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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추천사부터 마음을 혹하는군요! 컬트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목차만 읽어봐도 호기심이 동합니다.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습니다.

 

 

 

 

 

 

 

 

 

 



     올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은 김중혁의 '요요'입니다. 제목부터 김중혁스러운 이 작품은 "시간과 사랑에 대한 아름답고 정교한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네요. 추천 우수작들도 마음을 끄는데요. 김성중, 김태용, 조해진, 최진영, 그리고 황정은 씨까지...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어서 더욱 기대됩니다.

 

 

 

 

 

 

 

 

 

 

 

 

 

 

 

 

 

 


    백가흠의 단편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의 첫 장편이라 무조건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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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아비규환]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 그러면 아비규환
닉 혼비 외 지음, 엄일녀 옮김 / 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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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은 영미권 작가들의 단편 장르소설 스무 편을 싣고 있습니다. 요즘 삐급 문화가 대세인 것 같은데요. 공포, 추리, 범죄, 역사, 로맨스, 판타지를 망라하는 이른바 삐급 소설들을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스티븐 킹, 닉 혼비, 마이클 크라이튼 등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스티븐 킹의 단편에는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냥...... 신경 쓰지 마."
    "뭘요?"
    "난 신경 껐거든."
    "뭘요?"
    (...)
    "왜냐하면 그게 뭘 알 리가 없잖아? 그건 빌어먹을 비디오일 뿐이라고." (닉 혼비, 「안 그러면 아비규환」 ) 중에서 


     세상의 종말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 작품이 많죠. 최근에 보았던 영화로는 라스 폰 트리에가 감독한 멜랑콜리아(Melancholia,2011)가 기억에 남는데요. 이런 작품들 대부분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모티브가 되는 것은 '자연 앞에 선 인간의 태도'입니다. 공통적인 정서 반응은 '공포심'이죠. 공포가 극에 달하면 무기력이 찾아들지만, 어떤 경우에 이 공포심은 이상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표제작 「안 그러면 아비규환」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비디오가 미래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된 열다섯 살 소년은 '빨리감기' 기능을 통해 세계의 끝을 보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끝장나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상한 용기가 생긴 소년이 마음에 두고 있던 소녀 마사와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낸다는 이 이야기는 매우 발랄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것은 슬쩍 보기에도 각각의 현실 가닥들이 무한히 가지를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는 크리스 오퍼트가 동시에 수백수천만 명이 존재했다. 그 수많은 나의 다른 생들을 알고 나니 지금 이 현실에 나를 붙잡아두던 힘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래 늪에 머리 꼭대기까지 잠겨 발아래 단단히 디딜 곳도 없고 머리 위에 잡을 것도 없는 기분이었고, 쓰지도 못할 정보만 사방에 끊임없이 넘쳐났다. (크리스 오퍼트, 「척의 버킷」 ) 중에서

 

     종말론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평행이론입니다. 크리스 오퍼트의 <척의 버킷>은 타임루프, 즉 다중현실을 갈아타면서 자기 삶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엿보게 되는 '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현실들. 그 대안적 현실들은 대안이 되기보다 삶의 의욕을 빼앗고, 급기야 한 사람의 실체를 집어삼키고 맙니다. 다소 충격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부엌으로 다시 가서 한 잔 더 들이켜고 담배를 만족스럽게 피웠다. 재니스는 집 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했지만, 그런 날들은 이제 끝났다. 나는 꽁초를 비벼 끄면서 새하얀 세라믹 싱크대에 시커먼 얼룩이 지는 쾌감을 맛보았다. 창백한 피부에 묻은 권총 화약 같았다. 이제 어머니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마이클 크라이튼,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 ) 중에서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자란 레이의 마음속 상처가 "새하얀 세라믹 싱크대에 시커먼 얼룩"처럼 번져가는 과정을 잘 표현한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를 스무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절제된 감정 처리와 매끄러운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인데요.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작품의 저자인 마이클 크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탈주자와 꼬마의 우정을 통해 잔혹한 전쟁이 순수한 인간성까지를 말살하지는 못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캐럴 엠시윌러의 「사령관」 은 어둠 끝에 쏟아지는 빛줄기처럼 따뜻한 작품이었고요.


    나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절대 노래하지 않았다. 내 노래를 들은 사람은 루가 유일하다. 주문 외듯 노래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늘 궁금했다. 어렸을 때는 다른 게 있을 거라고 믿었다. 탈출은 항상 너무 쉬웠고, 나는 그게 노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은 노래를 잘 부르면 언제든 사람들이 와서 나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준 하비스트 고모가 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고모는 식구들과 함께 죽었는데. (캐럴 엠시윌러 「사령관」 ) 중에서

 

