이는 추하게 늙은 시인에 대해서였다. 대학시절 선생이었고, 말을 줄여서 썼다고 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점점 길어지는 평균수명처럼 왼팔은 자랐다 점점 귀여워지는 세계에 나는 오른팔을 사용한다 아무도 부도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팔꽃은 까만 활명수를 마신 후 내장을 내놓고 죽고 별들은 교포처럼 자신의 배경을 의심한다 나에겐 ‘배우자’가 필요해! 이렇게 일기에 처음 적었던 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고 믿는다 무언가를 적어 두고 믿었던 건 한참 후의 일이지만

- ‘거울 속 나이테’  도입부

일요일 오후, 숙취에 흔들거리며 일어나서 무심히 거울을 봤다가 깜짝 놀라서 정성을 다해 목욕을 하고 스킨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었다. 비로소 ‘까만 활명수를 마신 후 내장을 내놓고 죽은’ 나팔꽃이 다시 활짝 피었다. 

안과 밖, 나 하나를 두고 벌어진 시차에 멀미가 올라온다. ‘아무도 부도를 눈치’채선 안 된다고 배우고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새해라도 전혀 다를 게 없는 ‘화석의 한가운데 있는 눈동자가 자신의 수분을 찾고 있는 그 경련(’눈동자 화석‘ 중에서)’ 같은 삶의 고통이 함부로 벗어던져 거꾸로 뒤집혀 고린내 풍기는 양말처럼 속내가 까발려진 나에게 나는 악취가 거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하는 게 숙취 때문인지, 오래된 싸구려 스킨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덕분에 하루가 몽롱하게 날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시차의 눈을 달랜다>에 실린 시들은 어제 술집에서 나오면서 받은 웨이터 명함과 함께 구겨져서 어드 질퍽이는 눈밭에 달라 붙었는지 다시 펴보지만 내내 생소하다. 그저 느낌을 곱씹자면 김경주의 시세계는 기형도의 시세계와 닮았다는 정도. 기형도의 시는 춥고 건조하고 딱딱하게 말라붙었지만 대신 몇 개 모아서 불을 붙이면 따뜻한 화톳불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언제 적 읽은 시집인데 아직도) 기형도 시인이 종로 낙원극장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분명 사랑 영화였다고, 사실과 상관없이 그렇게 믿는다. 

책 날개에 실린 사진에서 시인은 쌈닭처럼 고집스레 눈을 치켜뜨고 있지만 기형도의 해맑은 표정이 언뜻 비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바늘의 무렵’ 중에서)는 구절에서, 문득 하루 사이에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데, 가끔 어린애처럼 물고 싶어질 때가 더 늘 것만 같은 심정이다. 

결국 나는 ‘기도’의 형식으로 여기를 떠날 것이다 

내 거울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나무는 자신의 나이테를 거울 안으로 옮기는 중이다 

- ‘거울 속 나이테’ 나머지 부분

내 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게 시를 읽는 가장 초보적 감상이라도 할 말이 없다. 시집 한 권으로 나와 김경주 시인의 삶을 등가로 놓는 식으로 착각에 괜히 멜랑콜리한 기분에 빠져 지적 허영을 즐기려는 것도 얄팍한 자위라는 걸 안다. 아무려나 김경주 시인이 뭔 일을 하든 시인이 독자보다 더 많은 기형의 시대를 시인으로 잘 버티어주길 바란다. 얇은 시집 한 권을 핫팩마냥 붙잡고 일요일 하루를 보냈는데, 후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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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여자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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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은 글쓰기로만 먹고 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부질없는, 그러나 다행히 곧 제정신을 차린-의 롤 모델로 꼽은 작가(중의 한명)이다. 해박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문장력이 손에 꼽을 만하다. 그래서 고종석의 개인적 관심사에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의 다양한 관심사를 덩달아 따라가고 만다. 

‘고종석의 여자들’도 마찬가지. 고종석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든 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글쓰기로 먹고 산다는 소망을 버린 이유부터 고종석이 왠지 모르게 미워졌다고 해야 할까, 글쎄 애증이라고 정리하겠다.) 더욱이 자기 이름을 제목에 버젓이 들이밀다니 이건 좀 너무하는 게 아닌가 싶더란 마이다. 아무리 책을 펴낸 출판사 개마고원의 기획위원이기로서니 이건 좀 월권이 아닌가 싶어서 책을 펴들었다.

그리고 단번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고종석이 눈길을 주면 알아서 지식이 고이는지, 장르를 넘나들며 박학다식함이 밑절미가 되지 않았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34명의 여자들이 등가의 비중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서너 장 분량으로 짤막하게 소개하는 34명은 고종석의 편애 말고는 딱히 하나로 묶을 만한 게 없다. 대부분 실존 인물이지만 개중에는 소설 등장인물도 간간히 등장한다. 그중 소설 ‘겨울여자’ 주인공 이화는 소설보다 동명 영화에 출연한 장미희에게 끌렸다고 고백을 한다.

