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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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은 나에게 게이고가 불륜소설을 던져 주었다.
잠깐의 당혹감을 견디고 책에 빠져든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게이고의 매력에 또 다시 항복한다.
언제나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하기 힘든 트릭들로 독자를 우롱하던 그의 추리소설에 익숙했는데
이 소설은 완전히 예상밖의 소설이다. 게이고가 나에게 불륜소설을 던져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살인사건이 있고 형사가 나오고 용의자가 나오지만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회사 여직원 아키하와 벌이는 불륜행각을 따라간다.
평소에 불륜은 멍청한 짓이라고 여기던 와타나베. 현재의 가정에 불만도 없다.
그러나 아키하를 만나고 부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 불륜에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그저 불륜으로 시작했던 관계가 조금씩 애정으로 바뀌며 급기야 이혼까지 생각하는 상황에 빠진다.
자신의 안락한 가정에 죄의식을 느끼면서까지 아키하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와타나베.
그런데 그녀가 15년전 일어난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피해자의 동생이 15년간 해 온 추적의 결론에는 어떤 허점도 찾을 수 없고 아키하가 범인이라는 정황은 뚜렷하다.
그 상황에서 와타나베는 독백을 한다. '그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중심은 와타나베와 아키하의 불륜의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첫 만남에서 첫 관계.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와타나베의 마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억지스러운 합리화.
소설은 남자의 심리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눌님이 읽으면 한참동안 잔소리를 할 것 같다.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심리적인 변화와 비겁한 합리화의 과정들.
마치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들을 변호하는 것 같은 그의 심리묘사는 씁쓸한 공감을 가져온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 모든 심리적인 변화와 비겁한 합리화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반전으로 비웃어 버린다.
게이고의 변호논리에 나도 모르게 끄떡이며 공감했던 것이 한 순간에 부끄러워질 만한 반전이다. 

불륜과 함께 소설의 다른 축인 살인사건의 진실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아프다.
중학생에 불과했던 아키하가 15년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진실과 그 고통의 시간이 안쓰럽다.
처음에 와타나베에게 '편하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 장면이 사건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인 비서의 심정도 안타깝고 슬프다. 마지막 반전에서 드러나는 진실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이 아닐까?
'시효가 끝나도 마음속의 시효는 끝이 없다'라고 말하는 피해자 동생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지금도 수많은 미제사건의 범인들은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공소시효가 끝나고 자신의 마음에,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마음의 시효'는 영원한 것이다.
수많은 추리소설을 써왔던 작가가 범죄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강력한 메세지가 아닐까? 

와타나베의 마음이 진정 사랑이라고 가정했을 때 만약 아키하가 진범이라면 '그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두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모든 정황이 그녀를 범인으로 몰고 갈 때 끝까지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사랑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믿음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은 얼마나 강한가?
내 연인, 혹은 내 아내, 내 남편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과연 그녀를(혹은 그를) 그래도 사랑할 수 있을까? 

게이고의 새로운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신작이다.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하겠지만 그것만 뺴면 대 만족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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