     스무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공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종말론이나 평행이론 같은 SF적 접근부터 어머니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공포, 좀비나 마녀 같은 괴담식 공포까지 매우 광범위합니다. 우리 안의 공포를 끌어내 눈앞에 흔들어대고, 찢어발겨 해체하고... 끝없이 깊고 검은 구멍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잠들어 있는 우리 안의 검은 유령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쉬잇. 안 그러면 아비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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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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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알렉스(다산책방,2012,05)》로 국내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은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또 다른 작품입니다. 키 작은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삼부작에 속했던 《알렉스》와 달리 이 소설은 독립적인 작품입니다. 카미유는 물론 다른 형사도 등장하지 않고요. 피해자와 가해자의 숨막히는 심리 추격전이 이야기의 흐름을 구성합니다. 《알렉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피에르 르메트르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데요. 대화가 거의 없고 독백 형식으로 인물의 심리에 치중하는 이 "은밀하고도 점진적인" 접근 방식은 감정이입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일급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 치고는 상당히 고요하고 깨끗하다는 점도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묘사가 없어서 거북함은 없지만,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폭력성이나 잔혹함에 비할 때 다소 밋밋한 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를 놀라게 한 건 엄밀히 말해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그녀를 사랑해왔다. 아니, 지금 끔찍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은 다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온갖 정성을 쏟고, 그녀를 가공하고, 조종하고, 인도하고, 정성껏 빚어온 결과, 지금 그녀가 그의 어머니 사라와 똑같은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본문 중에서)

 

 

     범인(프란츠)의 유년기와 정신적 트라우마, 복잡미묘한 심리 묘사에도 불구하고 쉽게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범인의 복수 대상이 된 소피에 대한 애매한 감정선이 혼란을 빚어내고 있어요. 단순한 복수심과 연정(戀情) 사이를 오가는 프란츠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내기 어렵고, 따라서 몰입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공감하기 어려운 건 범인의 복수심, 그리고 복수 대상입니다. 범인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밤에서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는 거기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소설의 절정은 후반부의 반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황이 역전되는 이 부분에서 갑갑한 속이 좀 트이는 기분이랄까. 긴장감도 느껴지고요. 어쨌든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말을 맞이하고 보니 완벽하게 짜맞춰졌다는 느낌이랄까. 다소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 이 소설을 뭐라 규정할 수 있을까요. 추리소설이라 하기에는 긴장감이 떨어지고, 심리소설이라 하기에도 어설픈 감이 들어요. 연애소설의 분류에 넣을 수도 없겠고요. 상당히 애매합니다. 그냥 피에르 르메트르의 방식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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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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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하면 《스무살》이 떠오릅니다. 그의 첫 소설집이죠. 전반적으로 상당히 관념적이었다는 인상 말고는 특별한 기억이 없습니다. "스무 살 이후"를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돌아 보면 스무 살, 혹은 스무 살로 명명되는 새파란 청춘은 관념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고독도 고통도 거짓말 같던 새빨간 시간들. 《스무살》은 바로 그 시절의 이상한 기억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자이며,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스무살》 절판 소식은 그 시절과의 단절 같이 느껴져 못내 아쉬웠지요. 그리고 몇 년 뒤에 읽게 된 책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였는데요. 유년의 향수를 애틋하게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집은 《스무살》과는 다르게 잔잔한 삶의 질감이 살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인가요. 각설하고, 김연수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풀어낼 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소설집 이외 다른 작품은 읽지 못했고, 벌써 오래 전에 읽은 이 단편들이 구체적인 인상을 새기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소설을 읽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김연수 장편으로는 처음 만나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김연수는 이 소설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이야기합니다. 사람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일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소통에 대한 불가능한 그 꿈이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뿌리에 이르는 "날개"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요. 198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에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정희재)이 자신의 생모를 찾아나서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날개"의 상징성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의 시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정채봉의 시에서 차용한 이 문장에서 "날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움'입니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그리움이에요. 카밀라를 고향으로 이끈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어머니 얼굴 한 번 보는 것, 그 소박한 바람을 안고 찾은 낯선 한국 땅에서 카밀라를 맞은 것은 어머니의 흔적 뿐입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그녀의 어머니(정지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카밀라가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날개'의 상징성이 부각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선 죽은 어머니 지은이 화자로 등장합니다. 정지은은 카밀라를 '너'라고 지칭하면서 딸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놓고 있는데요. 죽은 화자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있어서 다소 혼란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 혼란은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카밀라 혹은 정희재와 정지은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나는 스티브의 작업실에 보관된 나이키 운동화의 고유 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했지요. 대부분은 어머니가 나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겠노라고 호언하던 시절에 만든 운동화들이었어요. 그때 어머니는 건강하고,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죠. 나는 그 신발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나는 오리건의 해변들을 순례하며 운동화를 찾아다녔는데, 그 일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어쩌면 그 여름 내내 내가 찾고 다녔던 건 운동화가 아니라 지난 꿈의 잔해들일지도 모르지만요. (본문 중에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그리움을 안고 있습니다. 신발 공장에 다녔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국의 해변가에 떠내려온 운동화를 찾아다닌 서교수, 사투리 때문에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지훈 등, 카밀라의 꿈에 등장하는 "오로라 물고기"처럼 이 세상에는 없는 것, 잡을 수 없는 대상과의 소통 욕망을 품고 있는 이들의 그리움은 불가능한 꿈이고, 희망이고, "희망은 날개 달린 것".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작가의 말 중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간극, 그 심연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작가의 목소리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음. 그래요.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 방식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화자가 계속 바뀌고, 주변 인물들의 사연이 뒤섞여 이야기의 초점이 분산되는 점, 작위적인 설정 등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소설보다는 두쪽 분량의 작가의 말에서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이거 너무한가 ^ ^;; 근데 사실이 그렇...)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만 봐서는 제 스타일은 아니지만, 또 모르죠. 그의 다른 장편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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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들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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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저 신경질적인 얼굴. 입술을 더듬는 불안한 손길. 책날개를 장식하는 작가 사진을 보았을 때,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떠올렸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나이도 같습니다. 1949년생. 올해로 예순을 조금 넘겼군요. 소설의 화자이며 주인공인 프랑시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이 예순 살의 남자가 보여주는 지독한 염세주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를 연상케 합니다.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연못 주위를 빙빙 돌다 사라져 버린 좀머씨가 세상을 부정하는 방식이 '은둔'이었다고 하면 프랑시스의 그것은 '냉소'입니다.  

