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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는 합창단에서 노래하곤 했다
죠 메노 지음, 김현섭 옮김 / 바움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죠 메노의 단편집입니다. 열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작품 대부분이 이미 다른 신문이나 문학저널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2003년에는 넬슨올그런 단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아. 무슨 무슨 상 받았다는 얘긴 가급적 안 할려고 하는데, 편견에 사로잡힌 독서를 우려해서요, 한데 이 책, 여기 수록된 작품들을 읽고 보니, 아, 하고 수긍하게 되네요. 상 받을 만하구나. 이 역시 편견에 치우친 감상 아니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좋았다는 말이죠. 네, 그래요. 요지는 그거예요. 좋았다고요.
(...) 바로 그 순간 나는 깨달았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예상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말이야. 모든 것이 아주 나빠지더니, 그 다음엔 아주 낯설게 변해버린 순간이었어. *('미드웨이 Midway' 중에서)
정말로 시작은 아주 미미하거든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아주 아주 소소한 그래서 사소하게 여겨질 만큼 단조로운 리듬으로 시작돼요. 이를 테면 새벽 네 시에 거실 소파에서 '기이한' 드라마 - 지구를 정복하려는 화성인들과 넵튠호 탐험대 일행의 결투 - 를 보는 사내('애쿼보이지'의 기이한 에피소드 A Strange Episode of Aqua Voyage)나 가슴팍에 '나는 파괴자 갈다르다'라고 쓴 채 어머니의 스테이션 왜건 뒷자석에서 잠든 채 발각된 소년(그리스 신화 캠프에 가다 A Trip to Greek Mythology Camp)이 심상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이상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 이거 뭐지. 하는 의구심과 슬슬 재밌어지는데. 하는 기대감이 뒤섞인 감정이지요. 예사로운 이야기의 흐름이 교묘하게 방향을 틀어버렸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거든요. 무심히 채널을 돌리던 새벽 네 시의 사내는 오래된 성인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 깊은 '공감'의 눈물을 흘리고요. '파괴자 갈다르다' 소년은 이상한 그리스 신화 캠프에 가서 "다른 사람과 결혼한"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 . 행선지를 모르는 도보 여행 같다고 할까요. 지나올 때는 전혀 종잡을 수 없고, 그래서 불안했던 여정을 돌아볼 때, 그제서야 아, 하고 길의 흐름을 파악하게 되는. 뭐, 그런 밑도 끝도 없고,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독자를 이끄는 힘. 죠 메노 작품을 읽는 묘미라 할 수 있겠네요.
갈색 머리가 묻는다. "스탠, 무슨 일이야?" 남자가 "나는 죽어가고 있어."라고 말하자 금발머리가 남자의 이마에 키스를 한다. 잠시 동안 나는 틀림없이 그들이 그 짓을 시작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금발머리는 그냥 그 남자를 안고 있을 뿐이고, 갈색 머리는 그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괜찮을 거야. 당신은 이겨낼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남자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한다. 내가 좀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자 갈색 머리는 남자를 아주 꽉 안으면서 "괜찮아질 거야. 당신은 이겨낼 거야." 라고 되풀이하고, 그러자 금발머리가 남자를 끌어안기 시작하고, 남자는 그녀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명의 여인들은 그냥 그렇게 남자를 안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어떤 짓도 하지 않으며, 키스조차 하지 않고, 그냥 서로 안고 있는데, 그러자 갑자기,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누군가가, 어딘가에 있는 성인영화 감독이 나보다 앞서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벅차올라, 나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애쿼보이지'의 기이한 에피소드 A Strange Episode of Aqua Voyage 중에서)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심각한 사회 문제, 이를 테면 불륜이나 이혼, 청소년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폭이 넓은데요. 대부분 삶의 불편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겨우 존재하는' 미약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들의 나약함과 사악함, 불행과 죄악은 우리 삶과도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어떤 점에서는 우리와 비슷하거나 같다는 것, 그러니까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어요.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이야기 방식으로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스따~일이라 할까요. 죠 메노는 자신만의 색이 확실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개성 강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종종 받을 수 있는 거부감도 없고요. 오히려 굉장히 친숙하다는 느낌마저 들어요. 썩 친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도요. 이 기이한 친숙함은 앞서 말한 보편적인 공감에서 기인합니다. 외로움과 상처, 문제를 껴안고 있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작가의 온화한 시선이 우리의 상처와 외로움을 위무해 주거든요. 별 거 아니라는 듯 천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 우리를 내려놓는데요. 거기는 우리가 상상하고 원해왔던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막연하지만 그 느낌은 분명 위로가 됩니다. 새벽 네 시의 사내가 이상한 성인 영화를 보고 뜻밖의 눈물을 흘리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