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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얀 어둠속을 걷다'
어느 평온한 휴일.
세상의 화려함에 묻혀 어떤 범죄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한 마을.
공원에 방치된 폐건물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년. 미궁에 빠진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와 두 남녀의 이야기.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이미 작가는 범인을 암시하고 있다. 게이고 특유의 범인 알려주기.
그러나 그들이 왜 범인인지, 아니 그들이 범인인지 아닌지도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의 인생을 관찰자의 입장으로 지켜본다. 치가 떨리게 잔인한 그들의 인생을...
그들을 둘러싸고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작가는 역시 그들이 범인임을 암시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들이 범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범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뿐...
'하얀 어둠'의 의미를 읽는 내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성장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끊임없는 범죄의 향연.
치를 떨리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무섭고 냉정한 그들을 보면서
요즘 많이들 이야기되고 있는 '싸이코 패스'를 연상했다.
다만 그들의 범죄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3권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작가의 의도대로 고백하는 유키호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하얀 어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내가 읽었던, 작가의 의도대로 내가 훔쳐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면을 보게 되고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느끼는 답답함과 '하얀 어둠'이라는 느낌.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도 계속 그들의 발목을 잡아끄는 그 무엇에 대한 답답함.
그리고 유키호를 위한 료의 헌신. - 솔직히 사랑이라 하기는 쫌 그렇다. -
형사는 그들의 관계를 공생이라 이야기 하지만
내가 느낀 그들의 관계는 무조건 적인 헌신에 대한 당연한 누림 정도.
료의 무조건적 헌신이 왜 있어야 했는지 그리고 유키호는 왜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에 가서야 그 베일을 벗는다.
그렇기에 3권이라는 분량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궁금증에 결국 책을 놓을 수 없다.
다들 게이고의 대표작으로 이 책을 뽑는 이유를 나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19년이라는 시간동안 변해가는 주인공들과 그들과 함께 변해가는 일본사회의 모습을
치밀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있는 대단한 소설이다.
우리사회의 모습이 아니라서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료의 헌신은 아마도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사죄가 아닐까?
유키호에게 료는 어둠속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태양이 아닌 무엇'이었을 것이고
료의 덕분에 그녀는 '하얀 어둠'속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료는 '어둠속을 걷기 위한 무엇'이었을 뿐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결국 마지막에 그런식으로 어둠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료는 그녀에게 어느 순간 짐이 되지 않았을까?
어지럽고 헷갈리는 결말이다.
"나츠미, 하루 중에는 태양이 뜨는 때와 지는 때가 있어.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지. 물론 실제 태양처럼 정기적으로 일출과 일몰이 찾아오는 건 아냐. 사람에 따라서는 태양이 가득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계속 어두운 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면 그때까지 떠있던 태양이 저버리는 것이야. 자신에게 쏟아지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지. 지금 나츠미가 바로 그래."
유키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은 알 수 있었다. 나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말이지."
유키호가 말을 이었다.
"태양 아래서 산 적이 없어."
"설마."
나츠미는 웃었다.
"사장님이야말로 태양이 가득하지 않아요?"
하지만 유키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기에 나츠미도 웃음을 지웠다.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그 태양을 대신했다는 게 뭐예요?"
"글쎄, 뭘까... 나츠미도 언젠가 알 때가 있을 거야."
- 3권 p.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