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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샤라쿠
김재희 지음 / 레드박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홍도와 신윤복.
역사적 기록으로 둘 사이를 연결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고 있는 인물들이다.
작년에 읽은 '바람의 화원'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도 한다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또다른 소설이 나왔다고 해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자신의 타고난 재주와 미남자 같은 얼굴만을 믿고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가권.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자리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되고 죽을 운명에 처하지만
그의 재주를 아끼던 김홍도에 의해 목숨이 부지되고 일본에 침투할 간자로 키워진다.
정조에게 전할 사라진 일왕의 국서를 되찾게 위해 에도로 침투하게 된 가권은
자신의 뛰어난 재주를 바탕으로 '샤라쿠(寫樂-즐거움을 그린다)'라는 이름의 화가가 되어
간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일왕의 국서를 찾을 수 있을까?
'바람의 화원'을 읽은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책과 비교할 수 밖에 없었다.
'바람의 화원'에서는 신윤복을 천재적 재능을 지닌 여성적 성향이 강한 캐릭터로 그리고 있고
김홍도가 신윤복의 재능에 감탄하며 약간의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살리에르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책에서는 가권(신윤복)이 흔히 말하는 꽃미남 스타일의 바람둥이로
과감한 결단력과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열정을 지닌 멋진 남성으로 묘사하고
김홍도는 타고난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망나니 같이 날뛰는 가권을 붙잡아 주고
그의 재능이 올바르게 피어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참된 스승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나오는 가권의 모습과 김홍도의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간자로서의 임부를 수행하는 가권의 이야기를 축으로 진행된다.
여성작가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문체에 퓨전사극 대사같은 유머넘치는 문장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등장인물들과 생생한 묘사.
마지막까지 톱니바퀴처럼 물려 돌아가는 사건들의 전개와 치밀한 구성. 그리고 반전.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정말 재미가 있어서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을 기발하고 민족적 자긍심이 배어나는 상상력에 있다.
일본 미술사에서 잠깐의 등장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미지의 인물은 '샤라쿠'의 정체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의 간자였다는 상상력이 기발하다.
기록이 전혀 없기에 상상력의 재료가 되는 '샤라쿠'와 역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한 '신윤복'을 연결시킨 상상력.
노론이라는 수구세력에 둘러싸여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던 '정조'와
막부의 쇼쿤들에 둘러싸여 실권을 잃은 채 명분만 남아버린 '일왕'의 의기투합 또한 기막힌 상상력이다.
휴대폰에까지 1000만 화소 카메라가 달린 요즘과 달리 그림만이 유일한 간자의 도구일 수 밖에 없던 시기에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조선 최고의 화가를 조선 최고의 스파이로 둔갑시킨 설정 또한 재미있다.
일왕이 정조에게 일본의 정복을 요청하고 정조가 그의 요청에 응해 일본을 정벌하려 했다는 설정은
작가가 그동안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민족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하는 설정이고
독도문제로 또다시 불거진 한일관계의 뒤틀림 속에서 아예 일본 전체를 복속하려 하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그래서 더욱 통쾌한 설정이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에도시대의 일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서양의 문물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막부의 횡포가 극에 달해 사회의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
에도시대 화이란과 게이샤들의 생활과 무사계급의 생활들이 마치 눈앞에 보는 듯한 묘사로 살아난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자신이 에도시대 일본의 힘없는 백성이 되어 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민족적 감정의 연장선에서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했던 일본의 문화를 조금 옅볼 수 있었다.
'조선의 일본침공'이라는 일본 우익들이 거품을 물을 정도의 도발적인 설정을 하면서도 동시에
조선과 일본을 떠나 사람사는 세상은 어디나 똑 같은 것이고 언제나 희생은 힘없는 백성들의 몫이며
어떤 명분이 있더라도 전쟁이라는 것은 정당화 됳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조선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지금의 일본이든 사람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고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얘기를 한다.
민족적 감정이 앞선 색안경을 끼고 보면 미울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일본인들, 일본이라는 나라도
지금의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라이고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결국 서로간의 감정의 대립으로 인한 지금의 관계가 아닌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한 양국의 화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조선인 간자와 일본인 닌자의 사랑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일 것이다.
결국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작가가 본 것은 지배층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대립이 아닌
대부분의 선량한 백성들의 힘으로 이루는 화합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상 최고의 폭염이 찌는 이번 여름.
통쾌함과 재치, 아련함 사랑의 아픔과 민족적 자긍심이 담긴 이 책은 충분히 권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