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의 아버지
카렐 판 론 지음, 김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자신이 사랑하던 애인이 죽은 지 10년.
아내의 친구이자 새로운 애인인 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간 병원에서 '애초부터 불임'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주인공.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13살 난 아들이 있다. 그 아이는 과연 누구의 아이인가?

자신에게 익숙했던 사랑, 자신이 끔찍하 사랑했던 여인이 배신자였다?
내가 온 정성으로 키운 아이, 내가 사랑으로 감싸주었던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하루 아침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모든 관계가 부정되어 버린 남자의 이야기.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아이의 아빠는 누구인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관계들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를 찾아 나서는 여정.
소설을 한 남자의 이 기가막히고 허탈한 여정을 1인칭 시점으로 따라간다.

그 여정에서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겼던 애인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오고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고 실망했던 아이는 여전히 그의 아이임을 깨닫게 된다.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소원했던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남자로 다가오고
그런 아버지를 견디며 살았던 어머니의 눈물이 새삼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회 생활에서 맺는 관계라는 것이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깨질 수 없음을,
모든 관계는 오랜 시간동안의 추억과 기억과 사랑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그래서 한 순간의 실수, 하나의 사건이 모든 것을 되돌리지 않음을 알게 해 준다.
소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는 모든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가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그 중에는 환경을 사랑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공감이 가는 것도 많지만
우리나라의 도덕적 관념으로는 공감할 수 없는 성에 대한 개방성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책을 놓고 싶게 만들었던 요인도 바로 이런 이질적인 문화이다.
포르노에서나 가능할 줄 알았던 1대 2의 섹스, 13살 아들의 첫 경험은 공감할 수 없고
아내의 장례식을 치룬 날 아내의 친구와 밤을 함께 보내는 상황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마저도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낯설음이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철학(?)적인  이야기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도대체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마이클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부분의 지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쩜 번역의 문제일까?

현재와 과거를 왔다 갔다 하는 구성도 이런 어지럼증에 도움을 준다.
문득 현재인가 싶으면 어느새 과거이고 과거인가 싶으면 또 다시 현재이다.
이 사건이 저 사건의 앞이었는지 뒤였는지 헷갈리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프다.
게다가 뜬금없디 튀어나오는 대사들은 누구의 말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읽다보면 다른 사람의 말인 경우가 태반이다.
나의 난독성 때문인지 아니면 이것 역시 번역의 문제일까?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지만
그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따라가는 과정은 공감도 이해도 되지 않는 낯설음이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끝까지 읽어나가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무엇보다 소설은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 기준에서는
이 소설은 그리 높은 평점을 받을 수 없는 소설이다.
더욱이 뒷표지에 있는 홍보성 카피는 너무도 큰 과장이라는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