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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세트 - 전2권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방영되면서 새롭게 베스트 셀러가 된 소설의 원작자 이정명.
작년에 소설 '바람의 화원'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그의 다른 작품은 보지 못했는데
'바람의 화원' 보다 먼저 나온 '뿌리깊은 나무'를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이 나오던 시점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대히트를 치면서 팩션의 바람이 불었고
그 흐름에 휩쓸려 한국형 팩션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라서
특유의 반골기질로 인해 의식적으로 그런 소설들을 외면했기에 이 책도 읽을 기회가 없었다.
'바람의 화원'을 읽으면서 신윤복의 그림들에 기발한 상상력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수없이 많이 걸어다녔던 경복궁의 친숙한 건물들 속에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학자로서의 철학과 민족적 자긍심을 담아 낸 상상력에 또 다시 놀랐다.
아들과 함께 수없이 많이 다녔으면서도 경복궁의 전각들을 그저 멋스러운 건물로만 보았었는데
각각의 건물과 장소들에 동양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생생한 생명력을 담아낸 이 작품은 대단하다.
다음번에 경복궁에 가게 되면 그 건물들이 새롭게 느껴질 듯 하다.
한글의 창제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새삼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과 위대함을 몰랐을 뿐이지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이고
세종대왕이 후손에게 남긴 그 무엇보다 가장 가치가 있는 유산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글의 창제는 대국인 중국에 대한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시대의 진리일 수 있었던 '소중화주의'에 물든 사대부들과의 힘든 싸움이 필요했다.
최만리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반대를 했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 역사적 사실에 살인사건을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팩션을 완성했다.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형식에 수학, 철학, 천문학 등을 결합하여 멋진 소설로 만들어 냈다.
두권의 책을 읽는 내내 다소 생소할 수 밖에 없는 동양철학과 천문학, 수학 등을
경복궁의 각 건물들과 각각의 살인 사건들의 추리과정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악역 아닌 악역을 맡은 최만리를 비롯한 경학파들의 사상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전혀 말도 되지 않고 답답한 고집에 불과하겠지만
그 시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생각이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고
성삼문을 비롯한 경세파의 주장이 설익은 잡론에 불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최만리를 비롯한 경학파가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대적 제약을 뚫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과 경세파의 개혁의지일 것이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때마다 우리는 영웅을 찾게 된다.
광개토 대왕이나 대무신왕 같은 전쟁의 영웅만이 영웅이 아니라
시대의 제약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연 세종과 같은 인물이 더 큰 영웅일 수 있다.
현재의 답답하고 힘든 우리의 기대도 그런 영웅이 필요하지 않을까?
'바람의 화원'에서도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정으로 왜곡의 논란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 책에서도 또 다시 왜곡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설정이 있다.
바로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역모와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의 퇴출에 관련된 부분이다.
'심온'의 역모는 신하들의 부추김에 태종이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라
외척의 발호를 두려워한 태종이 세종의 왕권을 위해 스스로 꾸민 왕권강화 책이었고
며느리 봉씨의 퇴출 또한 무고에 의한 억울한 퇴출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동성애 사건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퇴출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작가적 상상을 허용한다고 하더라고 논란의 여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설정이다.
올 해 읽었던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을 보면서 한국형 팩션의 성공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이 소설과 같은 작품들이 초석을 닦아낸 기반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바람의 화원' 보다 이 소설이 더욱 재미있고 내용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권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가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