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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 역사의 법정에 서다 - 악의 획을 그은 인물들, 역사가 그들을 심판하다
배상열 지음 / 책우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 그 시대의 선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몫이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평가를 할 수는 없지만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이성적인 판단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에는 반드시 대한민국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남긴 죄인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죄인들은 왕조국가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대역죄인들 보다 훨씬 더 죄질이 무거운 이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는 그 시대를 이끌어가야 했던 왕과 왕족들의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역사란 또한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런 역사의 죄인들이 승자의 이름으로 칭송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모순들에 대한 냉철한 시각과 그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논리적 기소를 통해 그들에게 단죄를 하고자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연개소문을 역적으로 만들었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역사의 죄인이었고 한창 재평가의 바람이 불고 있는 의자왕 역시 실책에 실책을 거듭한 역사의 죄인이다. 물론 의자왕의 경우는 기득권의 저항을 무너뜨리기 위한 무리수 이기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삼국을 통일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김춘추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최악의 죄악을 저지른 인물이며 드라마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천추태후 역시 절대로 변명이 불가한 죄악을 저지른 요부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죄악들을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고대사를 말아먹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 누구보다 죄질이 무거운 범죄자이다. 그 외 조선을 통해 수많은 실책과 옹졸한 자기중심적 사고로 인해 역사에 수많은 죄악을 남긴 인물들의 죄상을 철저한 고증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통쾌하게 기소하고 있다. 작가가 지적하는 인물들에 대한 기소가 충분한 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두꺼움에 비해 쉽게 읽힐 수 있는 몰입도를 가지고 있다.
작가가 기소하는 인물들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도 나와 작가의 시선이 정확히 일치한다. 더욱이 최근 '대하사극'이라는 미명 아래 재평가와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원균'이나 '천추태후', '문정왕후', '정난정' 같은 이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논죄와 그들의 재평가를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가 얼마나 희박한 것인가에 대한 반박은 최근의 사극들을 보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답답함마저 속 시원히 풀어주고 있어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책의 마지막 후기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성향도 나와 닮아있다. 전국민이 충격에 빠졌던 노무현 대통령의 억울한 서거를 보면서 사관의 역할을 하기로 마음먹고 지금의 상황이 못난 지도자들의 집권으로 망가져 버린 조선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시선은 내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는 시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통쾌함을 전달해 준다. 조금씩 흥미를 잃어가던 역사서 읽기의 재미를 다시한번 일깨워 준 고마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소설을 많이 쓰는 작가답게 역사서라기 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서술방식을 보여준다. 법정 드라마에서 많이 보았던 검사의 논고를 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한 고증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을 쉽고 편한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설명하고 있어서 역사에 대한 기본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역사서에 쉽게 손을 못 대는 독자들도 쉽고 편한게 죄인들을 평가할 수 있게 해 준다. 역사의 법정에서 배심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물론 죄인들의 입장을 변호할 변호사의 역할이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사실 변명의 여지조차 별로 없어보이는 죄인들이기에 작가의 논고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그 논고를 바탕으로 죄인들에게 형량을 부여할 역할은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