 

    다시 희망을 가진다는 건 끔찍한 거라네. (본문 중에서)

 

 

      프랑시스의 삶은 십 년째 정체 상태입니다. 한순간 수액을 빼앗긴 식물처럼 시들한 삶을 연명하고 있어요. "나를 내버려 두시오!" 하면서요. 그런데 좀머씨의 평화(?)는 프랑시스에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자신 존경 받는 작가이면서 유명 여배우를 딸로 두었기 때문이지요. 냉소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딸 알리스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관심병 환자입니다. 프랑시스는 상식을 뛰어넘는 딸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하고, 딸은 그런 아버지를 향해 자기밖에 모르는 추잡한 인간이라 공격합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아버지와 딸의 반목. 그 불안의 뿌리는 어머니의 죽음에 있습니다. 십 년 전, 프랑시스와 그의 딸 알리스는 눈앞에서 불 타 죽어가는 아내(어머니)와 딸(언니)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 끔찍한 사고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갈등을 남기게 되는데요. 살아남은 두 사람, 아버지와 딸은 이 깊은 상처와 분노의 불길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애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해결되지 못한 애도에 대해서. 이 남자의 문제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부정을 저질렀고, 부인과 그가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순간에 부인이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평생토록 용서받지 못한 사람, 그것에 대해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딸과의 관계로 옮아간다. 도덕적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납득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필립 지앙, <앵로퀴티블>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시스의 상처는 용서 받지 못한 자의 자책에서 빚어집니다. 끝내 용서 받을 길 없다는 절망은 자조로 이어지고요. 연못가를 빙빙 돌던 좀머씨처럼 그는 자기 주위를 배회하는 자,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는 자가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삶. 이 불가능한 씨름에 기진맥진하는 늙은 남자를 위무하는 것은 글쓰기입니다. 십 년째 제대로 된 글을 써보지 못한 그는 다시 소설에 매달립니다. 자기 주위만 빙빙 돌던 불안한 이 남자에게 글쓰기는 해결되지 못한 갈등과 상처로부터의 은둔이며, 그래서 구원이 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장 실행 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각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끝없이 으르렁대는 불안한 늙은이의 정서를 거칠게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의 원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Impardonnables'입니다. 소설의 등장인물과 그들 간의 다양한 갈등 관계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프랑시스와 알리스의 관계 이외에도 알리스와 그의 남편 로제, 동성애자가 된 안 마르그리트와 그런 엄마를 부정하는 아들 제레미, 프랑시스의 두 번째 아내 쥐디트와 제레미의 불륜 등 인물들 간의 갈등 상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애는 장갑을 껴요."
    "장갑을 끼다니 무슨 소리요?"
    "날 만져야 할 때, 그애는 장갑을 껴요."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무덤덤한 어투로 그런 끔찍한 말을 하곤 했다. 제레미가 집 앞에 있을 때면 그녀는 창가 그늘에서 몰래 아들을 훔쳐보았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자신을 만질 때 장갑을 끼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대해 놀랍도록 온화한 목소리로 자문하면서. (본문 중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팽팽한 갈등 구조가 숨이 막힙니다. 가족 간의 불화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수없이 많은데요. 암울함의 정도에 상관 없이 화해나 희망, 그도 아니면 자아의 성장이라는 판에 박힌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독자나 관람객 입장에서는 마음 편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 소설에 구원은 없습니다. 끝이 없다고 할까요.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또 다른 갈등이 싹틉니다. 우... 이건, 배신이야 배신! 끝까지 화해를 거부하는 작가 필립 지앙은 영화 《베티블루(37.2 Le Matin, Betty Blue 1986,프랑스)》의 원작자입니다. 불 타는 방갈로와 그보다 더 뜨거운 여인 베티의 고삐 풀린 청춘. 굉장히 강렬한 영화였죠. 당시 삼십대였던 작가는 이제 예순을 넘겼습니다. 자기 안에 들끓는 뜨거운 불길을 서슴없이 내뿜던 베티와 달리 상처 입은 늙은 짐승과 같은 프랑시스의 소심한 분노와 절망은 작가가 거쳐온 세월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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