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신라의 삼국통일을 위대한 사건으로 배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의 역사교육은 한심한 수준이었으니 어느 선생님도 신라의 통일이 가지는 다른 의미는 설명해 주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 교양역사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신라의 통일이 가지는 반민족성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삼국통일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누군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제는 주저없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야말로 우리민족 최초의 자주적 통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역사는 우리에게 버려진 역사가 되어 버렸다.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이 북한에 있는 관계로 고려의 대부분 유적들도 북한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웠고 조선에 비해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고려라는 왕조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 역시도 학생시절에 고려의 역사에 대해서는 깜깜했던 기억밖에 없다. 왕건-강감찬-무신의난-몽고항쟁-위화도 회군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이었다. 그래서 내 기억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은 고려의 역사를 알고 싶은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시작된 책은 초기 왕권을 둘러싼 어지러운 투쟁과 중국의 혼란기를 이겨나가는 고려의 실리적인 외교정책들, 120여년간의 평화로운 시기와 무인정권의 시기, 몽고의 침입과 항쟁, 친원파의 기승과 공민왕의 개혁, 그리고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에 이르기 까지 고려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그 중에는 내가 희미하게 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생소한 것이었다. 고려의 관직도 생소했고 근친끼리 결혼하는 왕실의 풍습도 낮설었다. 그래서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는 역사서였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가 고려라는 왕조에 대해 얼마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금의 윤리의식으로 그 시대를 평가하는 나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많이 고려의 역사를 평가절하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드라마 <태조 왕건>이나 <천추태후>에서 본 것과 완전히 다른 실제 역사, 작가의 창작이라는 왜곡을 거치지 않은 날것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는 것도 수확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그 시대 윤리의식에 의거하여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해 보았다는 점도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어려운 책이다. 일단 그 흔한 유적사진, 영정사진 하나 없이 글로만 빽빽하게 쓰여진 500여 페이지의 책은 일반인들이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 생소한 고려의 역사이니 더 어려울 수 밖에. 이 책이 정통 역사서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역사서로 출간된 것이라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었어야 한다. 일반인들은 고려의 왕들의 가족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보다 재미있게 시대를 서술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 책은 집에 두고두고 소장했다가 고려의 역사가 궁금해질 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참고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쉽게 접근하고 읽어내기엔 너무 딱딱하고 많은 분량이다. 개인적으로 교양역사서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도 이런데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접한다면 역사에 대한 편견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든다. 한마디로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 작가가 고려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건만 나의 편견이 사라지지 않는 것 또한 문제이다. 물론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문제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라 하더라도 독자의 동의를 끌어내지 못한 것은 작가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도 있다. 나에게 아직도 후삼국의 통일은 왕건이 아닌 견훤의 몫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강하고 그렇지 않다면 왕건이 아닌 궁예가 통일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또한 고려의 중립외교는 실리를 취했다기 보다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았다는 느낌이 여전하고 몽고에게 정복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라는 자부심은 일찌감치 그들에게 항복해 버린 소국의 비애, 정복할 가치조차 주지 못한 약소국의 넋두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고려는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