그러니까 누가 그 따위 시시콜콜한 개인 관심사에 관심이 있나 말이다, 라고 따져 묻고 싶지만 그게 한 장을 또 넘기면 정신없이 빠져 들게 된단 말이다. 그런 이유가 분명 내가 아는 인물도 종종 등장 하는데, 내가 단편적으로 아는 그이와 고종석이 풀어낸 그이 사이 격차가 사뭇 크다보니, 당황스러우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만다. 

실존 인물이라고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다다른 고종석의 관심사는 오락연예 프로그램 ‘미수다’ 출신의 엽기 아가씨 후지타 사오리 양에 대한 이른 바, 삼촌덕후스러운 글이나 故 최진실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부터 격정의 시대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라 파시오니라아 등등 종과 획을 넘나든다. 

여자와 수다 떠는 것이 섹스하는 것보다(적어도 그 못지않게) 즐거운 여자 애호가 자노파일(gynophile)이라고, 솔직히 다소 구차하게 들리지만, 소개하는 증거랄지 TV, 서적이 아닌 실제로 각별한 친분을 쌓고 지내는 친구 황인숙 시인, 강금실 변호사까지 다양하고도 무궁무진하다.

그렇다고 이 책 제목이 여성들이 아니라 여자들인 이유가 있는 게, 여자들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 고종석의 글이나 사직으로 보건대, 분명 여성적인 구석이 다분하리라 여겨지지만 고종석은 스스로도 말하지만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그 뒤 나는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강금실이 공인활동을 하는 것을 말려왔다. (…) 사실은 강금실의 속마음을 알고도,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예측하고도, 내가 부질없는 짓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서울시장 출마를 앞두고 그녀가 의례적으로 의견을 물어왔을 때,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결국 출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279쪽

현실주의자란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알고,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한편으로 야박하게도 들릴 만한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독자 입장에선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정리하고 판단하여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는 고종석의 중심잡기가 실로 약이 된다.

고종석이 선동과 음모와 낭설이 팔 할이 넘는 정치판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낼 때면, 다른 누구의 글보다 눈길이 먼저 가는 이유는 현실주의의 밑동에 깊숙이 뿌리 내린 고종석의 내공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개인적으로 알아서 될 일도 아니고, 고종석의 책 한 권을 읽으면 단박에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굳이 부제를 달자면 ‘오십 줄 현실주의자의 여성 편력’ 쯤이 되겠다. 그리고 이왕 나무에 비교를 했으니 말인데, 굵게 뻗어 내린 뿌리부터 막 돋아나는 잎사귀까지 고종석의 과거와 현재를, 또 그이의 시인과 정치가라는 친구들에 대한 성향으로 보건대 미래까지 여자라는 기존으로 바라본 ‘고종석’이 도드라진다. 그래서 결국 이 책에 등장한 34명의 여자들이 또 가물가물하다.

글은 이렇게 쓰는 거라고, 또 한 수 가르치려는 게다. 젠장, 누가 원했느냔 말이다. 자꾸 사람을 들쑤시는데 아주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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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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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정말로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은 건 모든 ‘어른’들의 소원이다. 하지만 이 ‘어른’들은 시간이 많은 이후의 삶을 담보로 모든 시간을 당겨쓰듯이 쪼개 쓰고 또 쪼개 쓴다. 성공을 하면 시간이 마치 통장예금처럼 늘어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글주글한 피부, 침침한 눈, 하얗게 바란 머리색, 굽은 허리에 놀라고 만다. 내가 원하는 여가가 찾아왔는데, 나는 그 시간을 쓸 몸이 아니다. 그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젊어지기 위해 별 짓을 한다. 이른바, 안티 에이징이라 불리는 화장품, 성형수술, 염색 혹은 가발, 코르셋, 안과 수술, 귓속에 숨기면 안 보이는 보청기….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거의 사그라지는 불을 보면 안다. 앞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하루하루가 마감을 앞두고 있다는 것 말이다. 

마감, 곧 새해가 된다. 새해가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한해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마감에 쫓기는 삶을 시작한다. 그런 삶이 당연하다는 듯이, 비록 채우지 못할지라도 좀 과하게 목표를 잡아야 고양이(호랑이는 못 그려도)라도 그릴 수 있다는 듯이.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는지 상당히 정확하게 예고되는데도, 아니 사실은 그래서 더 끔찍하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42쪽

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우리가 자기계발서라 부르는 ‘어른’들의 서가에서 만화책을 대신해서 들어차기 시작하는 종류의 책들을 ‘소가 닭보듯’이 대한다. 그는 기차에 막 올라탄 신병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 이유는 좀 다르다. 만약 신병들이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면 얼마나 좋으랴. 내용을 모른다면 그들의 소음조차도 마음에 들텐데’라고 말한다.  

아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라면 더 시끄러운 게 아니라 마음에 들었을 거라고? 이 말은 그저 ‘듣기’의 즐거움에 대한 얘기다. 말을 알아듣는 순가, 우리는 ‘이해’를 하기 시작하고 또 그 이야기의 목적과 내용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103쪽

페터 빅셀이 말하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라는 건 ‘정거장에서 동네 바보가 딱히 이유 없이 기차를 기다리듯이 무심코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쩌면 가장 쉬울 것 같지만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잠시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초조해지기 마련인 사람들. 하지만 기차가 오길 같이 기다리는 내내, 지적장애인 만이 시간을 제대로 즐기고 누릴 줄 알았던 게 아닐까, 하고 질문을 한다.

그 시간 동안 책을 읽든, 밥을 먹든, 짬을 내 글을 쓰건 기차 도착 시간이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내내 우리는 미래를 담보로 과거와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셈이다.

1935년 생으로 전업 작가로 살아온 폐터 할아버지는 아마도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이는 삶의 도착을 앞두고 시간에 쫓기고 초조하고 전전긍긍한 대신, 남은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법을 아는 아주 시간이 많은 어른이다.

부인도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오래, 한 집에 같이 살던 아이들도 독립한 지 오래. 개도 무서워서 키우지 않는 그이는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안타깝게 보이지만 그이는 집이 커진 게 아니라 도리어 작아졌다고 한다. 식구들의 빈자리가 쓸쓸하고 외롭지 않은 걸까.

내가 여기서 혼자 살면서부터 더 작아졌다. 집은 크기를 잃어버렸다. 내가 방에 앉아 있으면 오로지 이 방만 존재한다. 다른 방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넷이 살 때는 다른 방들도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는데. 141쪽

식구들이 떠난 자리가 외롭지 않은 게 아니라, 지난 과거에 연연해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지금 주어진 시간을 ‘무심히’ 보내면서 즐기는 와중이다. 시간은 돈이다, 라는 격언을 두고 페터 빅셀은 돈도 그렇지만 시간은 절대 저축을 할 수도 없고, 그 가치가 변하지 않으니 자신을 내려놓고 주위를 보라고 한다.

대단치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보이는 작은 창문 너머 늘 보는 익숙한 풍경이 바로 ‘지구의 모든 세상’이다. 그의 얘기에 종종 끼어드는 사람들은 과거의 고인이 되었거나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일 때가 많은데, 누구는 세세하게 기억을 하면서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부칠 수 없는 편지라 쓰고는 곧 버리지만), 아니면 그때 그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고민에 빠진다.

작가가 기억을 못하는 그들은, 작가에게 강한 경험을 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종종 생생하게 기억날 듯하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는 그 당시 작가 자신이 남들처럼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저당 잡혔던 정신없이 시간을 ‘낭비’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날들을 며칠 함께 보내고 그를 떠나보낼 때, 역에 서서 눈으로 기차를 좆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에게 그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당연함의 저주, 말해지지 않는 것의 저주, 부족한 결단력의 저주, 가정법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저주…. 65쪽

비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마치 불교의 구도자처럼 면벽수행을 해도 정작 내 안에서 차오르는 수많은 상념과 잡념들, 그것들의 정체가 내 자신의 전부라면 참 부질없을 수도 있겠다 싶다. 생일 때면 한 해가 정신없이 가버렸다고 말한다. 나도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데, 12월 말이 되면서 역시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다행이야, 라는 식으로 은근히 폼을 잰다.

그래서 뭐가 남을까. 부와 명예와 밝은 미래? 글쎄 주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어쨌든 모든 권력은 공포다. 권력은 자신이 퍼뜨리는 공포를 먹고 산다. 나는 권력 획득과 유지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권력을 원하는 사람들은 일단 공포를 퍼뜨려야 한다. 권력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왜 그다지도 사랑받을까? 153쪽

‘미래’라고 말하는 ‘권력’(아무려나 비슷한 속성의)에 휘둘려 공포에 휘둘려 살았다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예측 가능하고 쭉쭉 진행된 계획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 바쁘게 산다고 하면서 내가 놓치는 게 뭔지 생각을 해봐야, 아니 생각을 비워야겠다.

농부들의 격언이 올해 맞지 않았더라도 다음 해에 다시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낸 게 기쁘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해도 눈을 기다리고, 날씨가 추워진다고 해도 따뜻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 그러나 큰 눈 때문에 너무 오래 걸린 취리히발 졸로투른행 기차에서 우리는 ‘오늘’이 아닌, 일기예보 속의 과거를 살았다. 미래에는 늘 희망이 없다. 우리가 미래를 알 때는. 40쪽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4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수록했다. 1부 「기다림을 기다리며」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기다림의 미덕과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2부 「작은 세상, 큰 세상」편은 화려한 겉을 벗어내고, 소박한 소통 방식을 드러내는 소중한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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